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답사의 마지막 행선지는 사적 제206호인 융건릉(隆健陵)이다.
조선 제22대 정조의 아버지 장조(사도세자)와 현경왕후를 모신 융릉, 정조와 효의왕후를 모신 건릉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건릉은 열 살 때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아들의 무덤이고, 융릉은 아버지로부터 죽임을 당한 아들의 무덤이다.
세상에는 비극의 주인공도 많고 그 사연도 제각각이다. 왕조의 비극과 권력의 비정함을 상징하는 마의태자와 단종이 역사에 자주 나오는 비극의 주인공들이지만 사도세자의 비극은 그 누구보다도 애절하다. 28세의 꿈같은 나이에 왕세자임에도 불구하고 뒤주에 갇혀 당쟁의 제물이 되었으니 말이다.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기까지의 정황은 다소 복잡하다. 사도세자의 아버지인 영조는 노론 세력의 지지를 받으며 왕으로 등극했으므로 이들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문제는 사도세자가 어린나이부터 이런 정황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영조의 선왕인 경종은 후사가 없는데다 신병이 많아 후계자가 혼미에 빠져 있었다. 이때 노론의 4인방으로 불리는 김창집⋅이건명⋅이이명⋅조태채 등의 주장에 따라 영조는 세자로 책봉된다. 그러자 소론측에서는 시기상조론을 들고 일어나 노론의 4대신을 4흉(四兇)으로 몰아 처형했다. 이것이 잘 알려진 신임사화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 겨우 헤어나 결국 영조가 왕위에 오르는데 그는 자신을 왕으로 만들었던 노론의 의리를 정당화하고 소론을 쫓아냈다. 이것이 신임의리다. 영조가 비록 정치적 평정을 이루려고 탕평책을 쓰기도 했으나 영조로 보아서는 여하튼 노론의 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당대의 정황을 예의주시한 사도세자는 영조의 정치가 옳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런 불손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도세자는 노론 세력이 보기에 눈엣가시였다. 그런데 세자가 영조를 대신하여 정무에 임하자 노론에 불똥이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노론 측에서는 줄기차게 사도세자의 험을 들추면서 이간질하는데 이들 배경에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숙위 문씨 등이 있었다. 이들은 세자를 제거하는 일이 간단치 않자, 세자가 함부로 궁녀를 죽이며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문란한 행동을 일삼는다고 무고하기에 이르렀다. 자연 영조의 꾸지람이 잦았고 부자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데 이들 불화가 중첩되자 세자가 급기야 정신질환을 앓게 된다. 결국 사도세자는 영조 명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는다.
정조는 즉위 이후 당쟁을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펼치며 신진세력을 등용하는 한편 화성 건축을 통해 왕권의 강력함을 보여주려 했다. 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즉위 초부터 사도세자의 복권에 공을 들였다. 사도세자의 능은 원래 경기도 양주군 남쪽 배봉산에 있었는데 정조가 즉위하면서 아버지의 존호를 장헌으로 올리고 1789년 이곳으로 묘를 옮긴 후 능호를 융릉으로 바꾸었다. 고종 때 의황제로 추존함과 동시에 어머니도 의황후로 올렸다. 반면에 언덕을 사이에 두고 있는 건릉은 정조와 그의 부인인 효의왕후가 합장된 무덤으로 융릉과 건릉을 잇는 길은 수도권에서 손꼽히는 산책로로 많은 사람들이 연중 찾는 곳이다.
① 융릉
조선 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정조의 부친 장헌세자 장조(1735〜1762)와 현경왕후(1735〜1815,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다.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던 사도세자는 이복형인 효장세자(추존 진종)가 요절하고 영조가 41이 넘은 나이에 태어난 두 번째 왕자다. 41세라면 현재로도 적지 않은 나이이므로 후사가 없어 애태우던 영조는 ‘삼종(三宗. 효종ㆍ현종ㆍ숙종)'의 혈맥이 끊어지려고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돌아가서 여러 성조(聖祖)를 뵐 면목이 서게 되었다며 자신의 기쁨을 즉각적으로 반영했다.
“지금 즐겁고 기쁜 마음을 어찌 말하랴? 내전에서 아들로 취하고 원자의 호를 정하는 일을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겠는가? 즉각 이를 거행해 종묘와 사직에 고하도록 하라.”
영조는 즉시 왕자를 중전의 양자로 들이고 원자로 삼았으며, 2세 때 왕세자로 책봉했다. 원자 정호(定號)와 세자 책봉 모두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빠른 기록이었다. 기록으로만 보면 영조는 아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왕위를 물려줄 것을 결심한 것이다.
왕세자에 책봉된 사도세자는 영조의 기대에 부응하여 3살 때 『효경(孝經)』, 7세 때 『동몽선습(童蒙先習)』등을 익혔고 글을 쓸 줄 알았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다. 이때 세자가 썼던 글이 ‘천지왕춘(天地王春)’이다. 이에 놀란 여러 신하들이 앞 다투어 세자의 글을 하사하여 줄 것을 청하니 영조는 기뻐하며 ‘네가 주고 싶은 사람을 가리키라’하며 세자의 재간을 대견스럽게 생각했다. 세자는 글쓰기를 좋아했으며 10세 때 이미 정치에 대한 안목이 생겨 집권세력인 노론들이 처결한 바 있는 신임사화를 비판하기도 했다. 누구보다도 똑똑한 세자의 행보가 순탄치만은 않을 것임을 알려준다.
여하튼 그는 당시 세마(洗馬. 정9품)였던 홍봉한(洪鳳漢)의 동갑내기 딸과 혼인했는데 그녀가 바로 유명한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다. 홍봉한이 당시에 급제하지 못하고 세마라는 말직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을 볼 때 홍봉한은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어서야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홍봉한은 딸의 간택을 계기로 도승지, 어영대장ㆍ예조ㆍ이조판서ㆍ좌참찬을 거쳐 우의정ㆍ영의정까지 오르면서 영조 중ㆍ후반 노론의 대표적 대신으로 활동했는데 결론적으로 홍봉한의 승세는 사도세자의 몰락과 관련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도세자는 조선왕조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의 핵심이므로 보다 설명한다.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축복을 받고 태어난 사도세자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조선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의 주인공이다. 차기의 국왕을 예약한 세자의 지위에 있었지만, 친아버지의 명령으로 27세 때 죽음을 맞이한 것인데 그의 죽음도 뒤주에서 갇혀 죽는 등 엽기적인 방식으로 집행되어 그 비극을 더욱 끔찍하게 만들었다.
우선 사도세자를 보자. 세자는 영특하면서도 기본적으로 무인적 기질이 매우 강한 기질을 갖고 있었다. 세자는 어릴 때부터 반드시 군사놀이를 하면서 놀았으며 병서도 즐겨 읽어 속임수와 정공법을 적절히 변화시키는 오묘한 이치를 터득했다고 한다. 신체적 조건과 무예도 뛰어났다. 세자는 힘 좋은 무사들도 움직이기 어려울 만큼 무거운 청룡도와 쇠몽둥이를 15∼16세 때 자유롭게 사용할 정도로 기운이 대단했다. 무예도 뛰어나 활을 잘 쏘았고 말도 잘 몰았다. 무예에 대한 세자의 열정은 저술로 이어졌다. 세자는 24세 때인 영조 35년(1759)에 장수와 신하들이 무예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걱정해 『무기신식(武技新式)』이라는 책을 엮었을 정도다. 이 책은 훈련도감에서 교재로 사용되었으며, 그 뒤 정조 때 간행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원본이 되기도 했다. 『한중록』에 따르면 세자는 늘 군복을 입고 다녔다고 적었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영조 25년(1749) 15세 때 영조를 대신해 국사를 대리청정하면서 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영조의 처신이다. 그는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도 글 읽는 것보다 무예를 중요시하는데 불만이 있었다. 조선왕조에서 대리청정은 기회이자 위기였다. 국왕을 대신해 정무를 잘 처리할 경우는 능력을 인정받고 입지를 다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신뢰를 잃고 실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대리청정은 훈련을 목적으로 한 우호적 기회임이 틀림없다. 영조도 정무와 거리가 있는 세자의 기질을 사전의 훈련으로 조정하려는 의도로 대리청정을 도입했다고 평가된다.
영조는 아들의 정무적 능력과 무술에 대한 애착에 더욱 불만을 갖게 되었다고 하지만 영조도 사실 상당히 문제 있는 사람이다. 그는 아들을 세자로 명한 후에 이를 양위(讓位) 파동으로 적절히 이용했다. 왕이 실제로 그럴 의사가 전혀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세자와 신하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양위를 만류해야 했고, 국왕은 의사를 관철하겠다고 고집한다. 이런 실랑이를 몇 차례씩 거친 뒤에야 어명은 마지못해 거둬진다. 그 과정에서 충성은 검증되고 불충은 적발되며, 왕권은 공고해지고 이런저런 정치적 전환이 이뤄진다. 그런데 그 시기가 매우 부적절함을 알 수 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이 시작하기 전까지 무려 5회나 양위 의사를 밝혔다. 재위 15년(1739), 16년, 20년, 21년, 그리고 25년이었다. 그때 세자의 나이는 각 4, 5, 9, 10, 14세였다. 4살과 5살의 세자에게 전권을 물려주겠다는 말은 보통 사람도 하지 않을 쇼인데 바로 왕이 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어린 세자는 양위 파동 때마다 긴장하고 두려워하면서 철회를 애원했다. 대리청정이 시작된 뒤에도 세 번의 양위 파동이 나타났다. 이 사건들은 그 기간에 누적된 영조와 세자의 갈등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한마디로 영조가 사도세자를 갖고 놀았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런 양위파동에도 불구하고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혀가자 노론과 이에 동조하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영조의 후궁 숙의 문씨 등이 무고하기 시작한다. 이에 영조가 사도세자를 질책하자 그는 화병과 정신병을 얻었는데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사도세자의 천품과 자질이 탁월해 왕도 처음에 매우 사랑했다는 데는 동조한다. 그런데 10여 세 뒤부터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청정한 뒤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天性)을 잃었다고 설명된다. 무언가가 중간에 개제했다는 설명인데 사도세자 죽음에 적극 동조한 장인인 홍봉한은 훗날 ‘무엇이라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병도 아닌 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했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그런데 숙의 문씨가 임신을 하자 세론이 분분해지고 세자는 비로소 자신의 위치가 견고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깨달았다. 이때 영의정인 소론의 이종성이 적극적으로 세자의 보호에 나섰다. 이종성은 영조에게 세자를 심하게 질책하지 말아 달라고 간했다. 이 때문에 세자는 당연히 소론에 마음을 보냈다.
그러자 노론은 위기감을 느끼고 세자를 더욱 세차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1761년 정순왕후의 생부인 김한구와 홍계희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10조목으로 열거하여 무고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무고 사건이란 ‘동궁이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자신을 따르는 관료들과 20여일이나 무단으로 관서지역을 유람했다’는 내용이 적힌 ‘허물십조’를 상소한 것을 가리킨다.
나경언의 고변이 있은지 한 달 후 영조는 세자의 친모인 영빈으로부터 또 한 번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 다음과 같이 영빈이 영조에게 말했다고 한다.
'세자의 병이 깊어 바라는 것이 없사오나 소인이 차마 이 말씀을 못하올 일이로되, 왕을 보호하고 세손을 건져 종사를 안히 하는 것이 옳사오니 대처분을 내리소소.‘
이 말을 들은 영조는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인가”라고 한탄하며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한 후 자결할 것을 명했다. 나름대로 명분도 만들었다.
“네가 자결하면 종묘사직을 보존할 수 있으니 어서 자결하라.”
영조가 칼을 들고 자결을 재촉하자 사도세자가 부모 앞에서 자결하는 것이 효에 어긋난다고 항변하자 영조는 당시 11세였던 정조가 지켜보는 가운데 뒤주 속에 가두어 8일 만에 죽게 했다. 그런 후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민다. 세자를 생각하며 추도한다는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나라의 앞날을 위해 그것이 부득이한 조치였음을 내외에 알렸다. 흔히들 말하는 ‘사도세자’라는 호칭은 이때 생겨났고 이후 사도세자는 비운의 대명사처럼 불려진다.
#홍봉한(洪鳳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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