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이 규범이 된 광릉>
광릉은 조선왕릉 중 남다른 것이 많기로 유명하다. 우선 입구로 들어가면 다소 이색적인 석비가 보인다. 하마비다. 선왕선비를 모시는 제사를 주관하기 위해 친행을 한 왕조차도 이곳 하마비에서부터는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야 했다. 조선왕릉동부지구 광릉관리소 경대수 선생은 다른 왕릉에도 하마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현재는 광릉에 유일하게 남아있다고 설명한다.
광릉의 배치를 보면 중앙에 정자각이 있고 그 뒤 좌우 언덕에 능이 있는데 이와 같은 동원이강 형식은 광릉이 최초다. 문종의 현릉도 동원이강 형식이지만 광릉의 조영 시기가 앞선다. 그런데 능은 두 개이지만 정자각이 하나라는데 다소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긴다. 각 릉마다 정자각을 하나씩 세우면 문제가 없는데 정자각 하나로 양 릉을 담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자각이 하나이든 둘이든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반문하겠지만 당대에 이처럼 중요한 문제는 없다는 점이다. 이는 세조와 정순왕후의 사망 년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세조는 1468년에 사망했으므로 정통 범례에 따라 왕릉이 축성되었다. 정자각도 조성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1483년에 정순왕후가 사망하여 동원이강형으로 별도의 능을 만들자 기존에 설치된 정자각이 예상치 않은 문제점을 야기시켰다. 전통적인 개념에 의하면 장례는 흉례이고 제사는 길례다. 그런데 세조의 릉이 완성된 후 정순왕후가 사망하였지만 정순왕후의 시신을 세조의 정자각에 모실 수 없다는 문제가 생긴다. 정순왕후의 시신은 흉례에 준하므로 길례를 기본으로 하는 세조의 정자각에 모실 수 없다는 것이다. 다소 어려운 문제인데 여기에 묘수가 도출된다. 왕비의 시신을 가정자각(흉례의 건물)을 지어 모신 후 3년 후 두 왕릉의 중앙에 새 정자각(길례)을 지어 함께 모시는 것이다.
광릉의 홍살문을 지나면 곧바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다. 왕릉에서 당연히 보일 것으로 생각하는 참도와 배위가 없기 때문이다. 참도와 배위가 없는 것은 광릉이 유일하다. 예감은 세조의 능 사초지에 있지만 산신석은 발견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왕릉에는 소나무가 주류를 이루는데 이곳은 소나무가 왕릉의 능침 배면에만 일부 있고 넓은 광릉 산역에서 소나무가 발견되지 않는다. 대부분 전나무이며 광릉 입구에 근래 심은 소나무 몇 그루가 있을 뿐이다. 이들 소나무는 세조의 유명한 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의 후계목이다. 이들 소나무가 광릉에 심어진 것은 세조와 정이품송의 인연 때문이다.
속리산 법주사를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정이품송은 높이 15m, 가슴높이의 둘레 4.5m의 거수로 수령은 600년 정도다. 1464년 세조가 속리산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랫가지에 걸릴까 염려하여 “연(輦)걸린다”고 말하자 소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번쩍 들어올려 어가(御駕)를 무사히 통과하게 했다고 한다. 또한 서울로 돌아 갈 때 마침 쏟아지는 소나기를 이 나무 아래서 피할 수 있어 신기하고 기특하여 세조가 소나무 가지에 친히 옥관자를 걸어주고 후일에 정이품 벼슬(장관급)을 내렸다. 이 고사로 이 나무를 ‘연걸이 나무’ 또는 ‘정이품송’이라고 부른다.
현대를 아이디어 세상이라고 하지만 정이품송을 두고 그야말로 기막힌 아이디어를 제시한 사람이 있었다. 한 네티즌은 보은군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원래 나라에서 장관급의 벼슬을 내리면 당연히 녹봉을 주므로 그동안 밀린 봉급을 받아 이 돈으로 정이품송을 영구보존하는 방안을 강구하자는 뜻이다. 그는 보은군민들이 소송을 해서라도 밀린 봉급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무에 벼슬을 내린 것은 세조가 처음은 아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진시황이 소나무에 벼슬을 내린 기록이 있다.
‘시황 28년 시황이 동방 군현을 시찰하고 추역산에 올라 비석을 세우고 노나라 지방의 유생들과 상의하여 진왕조의 공덕을 기리는 비문을 새겼다. 그리고 봉선(封禪)을 거행하고 산천에 망제(望祭)를 올리는 일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태산(泰山)에 올라 비석을 세우고 하늘에 제사하는 성대한 의식을 거행했다. 태산을 내려 올 때 갑자기 비바람이 불어오자 시황은 소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그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20작위 중 9등급)’라는 작위를 하사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이품송에 관한 기록이 없다. 정부에서 관직을 수여하는 경우 철저하게 기록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정이품벼슬’은 공식적인 사안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정부에서 장관급인 정이품송으로 공인하지 않은 이상 봉급을 받을 수는 없지만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했다는 데는 모두들 수긍할 것이다.
아들을 두지 못한 여인이 이 소나무 밑에서 기도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믿음이 있으며 노인들이 이 나무를 안고 돌면 편안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전설도 있다. 1982년 이곳에 솔잎흑파리가 침범하였을 때 소나무 주위에 방충망을 설치하여 솔잎흑파리의 침입을 막기도 하였다. 이를 위해 상당한 예산이 소요되었다고 알려지자 이런 내용이 국내외에 알려져 그 성가를 보다 높였다. 정이품송은 곁가지가 사방으로 고루 알맞게 아래로 드리우고 있어 전체적으로 수관이 우산을 편 모양으로 매우 아름다웠으나 안타깝게 1993년 봄 폭풍으로 곁가지 하나가 절단되어 현재는 과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정이품송에서 남서쪽으로 약 7킬로미터 떨어진 속리산의 서원계곡 입구의 길가에 자라는 정이품송 부인 소나무가 있다. 수령도 약 600여 년이며 줄기가 2개로 갈라져있다. 정이품송과 부부간이라하여 ‘정부인 소나무’라고 부르는데 정이품송이 곧추 자란데 비하여 이 나무는 밑에서 두 갈래로 갈라졌고 가지가 서로 얽혀 나무 모양이 극히 아름답다.
세조의 광릉은 이전의 왕릉과는 건축방법이 다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고 병풍석을 쓰지 말라.”고 유명을 내렸다. 그러므로 광릉은 병풍석이 없으며 석실은 회격(灰隔)으로 바꾸었고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신상은 난간 동자석주에 옮겨 새겼다. 이후에 이와 같이 석실이 아닌 회격으로 조성했으며 병풍석을 상설하지 않는 능이 많이 등장한다.
세조가 능을 간략하게 조성하여 인력과 비용을 절감하고 민폐를 덜게 만들라고 했지만 능이 갖고 있는 기본 시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광릉은 왕릉과 왕후릉 각각 곡장 3면, 난간석 12간, 석상 1, 장명등 1,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무인석 1쌍, 석마 2쌍, 석호 2쌍, 석양 2쌍을 두었으며 그 외에도 정자각, 수라청, 능표, 홍살문, 재실로 이루어져 있다.
광릉은 한국전쟁의 흔적을 많이 갖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자각이 올려 진 정면 석대를 보면 수많은 총탄자국(비행기에서의 기총소사 자국으로 비정)이 보인다. 배위청의 원형기둥에도 흔적이 보이는데 총탄 흔적은 고리를 박아 엄폐했다. 영조가 세조 등극 2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비각 내의 능표에도 총탄 흔적이 보인다. 세조와 정희왕후 능침의 석물에도 총탄자국이 많이 있는데 정희왕후의 능침에 있는 좌측 석마 한 개는 원형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우측 무석인의 경우 두 동강이 난 것을 보수한 것으로 흔적이 보인다. 정희왕후의 능침에서 바라보는 경관이 아름다워 왕릉의 신비감과 청량감을 느끼게 한다고 일컬어진다.
광릉의 정자각을 보면 전면 배위청의 처마에 잡상이 없지만 일제강점기의 사진에는 잡상이 보인다. 원형 복원에서 누락되었다는 것을 여러 번 지적했음에도 반영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광릉에서 다른 왕릉과는 달리 소나무가 거의 없고 전나무 등이 많은 이유는 일제강점기 때 식민지 조선의 문화말살 정책과 궤를 같이한다. 점령자들이 식민지의 문화를 말살하려고 하는 이유는 고유문화가 지속되는 민족의 경우 다시 부흥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궁궐과 왕릉은 큰 틀에서 구조가 같다. 궁궐은 살아있는 사람이 백성들을 보살피는 정치의 현장이라고 볼 수 있는 반면 왕릉은 죽은 사람이 후손과 백성들이 잘 되도록 빌어주는 장소라는 설명이다. 이러한 왕릉과 왕궁을 원형에서 되도록 변경시키려는 의도로 수없는 유산이 파괴되었음을 이해할 것이다.
왕릉을 답사할 때 많은 사람들이 불평하는 것 중의 하나는 능침을 공개하지 않으므로 왕릉 주위를 먼 곳에서 보거나 능침 인근에서 헛돌다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문화재청에서도 이런 문제점을 알고 있으므로 일부 왕릉은 능침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공개하고 있다. 동구릉에서 선조의 목릉, 서오릉에서 숙종의 명릉, 세조의 광릉 등이다. 특히 광릉의 경우 홀수 일에는 세조의 릉을 공개하고 짝수 일에는 정희왕후의 릉을 공개한다.
광릉의 원찰은 광릉에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인근 농안 마을에 있는 봉선사다. 고려 광종 20년(969) 법인국사가 창건했는데 정희왕후의 명으로 중창된 것으로 그 이름도 ‘선왕의 능침을 수호하는 원찰’ 이라는 의미를 담아 봉선사(奉先寺)라 지었으므로 광릉과는 한 짝과 같은 존재다. 한명회, 구치관 등이 책임을 맡아 건설한 사찰로 왕실 원찰 중에서 으뜸으로 대접받았다.
봉선사는 매우 흥미있는 용어를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바로 ‘야단법석(野壇法席)’이다. 법석(法席)은 원래 불교용어로 ‘법회석중(法會席中)’이 줄어서 된 말이다. 설법을 듣는 법회에 회중(會衆)이 둘러 앉아서 불경을 읽는 법연(法筵)을 일컫는 말로서 매우 엄숙한 자리를 뜻하던 말이다. 그런데 봉선사의 경우 신자가 많아 법당에서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법당 밖에서 법회를 여니 주위가 산만해 질 수밖에 없으므로 야단법석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야단법석이라는 말이 봉선사에서 유래되었든 아니든 엄밀하게 말하여 시끌벅적하게 떠든다고 할 때는 ‘야단법석(惹端法席)’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는 설명도 있다.
봉선사가 세조의 원찰로 유명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한국전쟁 등 여러 전란 때마다 화를 입어 현재 남은 건물들에서 옛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없지만 봉선사에 있는 대종(보물 제397호)은 아직도 현장에서 역사를 지켜보고 있다. 예종 1년(1469)에 제작된 것으로 높이 238cm, 입지름 168cm, 두께 23cm, 무게 2만 5000근에 달한다. 고려시대에 비해 종 입구가 넓어진 형태나 몸통에 있는 가로 띠와 조각수법 등은 조선시대 나타난 새로운 양상으로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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