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조선왕릉 답사

조선 왕릉 답사 (87) : 제4구역 융건릉(3)

Que sais 2021. 6. 29. 10:49

https://youtu.be/mqxDLasJ5AE

왕릉의 일반적인 진입 공간연지, 재실, 금천교, 홍살문으로 이어지는데 융릉의 연지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연지의 형태방지원도임에 반하여 융릉원형으로 조성되었다. 원형의 호안곡선 장대석으로 원형석축을 쌓아 놓았으며 연지의 지름은 약 186미터다.

융릉의 정자각은 정전 3, 배위청 2칸으로 하는 5칸 정자각이며 정자각 상부가구 구조 5량가, 배위청은 3량가다. 지붕은 정전과 배위청 모두 맞배겹처마박공면에는 풍판을 설치했다. 포작은 정전이 출목 2익공, 배위청이 출목이 없는 2익공이다. 지붕 용마루는 적새를 쌓고 전후면에 회를 발라 마감하는 양상도회했으며 죄우에 취두설치했다. 정전과 배위청의 전후 내림마루에는 용두와 잡상 4개씩을 설치했다. 정전 내외부와 배위청에는 모두 단청을 하고 정전의 좌우면과 뒤쪽의 벽은 중방까지 벽돌을 쌓아 화방벽으로 마감했다.

융릉에는 예감과 산식석 모두 있다. 예감은 의례를 끝낸 제물의 일부를 묻고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일반적으로 정자각의 서측 뒤편에 자리한다. 장대석을 다듬어 방형으로 만든 융릉 예감 크기 1,138 x 1,262mm. 산릉을 지키는 산신에게 예를 올리는 상석인 산신석은 예감과 대칭되는 위치에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융릉의 산신석의 크기 1,325 x 812mm로 장방형이며 안쪽 모서리는 경사지게 갈아서 마감했다.

융릉특이하게도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상에 있지 않다. 원래 조선 왕릉은 능침이 참배자나 관람객에게 보이지 않도록 능침과 정자각, 홍살문일직선배치하는 것이 기본이다. 정자각능침의 가리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융릉정자각이 능침 안산 방향에서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 진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자각이 옆으로 비켜서 있으므로 수복방능침 앞을 가로막았다. 조선 왕릉의 수라간과 수복방이 정자각 앞 신로와 어로를 중심으로 마주하는 원칙을 무시하고 일직선으로 나란히 배치된 형태가 된 것이다.

융릉에는 2기의 표석이 있다. 하나 1776 사도세자의 수은묘영우원으로 개창하고 1789 영우원현륭원으로 개칭 지금의 자리로 현륭원을 천원한 후 세운 표석이고 다른 하나 1900 고종현륭원융릉으로 봉릉한 후 세운 표석이다. 현재 비각에 두 기의 표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수원화성 능행도(배다리 좌측)

한편 정조자신의 초상화현륭원 재실에 걸어 곁에서 사도세자를 봉양하는 의미를 두기도 했다. 그만큼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사후에도 효도를 다하겠다는 정조의 효심을 엿볼 수 있다. 정조정조 13(1789)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 현륭원(顯隆園)으로 격상시킨 후 수원의 융릉으로 천묘하고 수원 화성(華城) 건설을 자주 확인하기 위해 배다리수원으로 향했다. 정조봄가을온양온천과 선릉(宣陵)정릉(靖陵)장릉(章陵)에 갈 때는 노량진, 헌릉(獻陵)영릉(英陵)영릉(寧陵)에 갈 때는 광나루배다리를 놓았다.

배다리에 대한 각종 사항을 기록한 것이 주교지남(舟橋指南)이다.

정조 1790(정조 14) 2월부터 1800(정조 24)까지 11년간 모두 12차례에 걸쳐 현륭원참배하는 능행을 거행하였는데, 매년 수원까지 능행하기 위해서는 한강을 건너야 했기에 배다리를 설치했다. 배다리의 설계정약용이 맡았다.

당시 정약용 1789 3 정조 앞에서 치른 식년시급제 초계문신의 칭호를 얻었는데, 바로 그해 과거와는 달리 매우 과학적이면서도 효율적인 배다리를 설계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주변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주교지남에는 배다리를 놓을 지형 선택에서부터 배의 선택, 사용되는 배의 수효 및 배의 높이, 배를 연결하는 법, 난간의 설치 등 배다리에 관한 모든 세부 사항이 상세히 적혀 있다. 배다리를 설치하는 데 필요한 제반 조건과 시설 15개 항목으로 세분해 기재했고, 배다리를 설치할 때 훈련도감의 배 조운선사선(私船)이 동원됨으로써 발생하는 폐단운영상의 문제점과 해결 방안까지 기록하였다.

 

2007년 배다리 재현

과거에는 배다리를 설치할 때마다 큰 배를 물가에 집채처럼 몰아 선창을 세워서 공역과 비용이 많이 소요되었음에도 배다리 철거 시 이를 함께 헐어 버렸다. 그러나 정약용강가의 잡석들을 모아 물고기 비늘처럼 연달아 축대를 높이 쌓은 다음 석회로 틈을 메워 영구히 사용할 수 있는 선창을 만들었다. 또한 배다리를 건설할 때 필요한 선박수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노들나루 양쪽의 거리를 정확히 재었다. 그 결과 약 336m 정도로 한강을 직선으로 잇는 데 필요한 큰 배 36 강심(江心)에 배치하고, 그 외 나머지 작은 배들을 배다리의 왼쪽과 오른쪽에 나누어 세워서 배다리를 끈으로 잡아매거나 호위하는 구실에 사용되도록 했는데 오늘날 사장교의 원리와 비슷하다. 특히 동원된 민간 선박에는 못을 박지 않도록 하는 등 세심한 연결 방법을 구사하였다. 특히 바닷물이 드나드는 한강 일대의 지리 조건을 정확하게 습득하고 조수간만에도 안정성확보할 수 있는 선창조교 형식으로 해결한 것은 현대인들이 보아도 놀라운 일이다. 연산군  배다리 건설 800척의 배가 소요된 것에 비하면 매우 경제적인 방법이었다.

융릉의 원찰용주사. 용주사정조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명목으로 건설하면서 불설부모은중경판(佛說父母恩重經板)을 인출 보급하여 백성들에게 효행을 장려하는 장소로 삼았다. 원래 신라 문성왕 16(854)에 세운 갈양사(葛陽寺)가 있었다. 양사고려 광종 21(970)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수륙제개설하는 등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호란 등으로 소실된 채 공터로 남아 있었는데 정조 1790년 융릉의 원찰로 건설한 것으로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고 용주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용주사불교정치적·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던 당시에 국가적 관심을 기울여 세웠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조선전기에는 고려의 전통을 이어, 왕이나 왕실의 무덤을 수호하고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이 세워지기는 하였으나, 조선후기에 와서 사림세력이 부각되고 성리학이 성행하면서 용주사를 마지막으로 조선왕조에서의 왕실의 원찰더 이상 세워지지 않았다.

용주사는 창건이후 지금까지 가람의 구조가 크게 변모되지 않아 조선시대 사찰 가람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예인데 우선 여느 사찰과는 달리 궁궐 형식으로 사찰을 지었으므로 보통의 사찰과 다른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사찰의 일반적 구조는 일주문이 있고 대웅전 앞으로 석탑이 놓여 있는 구조인데 반하여 사찰 입구천왕문이 아닌 삼문각이 만들어져 있고 그 옆으로 행랑과 유사한 건물이 지어져 있다. 대웅보전이 있는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문루인 천보루(지방문화재 제36) 또한 여느 사찰의 누각과는 매우 다른 느낌을 준다. 특히 커다란 6개의 높은 초석은 사찰에선 드문 형식으로 궁궐 양식과 유사하며 대웅전 앞마당에는 왕궁과 같이 이 다니는 길을 박석을 깔아 놓은 것이 이색적이며 큰 틀에서 사찰이라기보다는 왕실의 여러 행사를 치르기 편리하도록 배치한 구조. 또한 대웅전과 지장전 등 규모 있게 배치된 각 건물과 정교한 내부 치장, 최고의 정성이 기울어진 불상과 불화들은 사찰 예술의 전형으로도 평가된다.

용주사에는 문화재가 많이 있다. 우선 국보 제120인 우리나라 범종양식을 충실히 따르는 고려시대 초기 범종(梵鐘)이 있다. 종 윗면에는 신라 종 양식에서 보이는 음통과 종뉴를 갖추고 있는데 음통이 유난히 크고 용허리로 힘겹게 종몸을 끌어올리고 있다. 종신에는 위아래로 문양대를 갖추고 반원과 당초문이 있다.

 

금동향로와 청동향로지방문화재 제11호와 제12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웅전의 편액정조의 친필이며 용주사 청건문과 상량문정조가 쓴 것이다. 또한 정조용주사를 창건할 때 효심에서 발원하여 제작한 지방문화재 제17 불설부모은중경판(佛說父母恩重經板)이 있다. 이것은 정조가 당대의 화원 김홍도를 이곳에 머물게 한 후 그린 것을 판각한 것이다.

특히 대웅보전에는 김홍도가 총 주관하여 마치 초상화를 그리듯 사실적으로 그린 입체적인 인물 표현명암법을 이용한 우리나라 최초의 음영법(陰影法)을 도입한 그림으로 알려지는 후불탱화(지방문화재 제16)가 있다. 이러한 기법은 19세기 후반 경기도 지역을 중심으로 널리 성행하였던 양식적 특징인데 김홍도는 이 그림을 그린 후 현풍현감을 제수 받았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근래의 연구에 의해 그동안 1790김홍도제작하였다고 알려져 왔으나 그림의 양식적 특징을 볼 때 1910용주사대대적으로 중창되었을 당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참고적으로 용주사의 대웅보전 앞에는 1979천연기념물 제264로 지정된 수령 300의 나무높이 4.6m, 가슴높이 줄기둘레 53cm, 가지퍼짐 33.6m의 노거수인 회양나무가 유명세를 치루고 있었다. 그러나 노회와 훼손으로 생명력을 잃어 2002년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되었다. 제주도 천지연폭포무태장어(천연기념물 제258)천연기념물 지정에서 해제되었는데 이는 당초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때 기준이 된 희귀성이나 생명력을 잃었을 때에 적용된다. 융릉이 조성된 후 순조, 철종, 고종, 순종후계 왕들의 친행이 이어졌으며 1908 순종융릉친행한 모습사진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