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릉과 건릉은 쌍둥이>
융릉과 건릉의 전체면적은 84.2ha이며 수목현황은 침엽수 62%, 활엽수가 38%다. 건릉의 능역 입구에서 배수로와 참배로로 이어지는 진입공간에는 상수리나무가 주종을 이룬다. 특히 건릉 진입부와 주변에는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 갈참나무 등의 참나무류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경관림을 갖고 있는 정조의 무덤은 융릉 서쪽으로 두 언덕을 사이에 두고 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을 자주 찾았던 정조는 영의정 채제공에게 “내가 죽거든 현릉원(융릉) 근처에 묻어주오”라고 했던 부탁대로 묻혔다. 그런데 1821년 효의왕후가 사망하자 정조 릉의 천장이 제기되었다. 정조의 릉이 아버지 무덤의 동쪽에 모셔졌으나 자리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효의왕후는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로 영조 38년(1762) 세손빈(世孫嬪)으로 책봉되어 정조와 가례를 올렸고,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진봉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지성으로 모시니 궁중에서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알려진다. 효의왕후는 1800년 순조가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고 소생 없이 69세로 사망했는데 남편의 묘호에 따라 후에 선황후(宣皇后)가 되었다. 능호를 정릉이라 했다가 건릉에 합장되면서 능호를 따로 쓰지 않았다. 또한 원래 정조의 묘호는 정종(正宗)이었는데 대한제국의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조로 높이고 정종 역시 정조라 고쳐 왕실의 묘호를 격상시켰다.
천장문제는 줄기차기 제기되었는데 이를 당시 영동녕부사 김조순이 천장 문제를 공식적으로 상소했다. 김조순은 당시 건릉의 초장지는 정조의 유지를 따라 현릉원 내의 강무당 터가 선정되어 산릉이 조성되었으나 처음 장지 선정 때부터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서 자신이 풍수에 식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상의 영체(靈體)에 관한 문제가 중요한 일로 택지할 때 불길한 곳은 피장자의 영체를 해침은 물론 후손이 끊어질 우려가 있다며 천장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더구나 이러한 불길한 땅이라는 주장은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능을 조성한 이후 많은 사대부들이 우려하고 근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조순의 상소에 대해 순조는 건릉의 자리에 대해 걱정이 많았다며 여러 대신들이 의논하라고 명했다. 이에 여러 신료들이 만장일치로 천장을 주장하자 순조 역시 이에 동의했고 정조와 효의왕후를 합장한 것이다. 천장을 위해 재궁을 들어낼 때 정말로 물이 많았다고 『순조실록』에 적혀있다. 지관 등이 부단히 정조의 릉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정말로 물이 무덤에 고여있었던 것이다.
원래 정조의 묘호는 정종(正宗)이었는데 대한제국의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조로 높이고 정종 역시 정조라 고쳐 왕실의 묘호를 격상시켰다.
정조의 릉은 역사적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1880년에 조성된 건릉 즉 건릉구릉지(丘陵地)를 2011년부터 2012년까지 2개년에 걸쳐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작업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2007년 정조 초장(初葬) 왕릉의 재실(齋室)터가 발견된 곳에서 북서쪽 인근이다. 구릉지에서 수도각(隧道閣), 난간석과 지대석, 석수와 곡장 자리, 현궁, 퇴광 시설 등 내외부 구조와 퇴광에 두었던 부장품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왕릉에서 부장품이 발굴된 사례는 처음으로 18세기 조선백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다양한 명기류를 비롯하여 편경, 편종 등 악기도 조사되었다. 학자들은 『건릉선릉도감의궤』에 그려진 물품을 구체적으로 확인되었다는데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런데 이 의궤에 의하면 건릉 구릉지에 경서와 전서의 서책도 부장했다고 적혀있는데 발굴조사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융릉과 건릉은 모습이 거의 똑같아 쌍둥이 릉으로도 불리지만 아버지 융릉처럼 장대한 모습은 아니다. 아버지 융릉은 왕인 정조가 심혈을 기우려 만든 반면 정조의 능은 그의 사후 유신(遺臣)들이 융릉처럼 만드는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자들은 장명등에 새겨진 문양이 융릉의 것과 같음을 볼 때 한 장인이 두 무덤을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융릉은 1776년, 건릉은 1800년에 조성되어 제작시기가 가깝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각 등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정조의 막강한 힘이 사망하자마자 조락(凋落)했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다.
물론 왕릉으로서의 구색은 모두 갖추고 있다. 능 입구에 홍살문이 있고 넓은 잔디 묘역 중간 왼쪽으로 재실이 있다. 능은 재실 위 높은 언덕에 모셔져 있다. 회격릉인데 회격릉은 광중의 네 벽과 땅을 균등하게 정리한 후 ‘회삼물’로 땅을 다진다. 건릉의 경우 석회 57섬이 소요되었는데 반듯이 다듬지 못했다고 적었다.
구조는 동릉이실로 혼유석은 하나만 놓였고 그 중간에 세운 팔각장명등의 기단부는 향로와 같은 형태다. 중대의 창호 부분 팔면에 원을 그려 매난국의 무늬를 서로 어긋나게 새겨 넣은 것이 융릉과 같다. 혼유석에는 면마다 둥근 원을 그리고 매난국(梅蘭菊) 무늬를 새겼으며 방향표시를 위해 난간석주에 문자로 십이지를 표시했다.
문석인의 도상은 금관에 조복을 갖추었는데 현릉원을 계승한 것이다.
이는 왕릉에서 획기적인 변화로 건원릉(1408년)부터 원릉(1776년)까지 약 370년 동안 왕릉 문석인은 지속적으로 복두와 공복을 갖춘 도상이었기 때문이다. 건릉 복두공복 도상의 전거를 따르지 않고 현륭원을 전거로 삼음으로서 오랜 전통이 바뀐 것으로 정조의 개혁의지가 국가 상럐(喪禮)에까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무석인의 도상도 융릉을 계승했는데 화려함은 더욱 강화되었다. 투구는 삼지창형 장식과 풍성한 상모가 달렸고 갑옷은 다양한 장착구가 부착되었으며 검을 든 도상이다. 투구의 차양 중앙에 ‘卍’자가 새겨져 있는데 대상의 사실성에 토대를 둔 것이다. 규모는 좌우너비 858mm, 앞뒤길이 785mm, 높이 2,330mm(서쪽)으로 더욱 우람하고 강건하다. 그러나 두부가 756mm로 매우 높아 신체비례가 부자연스럽고 옆에서 보면 목이 전혀 없으며 얼굴이 가슴까지 깊게 파묻혀 자세가 구부정하고 어색하다. 이로 인해 무석인 본연의 거대한 조형성은 살아났지만 자연스러움은 간소하였다.
내계의 가장자리의 양 옆으로 각각 1기씩 배설된 망주석은 팔각의 형식을 이루며 높이는 모두 283cm정도다. 망주석 염의 아랫부분인 주신의 상부에 세호가 조각되었다. 좌측 망주석의 세호는 위쪽을 향하고 있으며 우측 망주석의 세호는 아래쪽을 향하고 있는데 건릉과 전체적으로 유사하다. 융릉에서 홍릉에 이르는 조선후기 이후 세워진 망주석의 원수(圓首)를 비교하면 건릉 망주석이 가장 섬세하고 화려하게 조각되었다.
건릉의 정자각은 정전 3칸, 배위청 2칸으로 하는 5칸 정자각이며 정전의 구체적인 간잡이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정자각 상부의 가구 구조는 5량가, 배위청은 3량가이다. 지붕은 정전과 배위청 모두 맞배에 겹처마로 박공면에는 풍판을 설치했다. 포작은 정전이 출목 2익공, 배위청이 출목이 없는 2익공이다. 지붕 용마루는 적새를 쌓고 전후면에 회를 발라 마감하는 양상도회했으며 좌우에 취두를 설치했다. 정전과 배위청의 앞쪽 내림마루에는 용두와 잡상 각 4개씩, 뒤쪽 내림마루와 배위청의 내림마루에는 좌우 각 3개씩 설치했다. 정전 내외부와 배위청에는 모두 단청을 하고 정전의 좌우면과 뒤쪽의 벽은 중방까지 벽돌을 쌓아 화방벽으로 마감했다. 융릉과 건릉 정자각 앞 제향공간에는 다른 능과 달리 신로와 어로 사이에 판석이 넓게 포장돼 있다. 이는 두 릉이 고종 때 황제로 추존되면서 능제의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추정한다. 융건릉은 정조의 효행이 깃든 전통적 효 문화유적으로 현재 융건릉과 용주사, 만년제(지방문화재 제161호)를 연계하는 테마공원이 계획되고 있다고 알려진다. 만년제는 융릉의 반룡롱주혈의 풍수지리에 의한 보완시설이다. 서쪽제방 길이 181미터, 폭 37미터 규모의 넓은 광장 형태와 물이 빠져나가던 하수문지, 괴성(塊星)과 함께 용이 놀 수 있는 물과 여의주를 상징화한 시설로 사도세자가 사후에서나마 제왕의 지위를 누리도록 한 정조의 효심이 담겨 있다. 괴성은 만년제 가운데 위치한 원형의 인공섬을 말한다.
융건릉을 마무리로 유네스코세계유산인 조선왕릉에 대한 <문화유산답사>를 마무리한다. 당초 조선왕릉답사기를 계획할 때는 조선왕 27개 왕릉 중 북한에 있는 정종, 왕릉으로 불리지 않는 연산군, 광해군 묘를 제외하는 것으로 계획했지만 결국 추존된 왕릉을 포함하여 조선왕릉 40기를 모두 답사하여 일괄적으로 설명했다.
조선왕릉을 설명하면서 이곳에서 인용하거나 차용된 전문적인 자료에 대해 인용의 근거를 색인으로 밝혔지만 미비한 점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각별한 양해를 바란다.
근래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매우 높아졌고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엄밀히 말하면 조선왕실은 망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간혹 들린다.
‘내나라문화유산답사’를 견지하고 있는 김신목 선생은 조선국의 25대왕까지는 조선왕실이었으나 26대 고종에 이르러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었으니 그 이후는 대한제국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조선 왕실이 대한제국으로 이어졌으므로 조선왕조가 망한 것이 아니며 멸망한 국가는 단 두 명의 황제를 배출한 대한제국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므로 조선왕릉을 설명하려면 제25대 철종으로 마무리해야 한다는 설명도 되는데 이런 문제에 관한 한 역사학자들의 명쾌한 정리가 앞으로 필요한 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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