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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답사 (86) : 제4구역 융건릉(2)

Que sais 2021. 6. 29. 10:48

https://youtu.be/q38ZM_kyuxY

<기록에 없는 뒤주>

사도세자 비극에서 가장 잘 알려진 뒤주 영조실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영조실록 38(1762)  5 13일의 기록에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다(自內嚴囚)라는 말이 나온다. ‘안에다 가둔다는 기록을 국사편찬위원회김범 편사연구사뒤주와 같은 협소한 공간에서 9일 동안 살아있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함규진의 논거를 들어 뒤주 사망설부정하는 견해도 있다고 적었다.

 

뒤주(화성 행궁)

그러면서도 뒤주라는 표현이 혜경궁홍씨 한중록에 나오며 정조실록에는 한 물건(一物)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뒤주사망에 중요한 도구가 된 것은 사실로 생각된다고 첨언했다. 실제로 복원된 화성행궁에는 일반인들을 상대로 뒤주 체험이 있을 정도로 뒤주는 한국민의 뇌리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가 있으므로 이곳에서 더 이상 설명하지 않지만 사도세자죽게 된 원인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입장대립된다. 우선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의 기록처럼 아버지 영조로부터 정신적 압박감왕실내의 미묘한 인간관계로 인해 상황이 꼬이면서 사도세자정신질환을 가지게 됐고 살인 등 여러 기행을 일삼다가 일부 신하와 특히 그 생모 영빈이씨의 건의에 따라 불가피하게 부왕(父王)의 단죄를 받았다는 의견이다.

두 번째 견해사도세자영조시대의 정치개혁하려는 뜻을 품었던 비범한 자질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척족(戚族)과 일부 노론의 사주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기에 이르렀다는 주장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혜경궁홍씨는 남편인 사도세자를 지지한 것이 아니라 친정에 손을 들어주었다. 이는 사도세자가 집권할 경우 자신의 친정큰 화를 불러올 것으로 보아 남편인 사도세자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조실록 영조38(1762) 528일자에 세자의 장인 홍봉한 전하께서 결단하지 못할까 염려했는데, 결국 혈기가 왕성할 때와 다름없이 결단하셨으니 흠앙해 마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록의 편찬자홍봉한의 행위를 다음과 같이 공격하면서 그야말로 혹평했다.

 

13일의 일은 바로 성상께서 종사(宗社)를 위한 부득이한 일이었으나, 홍봉한사부(師傅)인 몸인데도 정성을 다하여 보도(輔導)하여 신하의 절조(節操)를 다하지 못하였으니, 처분한 후에 마땅히 사과하고 죄를 이끌어 오직 빨리 죽기를 원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했다. 그런데 연석에서 면대하는 즈음에 감히 외간 사람이 결판 짓지 못할까 염려했습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전석(前席)에서 할 말인가? 무엄함이 심하다.’

 

홍봉한사위 제거에 반대하지 않고 심지어는 영조의 결단칭찬한 것은 당사자가 사위인 사도세자에 매우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여하튼 어느 쪽의 주장이 진실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사도세자뒤주와 같은 폐쇄된 공간에서 죽은 것은 사실이다.

혜경궁홍씨가 남편보다는 친아버지 홍봉한의 편에 선 것도 이색적인데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이유는 노론을 극히 싫어하는 사도세자가 왕위에 오른 후 자신에 대해 극히 반대했던 장인홍씨제거했을 때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중종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의 왕비 단경왕후의 경우 아버지가 반정에 손을 들지 않았기 때문에 살해되고 단경왕후 자신도 페출된 예를 보아도 그렇다. 또 한 가지는 아들정조위해 남편인 사도세자포기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인 영조의 눈에 벗어난 사도세자를 옹호하기보다는 정조를 위해 시간을 버는 것이 유리했다는 뜻인데 연유는 어떠하든 혜경궁홍씨정조가 왕이 되는 것을 보았고 또 극진히 우대받았다.

여하튼 어미가 자식을 고변하고 아비는 죽이고 장인은 수수방관했고 아내도 남편이 아닌 자신의 본가 편을 들었다. 학자들은 이 사건은 단순히 사도세자개인의 실정에서 비롯한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여러 모로 정치적인 의도가 진하다는데 심증을 굳힌다.

당시 노론과 소론의 갈등, 노론 내부의 외척 세력과 비외척 세력 간주도권 다툼, 영조 주변 여인들의 끊임없는 무고로 인한 영조와 세자와의 갈등 등이 쌓여 세자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물론 이런 조정 내부의 역학관계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경솔한 행동을 한 세자 자신에게도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조선사를 통해 영조아들의 죽음을 초래한 것은 상궤를 넘는 일이라고 혹평한다.

여하튼 홍씨에게도 우여곡절은 있었다. 남편이 서인으로 강등당하고 사망하자 혜빈(惠嬪)이 된 홍씨는 세손인 정조와 함께 사가로 나와 사는데 예상치 못하는 일이 일어난다. 영조가 손자인 정조 10에 죽은 영조의 첫아들 효장세자의 승통을 잇게 한 것이다. 죽은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은 것으로 졸지에 아들마저 빼앗긴 셈이다. 종통사도세자에게서 세손에게로 넘어오면서 종통의 계승을 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로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추후에 정조왕이 되었음에도 자신의 친부모를 추존하지 못하고 양부모인 효장세자와 현빈추존하여 왕과 왕후에 봉한다.

 

물론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자신의 친모인 홍씨혜경궁(惠慶宮)으로 올리고 을묘원행의 주인공으로 극진히 모신다. 혜경궁홍씨순조 15(1815) 81의 일기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치고 남편과 함께 융릉에 묻혔다. 또한 고종 때 사도세자장조추존됨에 따라 현경왕후에서 의왕후가 되었다. 한편 혜경궁 홍씨궁중문학의 효시로 알려진 사도세자의 죽음소설체로 쓴 한중록』을 남긴 것으로 더욱 유명하다.

융릉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라는 천하의 명당터. 고산 윤선도효종의 능침으로 지목하는 등 수 백 년 간 이 자리는 풍수가들의 주목을 받아 온 곳이다. 이곳에 올라보면 풍수지리에 문외한이라도 천하의 명당임을 실감하게 된다. 뒤로는 광교산, 팔달산, 화산이 둘러치고 앞으로는 겹겹이 둘러싼 연봉(連峰)들이 좌청룡, 우백호, 안산(案山), 조산(朝山)을 이루고 있다.

정조융릉 조성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당대 최고의 조각가였던 정우태를 초빙해 국왕의 위격에 걸맞은 치장을 명했다. 또한 사도세자의 격으로 볼 때 왕릉이 아니라 ()이지만 병풍석을 두르고 문무석인을 모두 배치하여 왕릉에 버금가는 모습으로 조성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석수의 수량반으로 줄였다.

융릉의 병풍석 1731년 장릉 천릉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다만 병풍석 주변에는 난간석을 별도로 두르지 않았고 문석인 옆에 석마를 따로 두지 않고 무석인 옆에만 두었는데 이는 석수의 수량절반으로 통일하기 위한 조처로 추정한다. 난간석이 없기 때문방위표시병풍석 상단 연꽃봉우리 모양의 인석에 새겨 넣었다. 보통 왕릉의 인석이 장대석의 네모난 형식으로 제작되는데 반해 융릉 인석연꽃 봉오리 모양을 하고 있는 최초의 사례. 융릉의 인석순종 유릉에 이르기까지 후대에 조성된 왕릉 석물 제작의 기준이 되었다. 특히 꽃봉오리 모양의 인석에 조각된 연꽃조선시대 최고의 연꽃 조각으로 평가된다.

 

특히 장명등조선조 석물 중 걸작으로 평가된다. 18세기 유행한 사각장명등 양식에서 벗어나 조선 중후기 팔각 장명등의 전통부활시켜 섬세한 공포의 표현과 연꽃 봉오리 형상정자석혼합하여 새로운 양식을 창출하였다. 이후 조성되는 정조 건릉과 철종 예릉에서도 이와 같은 장명등이 설치된다. 특히 문인석은 언제나 사도세자 곁에 있고자 했던 정조의 마음을 담아 조성한 분신인 듯 매우 사실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문석인의 도상금관조복을 갖추었는데 기존 왕릉에는 없던 도상이다. 융릉 1899년 왕릉으로 존숭되었으므로 현재 융릉의 석인은 왕릉의 격식이 아닌 원의 격식으로 만든 것이다. 학자들은 조선시대 문인석 조각의 백미라고 평가하는데 문석인의 규모는 좌우 너비 818mm, 앞뒤 길이 643mm, 높이 2,177mm(동측)으로 영조 원릉보다 커지고 웅장해졌다. 장대한 규모임에도 신체와 얼굴의 비례가 약 4.1:1로 인체에 근접한 안정한 비례다.

신체의 단면장방형이지만 둥근 어깨와 신체를 타고 흐르는 윤곽석이 매끄럽다. 안면은 살아있는 것처럼 미소를 짓고 있으며 얼굴형은 둘글고 갸름하고 눈꼬리는 치켜올라갔고 눈동자는 동공까지 또렷하게 양각하여 생기가 넘친다. 융릉의 문인석을 학자들이 찬탄하는 것은 조각이지만 회화와 같은 표현을 했다는 점이다. 특히 금관 머리둘레의 쌍봉문과 뒷면의 연화당초문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여하튼 1789 당시 원으로 제작된 곳에는 무석인과 병풍석을 두지 않는 것이 관례이지만 정조의 특명으로 현릉원에는 무석인을 설치했다. 이는 조선후기 원의 격식으로 조성한 유일한 무석인의 사례.

융릉의 무석인희귀성의 관점에서보다 큰 가치가 있다. 무석인은 갑주에 검을 쥔 도상으로 조선 전기 왕릉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세부적인 면을 볼 때 조선 왕릉 중 가장 독특하고 새로운 도상을 적용하여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투구 상단의 삼지창과 상모장식은 실제 투구와 닮았고 뒤로 돌려 묶은 옆드림과 전포의 소매자락은 사실적이고 갑옷의 정교한 소슬금문, 어린문, 서수문은 호화로운 왕실 문양을 반영한다.

무석인은 좌우너비 876mm, 앞뒤길이 703mm, 높이 2,318mm(동쪽)의 규모로 문석인보다 크고 당당하다. 얼굴은 방형으로 넉넉한 양감을 지니며 눈은 부릅뜨고 어깨는 떡 벌어져 무인의 강인함을 구현하였다. 17세기까지 무석인은 큰 눈을 돌출시키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두 눈을 치켜뜬 위협적인 호법신 같은 모습이었는데 18세기 정성왕후 홍릉, 인원왕후 명릉, 원릉, 융릉에 이르러 미소를 띤 무석인으로 변화되었다. 특이한 표현은 뒷면의 포두 문양이다. 포두 중앙서수문을 크게 배치하고 주변에 구름, 파도, 바위, 영지, 서각 등의 보문을 새겼다. 이런 문양은 조선 후기 왕실의 길상상징하는 것으로 궁중공예, 궁중 회화, 궁권건축, 궁중 복식 등에 활용되는 도안과 동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