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조선왕릉 답사

조선 왕릉 답사 (88) : 제4구역 융건릉(4)

Que sais 2021. 7. 20. 10:30

https://youtu.be/v6_n_pWSj1c

 건릉

건릉조선 22대 정조(17521800)효의왕후(17531821) 김씨 합장릉이다.

정조융릉에 있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둘째 아들 8 때인 영조 35(1759) 왕세손 책봉되었는데 정조는 출생과 관련해 남다른 이적이 많은 왕으로 기록된다. 아버지 사도세자정조가 태어나기 얼마 전 신룡(神龍)여의주를 물고 침실로 들어오는 꿈을 꿨다. 태어나기 하루 전에는 큰비가 내리고 뇌성이 일면서 구름이 잔뜩 끼더니 몇 십 마리의 용하늘로 올라갔는데 이 모습을 도성 사람들이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는 기록도 있다. 실제 정조사도세자꿈 내용그린 그림 동궁(창덕궁) 벽에 걸어놓은 뒤 태어났다.

아버지인 사도세자비극의 죽음을 당했지만 정조는 초창기 불안했던 입지가 강화되어 영조의 후사(後嗣)가 되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든 만사가 형통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영조 51(1775) 노병이 깊어진 영조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하자 좌의정 홍인한(洪麟漢)이 이를 방해하여 조정이 한때 크게 긴장하기도 했다. 홍인한세손의 외척으로 정조에 힘을 모아줄 수 있을 위치였으나, 세손인 정조가 그를 탐포하고 무지하다고 멀리하자, 이에 원한을 품고 세손의 적당이 된 것이다. 심지어 세손이 대청(代聽)의 명을 받게 되었을 때는 이를 극력 반대하면서 대청을 명하는 왕의 하교를 받아쓰려는 승지몸으로 가로막기까지 했다.

 

1776 영조의 사망으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곧바로 어머니 혜빈(惠嬪)혜경궁, 효장세자진종(眞宗), 효장묘영릉(永陵)으로 격을 높이고 생부의 존호장헌세자, 묘소수은묘(垂恩墓)에서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했다. 자신의 왕통에 관한 정리를 마친 후 홍인한정후겸홍상간윤양로 등을 제거하고 그 무리 70여 명처벌하여 분란의 소지를 사전에 제거했다.

정조가 즉위와 동시에 공을 들인 것은 본궁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고 규장각 제도시행한 것이다. 규장각 제도란 조정의 문신들의 재교육 기회초계문신(抄啓文臣) 강제(講製)를 뜻한다. 이 제도는 조정의 37세 이하 문신들 가운데 재주가 있는 자들을 뽑아 공부하게 한 다음 그 성과를 시험을 통해 확인하여 임용 승진의 자료로 삼은 것으로 규장각에서 이를 주관했다.  20년간 10회 시행하여 100여 명을 배출하였는데 무반의 요직선전관(宣傳官) 강시(講試)제도도 함께 시행했다.

정조선왕 영조 때부터 시작된 궁성 밖 행차뿐만 아니라 역대 왕릉 참배를 구실로 도성 밖으로 나와 많은 백성들을 직접 만나는 기회를 만들었다. 100회 이상을 기록한 행차는 단순한 참배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민원을 접수하는 기회로도 활용하였다. 또한 누구든 억울한 일은 무엇이나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하여 능행(陵行) 중에 그것들을 접수토록 했는데 일성록 실록에 실린 상언·격쟁의 건수만도 5,000을 넘는다.

 

정조어진

과거제도 개선을 위해 대과(大科)규장각을 통해 국왕이 직접 관장하여 많은 과폐를 없앴으며, 만년에는 각도에서 행해지는 소과(小科)혁신하고자 주나라의 고사를 빌려 빈흥과(賓興科)로 이름을 고쳐 시행했다. 빈흥과국왕이 직접 출제하고 이것을 현지에 내려가 과장에서 개봉·게시하고 답안지를 거두어 규장각에 가지고 와서 국왕의 주관 아래 채점하여 합격자를 발표하도록 한 것이다.

정조시대를 학자들에 따라 조선시대의 문예부흥기로 일컫기도 한다. 문예부흥이 가능했던 배경은 병자호란 이후 17세기 후반의 화이론입각조선중화의식고취되고 이에 따른 북벌론의 대의명분 아래 조선 성리학의 이념에 입각한 예치의 실현이라는 당면과제국민상하일치단결해 수행해가는 과정에서 이룩한 자긍심과 조선문화의 독자적 발전에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정조아버지의 죽음당쟁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고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해 영조 이래기본정책탕평책을 계승했지만 뿌리깊은 당쟁은 그의 강력한 의지력으로도 개선되지는 않았다. 당시에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던 노론이 끝까지 당론을 고수벽파로 남고 정조의 정치노선에 찬성하던 남인과 소론일부 노론시파를 형성해 결국 정국은 벽파와 시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정조시대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학자들은 정조가 자신만의 체제 즉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언로조차 강력히 규제했기 때문이다. 그는 1794 문체반정(文體反正)이란 상상할 수 없는 지시를 내렸는데 그것은 당대의 지식인들이 문장정조의 입에 맞게 쓰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문풍(文風)의 개혁이지만 당대의 신물물에 접한 지식인들에게 정신 세계의 일탈을 막아 절대 군주인 자신에게 충성해야한다는 뜻인데 이것이 결국 조선으로 하여금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 새로운 국가가 되는데 결정적인 장애물이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한마디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데만 신경을 써 급속도로 발전하는 세계 물정도외시했다는 뜻으로 당시 세계 1차 산업혁명을 맞아 하루가 달리 변화함에도 이런 변화를 통제하는데 앞장 섰다는 주장이다.

정조의 한아버지당쟁의 여파뒤주에서 사망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정조는 당쟁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갖고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해 영조 이래의 기본정책인 탕평책계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고하게 세력을 구축하던 노론이 끝까지 당론을 고수해 벽파(僻派)로 남고, 정조의 정치노선에 찬성하던 남인과 소론 및 일부 노론이 시파(時派)를 형성해, 당쟁은 종래의 사색당파에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신권(臣權)을 주장하는 노론 중에서도 진보주의적인 젊은이들은 북학사상(北學思想)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주목하고 북학파의 박지원(朴趾源)의 제자들인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 등을 등용해 그 사상을 수용하였다. 그런데 이들 신분은 서얼(庶孼이란 보통 양반의 첩 소생이나 그 자손들을 의미한다)로서 이들의 임용은 서얼통청이라는 사회적 요청에 부응하는 조처라고 평가한다. 정조는 조선시대 27명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문집을 남겼다. 180 100에 달하는 그의 문집이 홍재전서. 일반적으로 정조는 신하들의 스승이라 불릴 정도로 학식과 덕망을 지닌 호학군주로 불린다.

그런데 화성행궁 화령전에 봉안된 정조의 초상화는 곤룡포가 아닌 군복 차림이다. 조선왕실 족보인 선원보락에서 보이는 간략한 그림과 우뚝한 콧마루, 네모난 입에 겹으로 된 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순조실록에 의하면 정조의 실제 얼굴은 다부진 모습일 확률이 높다. 정조무인 기질높이 평가한 것은 그의 정조 3(1779)의 말로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는 문치(文治)숭상하고 무비(武備)닦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군사에 익숙하지 않고 군병이 연습하지 않아서 번번이 행군할 때 조금만 달리면 문득 다들 숨이 차서 진정하지 못한다. 이를 장수는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군병은 예사로 여기니 어찌 문제가 아니겠는가? 훈련대장 홍국영과 병조판서 정상순은 이에 힘쓰도록 하라.”

 

틀에 박힌 정조의 이미지에서 우리가 익히 알던 호학 군주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데 참고적으로 아버지 사도세자호방한 무인 기질 때문에 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

 

여유당전서(다산문화재단)

정조의 사망에 대해서는 근간 독살되었다는 설이 주류를 이룬다. 정약용도 그의 저서 여유당 전서에서 정조의 독살 의혹을 제시했다. 물론 구체적인 물증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독살의 개연성과 심증이 간다고 적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정조의 사인 등창이다. 등창이란 등에 난 종기를 말하는데 이 등창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사망했다는 것인데 치료 과정을 살펴보면 석연치 않은 점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등창의 고름 환부를 직접 짜기만 해도 되는데 굳이 수은중독의 위험이 있는 연훈방처방했다는 점이다. 특히 붕어 순간사관과 승지가 배석하지 않았는데 이는 정상적인 죽음이 아닐 수 있다는 정황 증거라는 설명이다.

더구나 대비 정순왕후가 신하들을 물린 뒤 혼자 약제를 들고 들어간 뒤 갑자기 죽음을 맞았다. 정순왕후는 당시 정조의 죽음을 예견한 듯 군대로 하여금 궁성을 호위하게 했고 약방제조를 물린 뒤 직접 약제를 들고 왕의 침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바로 곡소리가 들렸고, 왕의 사망이 선포됐으며 왕세자(순조)에게 대보가 넘겨졌다. 순조 즉위 후 정순왕후열한 살의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고 친정 식구인 안동 김씨들을 조정에 끌어들여 순조헌종철종 60여년에 걸친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주역이 된다.

정조독살되었는지 아닌지는 이곳에서 더 이상 설명하지 않지만 여하튼 정조가 이루어 놓은 성과들은 하나하나 부정되었고 정조구사했던 논리는 반대 세력들이 정조의 성과를 부정하는 논리변형되었다. 그리고 정조치죄했던 인물들은 하나 둘씩 신원되고 반대로 정조가 육성한 인재들은 사형 또는 귀향을 간다. 정조가 총애했던 정약용도 이때부터 무려 18년간이나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