홍유릉 인근에 있는 사릉(사적 209호)은 비운의 왕인 제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1440〜1521)의 능이다.
사릉은 왕릉보다도 문화재청이 관할하는 궁과 능에 필요한 나무를 기르는 양묘사업소 묘포장으로 보다 유명하다. 과거에 일반인들에게 공개한 적이 있었으나 방문객이 없어 비공개 왕릉으로 분리되었다가 2013년 1월1일부터 태강릉의 강릉, 동구릉의 숭릉과 함께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조선왕릉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당시 묘포장에 있는 종자은행과 소나무 등 각종 유전자원들이 궁궐과 능원의 생태문화자원 보존에 의미가 있다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알려진다. 이곳에 있는 어린 소나무 묘목들은 강원도 삼척의 태백산맥 능선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묘소인 준경묘와 영경묘의 낙락장송(落落長松) 후손들로 숭례문 복원에 사용될 정도로 한국의 대표적인 소나무로 평가받고 있다. 1999년에는 사릉에서 재배된 묘목을 단종의 무덤인 영월의 장릉에 옮겨 심어 소나무의 기(氣)만으로도 단종과 정순왕후가 그간의 아쉬움을 풀고 애틋한 정을 나누도록 했는데 이때 사용된 소나무를 ‘정령송(精靈松)’이라 부르므로 사릉을 답사할 때 유심히 보기 바란다.
정순왕후의 처음은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로 세종 22년(1440)에 태어나 15세일 때 한 살 어린 단종과 가례를 치러 왕비로 책봉되었다. 사실 이 결혼은 단종이 즉위한 지 만 1년이 되는 날 수양대군(세조)이 자신의 생각대로 왕비를 고른 후에 단종에게 거의 반 강제로 왕비를 맞이할 것을 청한 것이다.
결혼한 이듬해인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자 정순왕후는 왕대비가 돼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가 되면서 역경의 시련이 몰아친다.
세조의 왕위찬탈은 과거 세종·문종의 총애를 받았던 집현전의 일부 학사 출신으로부터 심각한 저항을 받았다.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 등의 유신들은 무관인 유응부(兪應孚)·성승(成勝) 등과 함께 세조를 제거하고 상왕을 복위시킬 것을 모의하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들은 세조 1년(1455) 명나라의 책명사(册命使)가 조선에 온다는 통보를 계기로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 때 거사할 것을 계획하였는데, 마침 이날 세조 제거의 행동책을 맡은 별운검(別雲劍)이 갑자기 폐해져서 거사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거사계획이 탄로되었음을 두려워한 김질(金礩)이 장인 정창손(鄭昌孫)에게 거사계획을 누설하고,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고변함으로써 거사 주동자인 사육신과 그외 70여 명에게 그야말로 피바람이 몰아친다. 이들 모두 처형되면서 단종 복위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상왕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돼 영월로 유배된 후 죽임을 당한다. 단종이 유배되자 정순왕후는 부인(夫人)으로 강봉(降封)되고 심지어는 추후에 관비로까지 곤두박 친다.
한국인들에게 ‘단종애사’처럼 애절하고 슬픈 이야기로 심금을 울려주는 비사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당시 더욱 놀라운 기록이 나타난다. 신숙주가 정순왕후 송씨를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가 물의를 빚은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부로 쳐다보지도 못하던 왕비지만 관비가 되었으므로 신숙주의 요청이 결코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숙주의 집현전 동료들은 절개를 지키다가 처절하게 죽어 ‘사육신’이 되었음에도 이에 동조는 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왕비를 종으로 달라는 신숙주의 처신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식탁에 자주 오르지만 잘 변질된다고 하여 숙주나물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 결코 과언이 아니라는 지적은 이래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세조도 신숙주의 행동이 매우 놀랍게 생각되어 ‘신분은 노비이지만 노비로서 사역할 수 없게 하라’는 명을 내려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냈다. 정업원은 조선 초기 슬하에 자식이 없는 후궁이나 결혼 후 남편을 잃고 혼자 살아야 했던 왕실의 여인들이 기거하던 곳이다. 정업원 터 바로 옆에는 비구니 스님들이 있는 청룡사라는 절이 있는데 고려 말 공민왕의 비(妃)인 혜비가 망국의 슬픔을 안고 스님이 돼 머물던 곳이다. 태조 이성계의 딸 경순공주도 이곳에서 비구니로 살았고 정순왕후 역시 이곳에서 스님으로 머물었다는 설도 있다. 청룡사 안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석이 있는 비각이 있는데 정순왕후를 애석하게 여겼던 영조가 직접 비와 현판을 내렸다. 현판의 ‘눈물을 머금고 쓴다. 앞봉우리와 뒷산 바위 천만년 가거라(前峯後巖於千萬年)’라는 글은 영조의 글씨다.
정순왕후는 정업원에서 시녀들과 함께 살면서 시녀들이 동냥해온 것으로 끼니를 잇기도 했지만 왕비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생계를 부담하기 위해 제용감에서 심부름 하던 시녀의 염색기술을 도와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을 하며 어렵게 살았다. 제용감은 각종 옷감의 채색, 염색, 직조 등을 관리하던 곳이다. 당시에 지치라는 식물의 뿌리를 이용해 비단에 물을 들였다.
정순왕후가 염색업을 하던 골짜기를 자줏골이라 불렀는데 현재 한성대학교 후문 부근에 지봉(芝峰) 이수광(李수光) 선생이 『지봉유설』을 저술한 초가삼간 비우당(庇雨堂, 비를 피할만한 집)에 당시의 흔적이 있다. 정순왕후가 염색을 하던 곳을 자주동샘(紫芝洞泉)이라고 부르는데, 자주동샘은 정순왕후가 자줏물을 들이던 곳이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정순왕후가 이곳에 와서 남편 단종이 억울하게 죽은 영월 쪽을 향해 명복을 빌며 비단 빨래를 하면 저절로 자주색 물감이 들었다고 한다. 비우당 옆에 원각사가 있는데 원각사는 단종의 넋을 천도하는 도량이다.
세조가 말년에 정순왕후의 실상을 알고 궁핍을 면할 수 있는 집과 식량을 주겠다고 했지만 정순왕후가 그것을 고이 받을 여인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활하기 어렵다고 한 들 왕후로서의 자존감을 꺾고 죽은 남편의 억울함과 열여덟에 홀로 된 자신의 한을 지울수는 없는 일이다. 한편, 그녀를 가엾게 여긴 동네 아녀자들이 조정의 눈을 피해 그녀의 집으로 먹을 것을 건네주고자 감시병 몰래 금남(禁男)의 채소시장을 열어 정순왕후를 돌봤다고 한다.
신설동 동묘의 벼룩시장을 끼고 나오면 도로 한 쪽에 숭신초등학교가 보이는데 이곳이 조선시대에 여인들만 출입할 수 있었던 여인시장이 있던 곳이다. 여인시장은 채소를 주로 팔던 곳으로 숭신초등학교 정문 옆에 정순왕후와 관계된 ‘여인시장’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었는데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여하튼 정순왕후는 남편인 노산군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면서 단종과 생이별을 했는데 채소시장 옆에 있는 ‘영도교(永渡橋)’는 귀양가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이다. 영도교는 당시 청계천에 놓인 다리 가운데 가장 동쪽에 있던 다리로 정순왕후로서는 자신이 나갈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까지 귀양가는 낭군을 배웅한 셈이다.
두 사람은 이후 현생에서는 만날 수 없었다. 단종이 유배지인 영월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영도교를 건너면 더 이상 사랑하는 님을 볼 수 없다는 말이 전해져 사람들은 다리를 두고 ‘영원히 이별 하는 다리’라고 해서 ‘영이별교’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4년간의 짧고 애틋한 결혼생활을 한 두 사람 사이에는 후손도 없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사사된 후 64년 동안 그를 기리다 82세로 정업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자신을 왕비로 간택했다 결국엔 폐비로 만들고, 남편에게 사약을 내린 시숙부 세조보다는 53년을 더 살았다. 또 세조의 후손이며 시사촌인 덕종과 예종, 시조카 성종, 시손 연산군의 죽음까지 지켜보면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조선시대 모든 능역에는 사가(私家)의 무덤을 두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사릉에는 사가의 무덤이 몇 기 남아 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중종은 정순왕후가 사망하자 단종 때부터 7대의 왕대를 거친 그녀를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했다. 돌아갈 당시 왕후의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국장을 치르고 능을 조성할 처지가 아니므로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가 출가한 집안에서 장례를 주도했고, 해주정씨 가족묘역 안에 정순왕후를 안장하고 제사를 지냈으므로 아직도 사가의 무덤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1698년 숙종에 의해 노산군이 단종대왕으로 복위되자 강씨도 정순왕후로 복위되었으며 신위는 창경궁에 모셔져 있다가 종묘의 영녕전에 안치되었다.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밤낮으로 공경함이 바르다’는 뜻으로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붙였다. 이는 억울하게 살해된 남편을 사모(思慕)한다는 뜻에서 지은 것이다.
사릉도 여타 왕릉처럼 홍살문이 있고 참도를 통해 정려각으로 들어가는데 이곳의 참도는 정려각까지 이어지지 않고 중간에 중단되어 있다. 사릉관리소 조성원 선생도 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를 질문하는데 아직 뚜렸한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다.
정자각은 맞배지붕으로 배위청이 짧아서 전체 건물의 모습이 정(丁)자형보다는 정사각형의 느낌을 준다. 정자각 왼편 뒤에 있는 예감은 특이하게 조각이 되어 있는 돌뚜껑이 있는데 원래 예감의 뚜껑은 나무로 만들었지만 이곳은 석재로 만들어졌으므로 현재까지 전해진다.
사릉은 대군부인 예로 장사 지낸 뒤 후에 왕후릉으로 추봉되었으므로 다른 능에 비해 단촐하게 꾸며져 있다. 능원의 좌향은 북북동에서 남남서 방향을 바라보는 계좌정향(癸坐丁向) 형태다. 능침을 3면 곡장이 둘러싸고 있으나 병풍석과 난간석은 설치하지 않았으며 봉분 앞에 석상 1좌, 석상 양측에 망주석 1쌍을 세웠다. 봉분 주위에 석양·석호 각 1쌍이 배치되어 있다. 아랫단에는 문인석·석마 각 1쌍 그리고 장명등이 있다. 장명등은 숙종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단종릉인 장릉에 있는 장명등과 더불어 조선시대 최초의 사각 장명등으로 평가된다.
조선 왕릉의 능침은 기본적으로 도래솔(송림)이 둘러싸여 있는데 이들 소나무는 사신사의 현무를 나타낸다. 현무는 거북 형태로 소나무의 수피가 오래되면 검은색으로 변하고 두껍게 갈라져 거북의 등 같은 모습이 되는 것에서 연유한다. 지금도 봉분을 중심으로 한 능침의 공간에는 소나무가 절대적 우세를 나타내며 잘 보존되고 있다. 이들 소나무들이 단종의 능인 장릉 쪽을 향해 고개 숙여 자란다는 전설이 한 때 전해졌으며 무속의 신의 한 명으로 숭배됐다. 무속에서는 그녀를 송씨부인 신이라 부른다.
#숙주나물 유래
참고문헌 :
「조선왕릉엔 ‘다빈치코드’ 뺨치는 ‘컬처코드’가…」, 윤완준, 동아일보, 2009.06.29.
「남편과 생이별 통곡 소나무는 알고 있을까?」, 이창환, 주간동아 제736호, 2010.05.10
「王을 만나다·34]유릉 (27대 순종황제·순명효·순정효황후)」, 김두규, 경인일보, 2010.05.20.
「[王을 만나다·35]사릉 (6대 단종의 정비 정순왕후)」, 이창환, 경인일보, 2010.05.26
「국모 시해…강제 하야…힘없이 나라 잃은 설움이여!」, 이창환, 주간동아, 2011.03.21.
「폐위된 황제 장례식 날 6·10 만세운동 들불 타올라」, 이창환, 주간동아, 2011.04.04.
「[서울스토리]⑬ 단군이래 가장 슬픈 과부 숭인동에서 울고있었네」, 오진희, 아시아경제, 2012.09.21.
『왕릉』, 이상용, 한국문원, 1997
『명예의 전당에 오른 한국의 과학자들』, 이종호, 책바치, 2004
『답사여행의 길잡이 동해⋅설악』,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돌베개, 2004
『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 답사기(조선 왕릉)』, 이종호, 북카라반,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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