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유릉(裕陵)
조선왕조 마지막 왕릉인 제27대 순종(1874〜1926) 및 순명황후 민씨(1872〜1904), 순정황후 윤씨(1894〜1966)의 유릉도 황제릉으로 조성됐다. 순종은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났고 광무원년(1897)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태자가 되었으며 1907년 일제의 강요와 모략으로 고종이 물러나자 그 뒤를 이어 황제가 됐다.
1907년 황제로 즉위했지만 일본의 꼭두각시로 변한 친일파들에 의해 전혀 힘을 쓰지 못하다가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 이완용의 주재로 열린 어전회의에서 한일합병조약 조인을 거쳤는데 문제는 황제인(옥쇄)의 날인이다. 순정황후 윤씨(1894〜1966)가 병풍 뒤에서 어전 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 성향의 대신들이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의 날인을 강요하자, 옥새(玉璽)를 자신의 치마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는데, 결국 큰아버지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기자 윤덕영이 날인하여 조선왕조는 멸망한다.
순종은 ‘이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다가 1926년 사망했는데 장례는 도쿄의 국내성에서 주관하여 일본 국장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황제장이 아니라 이 왕가가 진행하는 형식으로 했으며 장례 기간도 조선왕조의 국상인 6개월이 아니라 한 달 반으로 짧게 했다.
순종의 하관일인 1926년 6월 10일은 광복을 위한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고종의 장례일에 3·1운동이 일어났듯 국부를 잃은 국민의 슬픈 감정이 독립 만세운동으로 결집돼 폭발했지만 대세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순명황후 민씨(1872〜1904)는 여은부원군 민태호의 딸로 1897년 황태자비가 되었으나 1904년 순종 즉위 전에 사망하여 지금의 능동 어린이공원에 모셔졌다가 순종 사망 후 천장했다. 순정황후(순정효왕후)는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로 1904년, 당시 황태자비였던 순명황후 민씨가 사망하자 1906년에 13살의 나이에 동궁계비(東宮繼妃)로 책봉되었고, 1907년에 순종이 황제로 즉위함에 따라 황후가 되었다. 순종의 지위가 이왕(李王)으로 격하됐으므로 그녀도 이왕비(李王妃)가 되어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 머물렀으며 1926년 순종이 사망하자 대비(大妃)로 불리며 창덕궁의 낙선재(樂善齋)로 거처를 옮겼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창덕궁에 남아있었는데 인민군이 궁궐에 들이닥쳐 행패를 부리자 5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크게 호통을 쳐 내보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두려움을 모르는 여걸(女傑)로 알려진다. 만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슬픔을 달래다 1966년 72세로 창덕궁 석복헌(錫福軒)에서 사망하여 유릉에 순종과 합장되었다.
순종의 능묘는 현재도 많은 구설수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 왕릉은 기본적으로 조선의 대표적인 길지에 선정되므로 기(氣)가 높은 장소에 있다고 이야기된다. 그런데 김두규 박사는 유릉의 경우 명당이라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풍수지리상 매우 나쁜 자리에 있다고 설명한다. 장남식 선생의 유릉에 대한 평은 다음과 같다.
‘유릉은 혈처가 아닌 내룡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장서(葬書)』에서 말하는 장사를 지내서는 안 될 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와 같은 ‘과산(過山)’이다. 또한 혈처 앞이 낮은 언덕으로 돼 있어 흉지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역룡(逆龍)’에 해당한다. 과룡과 역룡의 땅위에 터를 잡다보니 언뜻 ‘내팔거팔’의 지세처럼 보이지만 네 개의 산줄기가 제각각 흩어지는 모습이다. 한마디로 흉지다.’
조선왕조를 일본에 빼앗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황제로 불린 순종인데 왜 이러한 흉지에 조선의 마지막 황제를 안장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마련이다. 이 부분에 관한 한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음모론을 펼친다. 흉지에 매장함으로써 그 후손들을 절손시키고, 조선의 부흥을 아예 꿈도 꾸지 못하게 하려는 일제의 음모라는 것이다. 누가 그런 음모를 꾸몄을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김두규 박사는 일본 총독부 혼자만의 작품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일제가 조선황실의 후손들이 번창하는 것을 바라지 않을 수 있지만 당시 일본의 조선병탄에 앞장을 서면서 일본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고 있던 조선의 일부 대신들이나 귀족들 역시 이미 멸망한 황실후손들의 번창을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한마디로 풍수지리상 좋지 않은 곳에 장지를 선택한 것은 여러 집단의 묵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는 말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유릉이 길지든 아니든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인 순종이 매장되어 있는 유릉은 조선의 마지막 왕릉이기도 하지만 유일한 동봉삼실의 합장릉이다. 유릉은 황제와 황후 2명의 현궁이 함께 있는 합장릉으로 이제까지 지켜졌던 우상좌하의 원칙에 따라 제일 왼편에 황제의 재궁이 있어야 하나, 이곳은 다르다. 중앙 순종, 우측 순정효황후, 좌측 순명효황후의 재궁을 두어 기존의 원칙을 따르지 않았다. 이는 중국 황제릉의 제도를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유릉의 봉분 앞의 석물은 황제의 능묘이므로 홍릉처럼 능침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는 세우지 않았고 혼유석 1좌, 그 양옆으로 망주석 1쌍을 세우고 이를 3면의 곡장이 둘러싸고 있다. 홍릉에는 혼유석에 향로석이 함께 놓였지만 유릉에는 향로석이 없다.
내계의 양 가장자리에 1기씩 위치하는 망주석은 팔각의 형식을 가지며 높이는 각각 289cm, 287cm다. 각각 원주-주신, 대석-지대석의 석재 2매로 구성되었는데 대석에 주신을 끼워 결구한 형식이다. 주신에는 세호가 조식되어 있다. 우측 망주석 세호는 위를 향하고 있으며 머리 부분이 염의에 걸쳐져 있다. 좌측 망주석 세호는 아래를 향하고 있으며 반대로 꼬리 부분이 열의에 걸쳐있다. 홍릉 세호와 거의 유사한 형태이나 이보다 훨씬 도식화된 경향을 보인다. 즉 이목구비가 명확하게 표현되었고 목에서 꼬리에 이르는 등갈기가 섬세하고 충실하게 표현되었다.
장명등은 사각형식에 전체높이는 263cm정도다. 고종 홍릉의 장명등과 형태 및 문양이 유사하지만 한눈에 보아도 석질이 좋지 못하고 전체적인 조각 수준이 떨어진다. 정자석은 3단의 원수로 구성되며 상부는 연봉형 하부는 연화형 그리고 정자석과 개석이 맞닿는 부분은 하엽으로 이루어졌다.
유릉은 능침-침전-홍살문 등이 직선형으로 배치된 홍릉과 달리 능침공간과 제향공간의 축이 각기 다르게 배치됐다. 그러나 홍릉과 같은 황제릉으로 조성되었으므로 홍릉에 비해 능역의 규모가 다소 좁지만 석물은 홍릉에 비해 오히려 사실적으로 만들었다. 순종의 능역을 조성하는 산릉주감은 조선인이었으나 실제적 실무자는 도쿄대 교수이면서 메이지신궁 등을 지은 일본인 건축가 이동충태(伊東忠太)였다. 일본인들은 유릉의 석조물을 일본식으로 조각하길 고집했다. 1927년 6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유릉의 침전 앞 석물을 조성하는 과정을 기록한 기사가 실렸는데 그 내용은 일제가 처음부터 조선의 전통기술을 무시하고 한 나라의 문화를 짓밟으려 한 의도를 금방 파악할 수 있다.
‘모형을 신라시대부터 이어온 조선식에 근대 일본식을 가미한 절충식으로 한다고 하였으나 그 후 이와 반대되는 순일본식으로 하자는 의견이 높아져 드디어 순일본식으로 하여 짐승의 다리를 앙상하게 내어놓고 선(線)을 일본식으로 하고… (중략) 고종제의 황릉 앞 석물은 중국식을 가미한 것으로 졸렬하고 조선말기의 작품으로 장래에 좋은 사실을 남기기 위해 홍릉을 지척에 두고 전연 딴 취미의 석상을 만드는 것이란다.’
외형적으로만 보면 이들 석물들은 예리하고 사실적인 면이 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창환 교수는 이것은 유럽의 조각기술을 도입해 석고로 본을 떠 만드는 새로운 기술을 시험해본 결과라고 혹평했다. 서구의 검증되지 않은 기술을 시험적으로 도입하면서 일본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적 행위인데 그 근저는 서구의 기술을 통해 조선이나 중국의 문화는 쇠퇴하고 일본의 문화가 앞서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속셈이라는 설명이다.
문무석인은 정교하고 세밀하기는 하나 근거도 없는 유럽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표정도 없다. 문석인은 눈망울도 없다. 마치 앞 못 보는 사람을 표현한 것 같은 인상이다. 다른 것은 사실적으로 정교하게 조각하면서 그렇게 조각한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들 석물은 당대의 시대상황 즉 조선의 기술, 일제와 서구의 기술이 도입되어 혼합된 것이 보다 적절한 표현이지만 나라가 사라진 당대의 슬픈 현상이 곳곳에 보이므로 씁쓸하다는 지적이 많이 제기된다.
‘일(一)’ 자형의 침전 안에는 원색의 단청과 천정에 두 마리의 용이 그려진 용상이 화려한 문양과 선명한 색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유릉의 문⋅무인석은 지금까지의 것과는 달리 특정인을 모델로 한 것처럼 사실적이며 개성적으로 현대적인 조각수법을 인지한 조각가가 제작한 것으로 인식한다. 문인석은 홍릉과 마찬가지로 금관을 쓰고 있다. 유릉의 능역 내에는 두 기의 어정(御井)이 비교적 잘 남아있으며 그 중 금천 주변의 어정은 둘레석만 남아있다. 재실은 홍릉과는 달리 좌우 동형의 건물이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황제릉답게 일반 왕릉에 비교하여 매우 화려한 마감이다. 유릉의 비각 안 비석에는 ‘대한순종효황제 유릉 순명효황후부좌 순정효황후부우’라고 전서체로 음각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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