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있는 왕릉>
조선왕릉은 모두 42기이지만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은 총 40기다. 이는 북한에 있는 제릉과 후릉은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조선왕릉의 완결을 위해 제릉과 후릉도 다룬다.
그러나 끄새는 아래 설명하는 제릉과 후릉을 직접 답사하지 못하였다. 아쉽지만 평양에서 발간된 『조선유적유물도감』과 『문화유산 왕릉』,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실 계보』 등을 비롯한 여러 자료들을 참조하였음을 적는다.
〇 제릉
태조에게는 2명의 정부인이 있는데 첫번째 부인은 신의왕후, 둘째는 신덕왕후 강씨다. 신의왕후는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개성에서 사망하였으므로 후에 왕비로 추존되었다.
신의왕후는 안변 사람 한경의 딸이다. 한경은 함경도의 요충지인 안변의 제족으로 고려말 밀직사부사 증영문하부사로 이성계 집안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이성계의 증조부 행리는 두만강변의 여진인들에게 쫓겨나 남쪽 안변으로 내려왔을 때 안변의 호족 최기열의 딸을 두 번째 아내로 맞아들여 터전을 잡을 수 있었다.
한경의 딸 신의왕후 한씨는 당시의 풍습대로 10대의 어린 시절 이성계에게 시집와서 6남 2녀를 낳았다. 그녀는 함흥 윤전리에서 살았는데 태조가 동북면 병마사로 삼선(三善), 삼개(三介)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봉익대부밀직부사에 오르고 단성양절익대공신의 호를 받자 원신택주(元信宅主)에 봉해졌다.
우왕 때에는 포천의 재벽동 전장(田莊)에 살다가 우왕 14년(1388) 위화도 회군 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동북면에 피난하기도 했다한다.
태조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강윤성의 딸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이는데 이 때문에 한씨의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알려진다. 이성계가 둘째 부인인 강씨와 주로 기거했기 때문이다. 이 일이 한씨 소생의 아들들에게 한을 남겨 추후 태종이 철저하게 본처와 첩을 가리고 적자와 서자를 구별하는 정책을 벌리는 요인이 된다.
그녀는 조선 개국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개국 바로 전해인 1391년에 5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조선이 개국된 후에 절비로 추존되었고 1398년에 정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신의왕후로 추존되었다.
그녀는 개성 근처인 개성군 관도면 상도리 제릉에 매장되었는데 능의 동쪽에 제궁(齊宮)을 창건하여 초경사(肖慶寺)라 칭하고 교종(敎宗)에 속하게 했다. 불교가 흥하던 고려의 문화적 관습대로 능에 제사를 올리는 사찰을 건설한 것이다.
태종 7년(1407) 토목건축에 재주가 있는 박자청(朴者靑)이 왕비릉에 걸맞지 않은 제릉을 확장했는데 그는 1408년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의 축조 실무도 담당한다.
1410년에 태조의 신주에 신의왕후의 신주를 부제(附祭)하여 종묘에 배향했다. 숙종 2년(1676) 정자각에 불이 나 영조 20년(1744)에 신도비를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제릉에는 건원릉과 유사한 6각형의 장명등이 있다. 그녀 소생으로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 등 여섯 아들과 경신, 경선 두 공주가 있다. 이중 방과는 정종, 방원이 태종으로 두 명이 조선왕이다. 비록 살아서는 공식적으로 왕비가 되지 못했지만 조선 왕조에서 두 명의 왕을 배출하여 가장 성공한 조선 여인이라고 볼 수 있다.
〇 후릉
제2대 정종과 왕비 정안왕후 김씨의 쌍릉인 후릉도 개성직할시에 위치한다. 정종은 태조 이성계의 차남이며 신의왕후 한씨 소생으로 함흥의 귀주동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방과였다가 후에 경(曔)으로 바뀌었으며 자는 광원(光遠)이다.
그가 성장할 때인 고려말은 내외적으로 격변의 시기인데 특히 고려 충정왕 시기부터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되었다. 왜구는 우왕 시대의 단 14년간 무려 378회나 침입할 정도로 절정이었는데 이는 14일 간격으로 고려를 침입했다는 뜻이다.
이에 고려에서 총력전으로 왜구에 대비토록했는데 1377년 20살의 청년 시절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또한 1390년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공로로 밀직부사에 올랐다. 또한 양광도에 침입한 왜적을 영주에서 격파했고 판밀직사사, 삼사우사 등을 역임했다.
그러므로 그는 고려 조에서 장상 벼슬까지 올랐으나 원래 정치에 뜻이 없었으므로 개국 후에도 권력을 탐하지 않았고 조정의 일에 관련하지 않았다. 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석이 살해되었음에도 전혀 왕위를 넘보지 않았고 특히 ‘당초부터 대의를 주장하고 개국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업적은 모두 방원의 공로인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 수 있느냐’고 완강하게 발언하면서 세자의 자리는 당연히 방원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태조의 장자 진안대군(鎭安大君)은 이미 사망하였으므로 방원은 태조의 반발과 민심을 의식해 그에게 세자의 자리를 잇도록 했다. 이후 1개월 뒤인 1398년 음력 9월, 태조의 양위로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 제2대 국왕으로 등극하였다.
엄밀한 의미에서 정종도 우왕 3년(1377)부터 21년 동안 전쟁터를 누빈 군인 출신이지만 일찍이 정안군(태종)이 창업 대의에 가장 열정적이었던 것을 인정했다. 한마디로 방원에게 세력이 밀리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여하튼 왕위에 오르자 1399년 3월 한양에서 개성으로 천도하였고, 4월 집현전을 설치하여 강론을 담당케 하였다. 5월에는 태조 때 완성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간행하였다.
관인들이 권세가에 청탁하는 것을 방지하는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을 제정하여 정·경 분리를 꾀했다. 또한 1400년 사병(士兵) 혁파를 통한 병권의 집중, 삼군부와 의정부의 분리를 통한 군ㆍ정 분리체제 형성 등을 통해 왕권의 강화를 위한 개혁을 추진했는데 이는 방원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왕위에 있지만 실권이 없는 것을 잘 알고 1400년 11월 태종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다.
왕위에 있은 지 2년, 상왕의 자리에서 20년간 있었다. 정안왕후 사이에는 아이가 없지만 여러 명의 숙의(淑儀)로부터 15명의 군(君)과 8명의 옹주를 낳았다.
정안왕후는 경주 김씨 천서의 딸이다. 정안왕후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성품을 타고났으며 공손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녔다고 한다.
1398년 방원의 난이 일어나 영안대군이 세자에 오르자 덕빈(德嬪)으로 책봉되었다가 정종이 왕위에 오르자 덕비(德妃)로 진봉되었다. 그녀는 성정이 인자하고 후덕했으며 정종이 왕위에 있을 때 정종이 몸이 아프자 태종에게 선위할 것을 건의했다.
덕분에 정종은 태종과의 권력 다툼을 피하고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태종은 정종을 상왕으로 삼고 1400년 12월 존호를 인문공예상왕으로 올렸고 또한 정안왕후에게도 순덕왕대비라는 존호를 올렸다.
정종은 왕위에 물러난 후 개성 백룡산 기슭의 인덕궁에 머무르며 격구와 사냥을 즐기고 온천을 다니거나 연회를 베푸는 것으로 여생을 보냈고 왕위에서 물러난 지 19년 뒤인 1419년 9월에 인덕궁에서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명나라에서 ‘공정(公靖)'이란 시호를 내렸으나 정작 조선에서는 그에게 묘호를 올리지 않았다. 조선 중후기까지 수백 년간 묘호를 받지 못하고 공정대왕(恭靖大王)으로 불리다가 숙종 7년(1681)에 ’의문장무‘의 시호와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여기에 ’온인순효‘라는 존호가 더해져 칭호는 ’정종공정의문장무온인수효대왕(定宗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이다.
정안왕후가 1412년 먼저 죽고 1420년 정종이 사망하자 개성시 판문군 영정리에 묻혔으며 능호는 후릉이다. 후릉은 계좌정향(癸坐丁向) 즉 북북동에서 남남서 방향으로 백룡산을 뒤로 하고 탁 트인 평지를 건너 안산이 보이는 배산임수의 명당자리로 알려지며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했다.
후릉 공사 자체는 1407년 제릉을 축조한 박자청이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문화재청>에 의하면 후릉은 고려 공민왕릉을 많이 닮으면서 조선시기 왕릉들의 특징도 다 갖추고 있다고 적었다. 봉분을 두른 병풍석은 많이 침식되었지만 난간석 주두(柱頭)는 건원릉에서 꽃봉오리 모양의 원수(圓首)가 아니라 고려공민왕릉처럼 사각형 기둥이다. 즉 조선왕릉은 공민왕릉을 비롯한 고려의 왕릉 건축을 계승하면서 규모를 크게 하고 석물을 많이 놓는 방향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현재의 모습은 정자각이 없으며 곡장도 없지만 후릉의 봉분의 높이는 3.45미터이며 직경은 7미터다.
제릉은 북한의 문화재 분류인 보존급(대한민국의 보물급에 해당) 556호로 지정되었고, 제릉비는 보존급 1624호, 후릉은 보존급 제551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
「[王을 만나다·22]광릉 (7대 세조·정희왕후)」, 염상균, 경인일보, 2010.02.26.
「두 능에 하나의 정자각… 천연박물관 광릉숲 거느려」, 이창환, 주간동아, 2010.05.17
「광릉숲」, 조홍섭, 네이버캐스트, 2011.07.29.
『답사여행의 길잡이 동해⋅설악』,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돌베개, 2004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실 계보』, 박영규, 웅진지식하우스, 2008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0
『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 답사기(조선 왕릉)』, 이종호, 북카라반,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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