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 이야기>
장희빈은 한국 사극에 등장하는 역사인물 가운데 가장 논쟁이 뜨거운데 이는 그처럼 다룰 수 있는 많은 콘텐츠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논쟁적인 인물은 진면목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은데 과장과 포장이 난무하며 더불어 그녀가 살았던 시대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녀는 조선 숙종 때에 펼쳐진 격렬한 당쟁 한복판에 있었다. 당시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린다는 것이 핵심인데 특히 서인, 그 가운데서도 노론은 장희빈을 희대의 악녀로 몰았다. 그들의 큰 스승 송시열 등이 장희빈의 왕비 책봉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 김향은 『악녀의 세계사』에서 역사적으로 악녀라 불리는 42명을 꼽았는데 이 중에 한국인으로는 조선조 태종 이방원의 왕비인 원경왕후 민씨, 중종의 왕비인 문정왕후 윤비, 그리고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 민비를 꼽았지만 야사에서 악명높은 장희빈은 꼽지 않았다.
이를 보면 사람마다 악녀를 평가하는 관점이 다르다 볼 수 있는데 권경률 박사는 골치 아프게 얽히고 설킨 당쟁을 걷어내고 장옥정을 인간적으로 살펴보면 소위 야사에서 전해지는 내용과는 상당히 다른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포장과 가필된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장희빈으로 잘 알려진 ‘희빈(禧嬪)’ 장씨의 본명은 ‘옥정(玉貞)’으로 ‘옥정’이라는 이름은 인현왕후의 오빠인 민진원이 쓴 『단암만록』에 나온다. 조선시대 여성의 본명은 기록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지만 장희빈은 왕비가 된 전력이 있으므로 이를 기록한 것으로 생각한다.
장희빈은 역관(驛官)인 아버지 장형의 딸로 조선 왕조 궁녀 출신에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으로 ‘조선판 신데렐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옥정의 할아버지 장응인은 역관으로 최고위 관직인 정3품첨지중추부사에 올랐고 외할아버지 윤성립 역시 역관으로 종4품 첨정에 이르렀다. 장옥정을 양반이 아닌 중인으로 보기도 하는데 할아버지가 여하튼 정3품이라면 만만치 않은 관직으로 학자들에 따라 장옥정이 절대로 중인이 아니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더불어 당숙인 장현은 훗날 영조 앞에서 노론이 명역관이라 지칭했을 정도의 거물 역관으로 종1품 숭록대부에 올랐으며 재산은 국중 거부라 꼽힐 정도였다. 장씨의 일족이 조선에서 손꼽히는 대부호였으며 사회적 위치 또한 결코 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당대 역관은 재벌 중 재벌로 이어지는 최단 지름길로, 그들의 성공담은 허균의 『허생전』에서 변 부자 일화로 나올 정도다.
야사에는 장씨가 재입궁하기 전에 궁핍하게 살았으며 이 당시 오빠 장희재가 한량으로 놀기만 했다고 알려지지만 사실 장희재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1680년 내금위, 1683년에는 한성 관할 포도청인 좌포청 종6품 부장을 맡고 있었다. 또 외삼촌 윤정석은 육의전 면포 상인으로 17세기 현대로 치면 대기업의 오너 수준의 사업가다. 한마디로 장씨가 궁궐에 입궁하기 전에도 부족함이 없이 유복하게 지냈다는 것이다.
물론 당대 왕가로 보면 비천한 상민에 불과했으나 당시 신생 신분층이었던 중인(中人)이라 하더라도 독보적 최상급에 속한 가문인데다 재력으로 따지면 사족을 초월했던 가문의 따님이었다. 야사와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장씨의 입궁 시기는 머리를 따 올릴 때부터 궁중에 들어왔다는 것을 볼 때 매우 어릴 때 대궐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궁녀는 모두 천민 출신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비약된 이야기로 장희빈의 가족사를 볼 때 상당한 신분 즉 양녀 궁인들과 함께 입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숙종과의 만남 전설에는 청계천 수표교가 등장한다. 어린 숙종이 종묘 또는 영희전에서 참배를 올리고 환궁하던 길에 수표교에서 스쳤던 미소녀에게 한 눈에 반해 증조모인 장렬왕후에게 간절히 부탁해 강제로 궁녀로 입궁시켰다는 전설이다.
여하튼 장옥정이 숙종이 전가보도처럼 사용한 환국 정치의 핵심을 이루므로 앞에 설명한 것을 보완하여 보다 자세하게 설명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숙종의 첫번째 왕비인 인경왕후 김씨가 사망한 후 비로소 은총을 받았다고 기록하므로 이때는 1680년이다. 다음해인 숙종 7년(1681) 숙종이 인현왕후와 국혼을 올렸고, 경신환국이 발생했다. 그런데 숙종이 장옥정에 마음을 두자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현열대비)가 그녀를 그냥두지 않았다. 장옥정을 남인 세력으로 인식한 명성왕후가 직접 명을 내려 그녀를 사가로 내쫓았다.
반면 왕비가 된 인현왕후는 장옥정을 숙종이 매우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왕의 은총을 받은 궁녀를 오랫동안 민가에 머물게 하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다며 궁으로 불러들이자고 했다. 인현왕후가 대비인 명성왕후에게 장옥정을 불러들이자하자 명성왕후는 단칼에 잘랐다. 중전이 장옥정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장옥정은 매우 간사하고 악독하다고 말했다. 숙종이 장옥정의 꾐을 받아들이면 국가의 화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옥정의 사가 생활은 명성왕후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명성왕후는 장옥정이 사가로 나간 지 3년 만에 죽었다. 그러자 숙종이 1686년 초에 그녀를 불러들인다.
이 일에는 대왕대비인 장렬왕후 조씨와 인현왕후의 역할이 컸다. 장옥정이 궁 밖으로 쫓겨나자 숭선군의 부인 신씨가 그녀를 돌보았는데 숭선군 부인 신씨는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자의대비)의 조카인데다 6촌 동생 조사석의 중개했기 때문이다.
조사석이 장옥정을 후원한 것은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한다. 첫째는 장옥정을 기반으로 정치 권력을 확보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장옥정 어머니와 개인적인 정분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 서인들이 장옥정의 어머니가 조사석과 내연의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한다.
여하튼 장옥정의 정확한 재입궁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실록에 의하면 1686년 7월 이전에 이미 장씨가 재입궁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다. 『숙종실록』에 이 당시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장씨를 숙원(淑媛)으로 삼았다. 나인으로 뽑혀 궁에 들어왔는데 얼굴이 아름다웠다. 어느 날 임금이 희롱하려 하자 장씨가 달아나 내전에 뛰어들었다. ‘제발 나를 살려주십시오.’라고 하였는데 이는 인현왕후의 기색을 살피고자 함이었다.’
장옥정에게 후궁 첩지를 내린 실록의 기사인데 실록의 기록도 장옥정이 매우 미인이라고 적었다. 조선은 외모보다 심성을 중시하는 유교국가로 실록에서 외모 언급을 찾기 힘든데도 대놓고 아름답다고 할 정도라면 장옥정의 아름다움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인현왕후에 의해 궁에 들어왔지만 장옥정과 인현왕후는 서로 화합할 사이가 아니었다. 이는 장옥정이 대궐로 돌아오자 숙종이 장옥정만 찾았기 때문이다. 이에 인현왕후가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때론 장옥정을 불러다 종아리를 치기도 했는데 이도 별 반응이 없자 후궁으로 김창국의 딸인 영빈 김씨를 들였다. 그런데 숙종은 영빈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장옥정만 편애하여 1686년 12월, 내명부 종4품 숙원(淑媛)에 책봉된다.
이것은 매우 이례적으로 장옥정이 아들이나 딸을 낳지도 않았음에도 승급된 것이다. 이는 오로지 숙종의 총애만으로 이루어진 일이라 더욱 구설수에 올랐다. 참고로 효종의 후궁인 안빈 이씨는 숙녕옹주를 낳고 10년 만에야 후궁이 되었다. 삼사와 김창협 등이 나서서 장희빈과 숙종을 공격하자 자신이 미색을 좋아하고 총애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억측이라며 결국 장옥정의 숙원 책봉을 공식화했다.
<경종 탄생>
장옥정의 숙원 책봉은 당대 정치 역학상 뇌관이나 마찬가지다.
만약 장옥정이 왕자라도 낳는다면 모든 권력이 그녀에게 집중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인의 몰락이자 남인의 재기를 의미한다. 그런데 숙종은 서인들의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옥정을 계속 비호했다.
숙종, 인현왕후, 장옥정의 삼각관계는 장옥정이 1688년 10월 왕자 즉 숙종의 첫 아들이자 뒤를 잇는 경종을 출산했다. 당시 숙종은 28살로 내심 후사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장옥정이 숙종의 가장 큰 근심꺼리를 해소시켜준 것이다. 경종의 출산은 예상한대로 정치계에서 소용돌이를 불러일으킨다. 한마디로 장희빈이 낳은 왕자를 두고 찬성과 반대파가 극렬히 나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드라마에서 빠지지 않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른바 장옥정의 어머니가 8인이 메는 옥교(屋轎) 즉 가마를 타고 궐중에 왕래했다는 소위 옥교사건이다. 한마디로 장옥정의 어머니는 한 천인일 뿐인데, 감히 옥교를 타고 대궐에 드나드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지적이다. 장옥정의 친정 어머니가 딸의 산후조리를 해주기 위해서 궁궐로 들어올 때, 8명이 끄는 옥교를 타고 왔다는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매우 껄끄러운데 장옥정이 왕자를 낳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사헌부 관리가 가마를 압수하고 가마를 끌고 들어온 종을 처벌한 것이다. 옥교는 덮개가 있는 가마를 말하는데 3품 이상 관리의 어머니나 부인이 타라고 법전에 나와 있으므로 장옥정의 어머니가 이에 해당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는 장옥정을 고깝게 보고 있는 서인들이 무언가 꼬투리를 잡으려했는데 이를 옥교로 사건화한 것이다. 문제는 당시에 궁인뿐만 아니라 무당 또한 가마를 타고 입궁했다는 점이다. 옥교 사건을 듣고 숙종이 노발대발하면서 말했다.
‘후궁이 해산할 때 가족이 들어와서 살펴보도록 하는 건 옛날부터 있어온 전례이고, 천인인 궁녀들도 가마를 타고 다닌다. 더구나 왕이 허락의 의미로 출입패를 주었는데 이런 일을 벌였다.’
숙종은 옥교 사건의 관련자들을 파직하고 심지어는 처형까지 했는데 이 문제로 홍문관, 사간원까지 나서서 줄줄이 상소했다. 숙종도 처형까지는 너무했다고 생각하여 물러서더니 죽은 사헌부 관리들의 장례까지 후하게 치러주었다.
이 사건은 당시 집권층인 서인들이 장희빈을 어떻게 보는가를 알려주는 가늠자인데 숙종은 이를 자신의 정치판으로 끌고 갈 수 있는 기회로 생각했다. 숙종은 장희빈의 어머니 즉 자신의 장모를 겁박한 옥교사건은 서인들이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숨을 고르기 위해 우선 서인들과 일단 잠시 타협한 것이다.
'유네스코(한국유산) > 조선왕릉 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왕릉 답사 (25) : 제2구역 서오릉(4) (0) | 2021.06.28 |
---|---|
조선 왕릉 답사 (24) : 제2구역 서오릉(3) (0) | 2021.06.28 |
조선 왕릉 답사 (22) : 제2구역 서오릉(1) (0) | 2021.06.28 |
조선 왕릉 답사 (21) : 북한 왕릉 (0) | 2021.06.28 |
조선 왕릉 답사 (20) : 제1구역 광릉(2) (0) | 2021.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