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의 제1구역인 서울시 동북쪽을 거친 후 서북쪽인 제2구역을 향한다. 이곳은 서오릉(사적198호), 서삼릉, 온릉, 파주삼릉(공순영릉), 파주장릉, 김포장릉 등 14개 릉이 분포되어 있다. 제일 먼저 5개 릉이 모여 있는 서오릉으로 향한다. 서오릉은 행정구역상 경기도 고양시에 있지만 서울의 서북지역과 매우 가까워 교통이 매우 편리한 지역에 있는 유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이다.
서오릉은 세조의 맏아들이자 왕세자였던 의경세자(추존 덕종)가 20살에 요절하자 풍수지리에 따라 길지로 추천된 이곳을 세조가 친히 거동하여 경릉의 능지로 정하면서 비롯되었다.
경릉 이후 이곳에는 덕종의 아우 예종과 안순왕후가 묻힌 창릉이 조성되고 200여년 뒤 조선의 제19대왕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이 조성됐다. 이후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와 인원왕후 김씨의 명릉이 조성되고 30여년 뒤 영조 33년(1757년)에 영조의 원비인 정성왕후 서씨의 홍릉이 조성되면서 이곳은 ‘서오릉’이라 이름 붙여지게 됐다.
정성왕후는 죽어서도 시아버지인 숙종과 그의 시계모 인경왕후, 작은 시어머니 두 분을 모셨고, 숙종의 계비였다가 폐비가 된 대빈 장희빈의 대빈묘(大嬪墓)가 1970년대에 천장해왔으므로 시부모 다섯 분을 모시는 셈이다. 장희빈 묘는 원래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에 있었으나 지금의 자리로 옮겨 숙종과 관계된 왕비들과 장희빈이 사후에 모두 한 지역에 모여 있다.
서오릉에는 왕릉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경릉, 창릉, 명릉, 익릉, 홍릉 등 5개의 왕릉과 2원(순창원, 수경원), 1묘(대빈묘)가 있다.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또는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을 말하고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과 같이 묘(墓)라 부른다. 순창원은 명종의 맏아들 순화세자와 그의 부인 공회빈 윤씨, 수경원에는 사도세자의 어머니 선희궁 영빈 이씨가 묻혀 있다.
① 명릉
서오릉은 현재 2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서오릉 입구를 경계로 우측에 명릉이 별도로 있고 좌측에 나머지 4개의 릉이 있다. 원래 서오릉이라는 명칭이라면 모든 릉이 한 구역 안에 있어야 하는데 명릉은 이런 규범에서 어긋난다. 한마디로 서오릉 4개의 릉과 명릉 사이에 군부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오릉으로 입장권을 발급받으면 모두 관람할 수 있다.
명릉은 제19대 숙종(1661〜1720) 및 계비 인현왕후 민씨(1667〜1701), 인원왕후 김씨(1687〜1757)의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은 동원 쌍분(雙墳)으로 조영하고 인원왕후의 능은 오른편 언덕에 단릉으로 모셔 쌍릉과 단릉, 동원이강의 특이한 형식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숙종은 1674년 13세의 나이로 왕에 오른 후 46년 동안 재위했다.
숙종은 전후 3차례에 걸쳐 왕비를 맞이했는데 원비는 인경왕후, 둘째와 셋째 왕비가 인현왕후와 인원왕후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바로 영화나 TV 드라마로 자주 제작돼 일반인들에게 매우 잘 알려져 있는 장희빈(張禧嬪)이다. 장희빈은 역관 출신으로 대부호가 된 장경(張烱)의 딸로 조선왕조 최초로 중인인 역관 가문으로 왕비가 되었던 여인이다. 그러나 장희빈은 궁에 들어가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왕세자 경종을 낳고 왕비가 되었지만 결국은 폐출되는 비운을 겪는다.
숙종 시기는 조선 정치사상 정치세력의 기복이 가장 심하고 붕당 정치의 정쟁이 심화되던 시기다. 조선 후기의 역사를 큰 틀에서 분류하는 중요한 주제의 하나는 당쟁(黨爭)이다. 그것은 국정 운영은 물론 사상적 지향과 교유·혼맥 같은 인간 관계에 이르는 여러 현상의 향배를 결정한 핵심 요소였기 때문이다.
정치사적인 측면에서 숙종의 치세를 요약하는 단어는 ‘환국(換局)’이다. 숙종대의 중심적 사건은 세 차례의 환국으로 숙종6년(1680)의 경신환국, 숙종 15년(1689)의 기사환국, 그리고 숙종 20년(1694)의 갑술환국이다.
환국은 현종 때의 예송 논쟁을 통해 손상된 왕실의 권위와 상대적으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려 한 숙종의 정국 운영 방식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숙종은 군주의 고유 권한인 인사권을 강력하게 행사, 환국이란 방식을 사용하여 정권을 교체함으로써 붕당내의 대립을 촉발시키고 군주에 대한 충성을 유도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왕의 치세기간 동안 신하와 관료들 사이의 정쟁은 격화됐지만 왕권은 도리어 강화돼 임진왜란 이후 계속되어온 사회체제 전반의 복구정비 작업이 거의 종료되면서 숙종은 상당한 치적을 남겼다고 평가한다.
경신환국은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등용된 사건으로 이른바 ‘삼복의 변(三福之變)’으로 영의정 허적의 서자인 허견(許堅)이 역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역모 자체가 남인과 종친이 연루된 중대한 사건으로 남인의 핵심적인 두 인물인 허적과 윤휴(尹鑴)가 사사되었고 주요 관직은 서인으로 교체되었다. 이때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이 최상의 예우로 등용된다.
이런 상황은 10년 가까이 이어지는데 희빈장씨의 등장으로 정황은 급변한다. 당시 숙종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아직 후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곧 해결되었는데 숙종 14년(1688) 장씨가 마침내 왕자 즉 경종을 출산한 것이다. 곧바로 왕자를 원자로 삼고 장씨를 희빈에 책봉했다.
서인은 숙종의 처사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표면적으로는 국왕과 왕비가 아직 젊어 왕자를 충분히 생산할 수 있다는 이유였지만, 핵심적인 이유는 희빈장씨가 남인과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그런 전례는 중국에도 없다면서 국왕의 의도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숙종은 신하들의 반항에 전격적이고 대대적인 숙청인 기사환국을 단행했다.
기사환국은 서인에게 큰 파국을 몰아왔는데 서인을 상징하는 이이(李珥) 등이 출향(黜享) 즉 문묘에서 축출되고 송시열은 사사되었다. 주요 관직은 권대운, 김덕원 등 남인이 발탁되었다. 이들의 서인에 대한 보복은 만만치 않아 김수흥, 김수항, 홍치상 등 18명 대신급이 사약을 받았고 50여 명은 유배갔으며 대부분의 다른 서인들은 파직당하거나 삭탈관직을 당했다.
또한 앞서 처벌된 주요 남인의 신원도 이뤄졌다. 허적·윤휴·유혁연 등은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더불어 숙종은 중전 민씨를 서인(庶人)으로 폐출해 사가로 내보낸 뒤 희빈장씨를 정식 왕비로 삼고 종묘사직에 알렸다. 서인이 장악했던 중앙 조정은 곧바로 남인으로 교체되었다.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남인은 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장악했지만, 집권세력에 합당한 면모를 보여주지 못하여 갑술환국을 불러온다. 이 당시 궁궐의 중요한 변화는 영조 어머니인 무수리 숙빈 최씨가 책봉되어 총애를 받기 시작하자 상황은 급변하여 중전 장씨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숙의 최씨를 독살하려고 한다는 고변이 들어왔다.
그 뒤의 과정과 결과는 기사환국을 그대로 뒤집은 것이었다. 우선 김익훈·김석주·송시열 등이 복관되고 이이·성혼은 다시 문묘에 종사되었고 영의정 권대운을 비롯한 주요 남인은 관직에서 쫓겨나거나 처벌되었다.
핵심적 문제였던 중전의 교체도 즉각 이뤄졌다.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고, 민씨는 중전으로 복귀하면서 권력을 둘러싼 궁중의 갈등은 비극적으로 종결되었다. 인현왕후가 사망했는데 그동안 희빈장씨와 그 일가가 자신의 거처에 신당을 짓고 왕후를 저주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숙종은 즉각 장씨를 사사했다. 그 뒤 숙종의 치세는, 노론과 소론의 갈등은 있었지만, 서인이 주도하면서 종결되었다. 그야말로 조선왕조에서 숙종처럼 파란만장한 사건을 만든 사람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극심한 당쟁의 여파를 조종하면서 일세를 살았지만 46년에 걸친 긴 세월 동안 숙종의 업적이 없을 리 없다. 우선 대동법(大同法)을 경상도와 황해도까지 확대했고 주전(鑄錢)을 확대하여 당시에 발행된 상평통보(常平通寶)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화폐로 유통되었다. 국방과 군역 문제에서도 여러 변화를 보여 임진왜란 이후 추진된 군제를 개편했다. 또한 북한산성을 크게 개축해 도성 방어를 강화하기도 했다. 일본과도 활발하게 교류하여 통신사를 파견하고 막부로부터 왜인의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아 울릉도의 귀속 문제를 확실히 했다. 또한 북쪽 변경에 무창(茂昌)과 자성(慈城)의 2진(鎭)을 설치, 옛 땅의 회복운동을 시작하였으며, 이로부터 조선인의 압록강 연변 출입이 잦아지면서 인삼채취사건 발단으로 청나라와의 국경선 분쟁이 일어나자 1712년 청나라와 협상하여 유명한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다.
흥미로운 것은 왜관에서 훈도(訓導)·별차(別差) 이하로서 인삼을 몰래 매매한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다. 인삼이 조선의 특산물로 중요성을 인정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인삼 매매로 사형을 언도받았다는 것은 인삼이 흔한 오늘날의 현대인으로서는 다소 이해하지 못할 일로 보이는데 여하튼 조선을 대표하는 특산물이므로 중하게 다스렸음을 알 수 있다.
숙종이 당파싸움을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사회체제 전반을 정비하는 작업을 거의 완료했다고 평가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숙종의 통치에 상당한 비판을 가한다. 가장 대표적인 부분은 환국의 타당성과 실효에 관련된 것이다. 숙종 때의 환국은 본질적으로 정책의 대립보다는 궁중의 정쟁을 자신의 권력 장악에 이용하기위한 방식인데 그 방법이 지나치게 돌발적이었으며, 그 결과 또한 파괴적이고 소모적이었다는 점이다.
숙종은 인경(仁敬)왕후·인현(仁顯)왕후·인원(仁元)왕후로 이어지는 세 왕비를 두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는 왕자를 얻지 못했고 희빈 장씨와 숙빈 최씨에게서 각각 경종과 영조가 되는 왕자를 낳았다. 인현왕후는 1681년 숙종의 계비가 되었으나 숙종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갑술환국 때 복위되었고 1702년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757년에 사망했다.
숙종은 인현왕후가 사망하여 명릉에 장사 지낼 때 왕비릉을 비워놓아 쌍릉으로 조성하고 정자각을 중간에 위치하게 했다. 정자각 옆의 비각에는 두 개의 비석이 각각 문을 달리하여 세워져 있는데 왼쪽은 숙종과 인현왕후의 것이고 우측은 인원황후의 비로 모두 명릉이란 한 이름으로 조성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숙종이라면 조선 왕조사에서 한 획을 그은 희빈 장씨 즉 장옥정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조선에서 희빈 장씨를 제외하면 조선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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