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종>
에밀레종의 역사적인 발자취도 자못 극적이다. 이 종은 서기 771년에 완성된 후 봉덕사에 봉납되었으나 봉덕사 전체가 수해로 유실된다. 그러나 무거운 종만은 떠내려가지 않은 채 땅속에 묻혀서 약 700년 동안이나 방치되어 있었다.
조선 초 숭유억불 정책이 시행될 때는 많은 불교 범종을 녹여서 무기 같은 것을 만들었는데, 봉덕사의 성덕대왕신종도 녹여 없애버리자는 여론이 있었으나 이는 세종이 따로 지시해서 막았다.
그후 조선 시대 세조 5년(1460년)에 영묘사로 옮겨졌으나 종각이 소실되는 사고가 일어난다. 종각이 소실되자 또 다시 노천에 버려져 있던 것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세조 5년(1460) 영묘사(靈妙寺)에 옮겨서 걸었다가, 이후 1506년에 경주읍성 남문 밖 봉황대밑에 성문종(城門鐘)을 짓고 1915년까지 아침, 정오, 저녁과 삼경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1915년 구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다가 1973년에 현 경주박물관 구내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때 에밀레종을 옮기는데 상당한 에피소드가 있다.
에밀레종을 트레일러에 실으니 무게는 50톤이 넘어서 최단거리인 월성로를 통과하면 중간에 있는 작은 다리가 50톤을 견딜 수 없다고 지적되었다. 그래서 경주 시내를 관통해서 멀리 있는 다리를 타야 했는데, 그러면 트레일러에 실린 종의 높이가 6미터가 넘어서 경주시내 전깃줄이 모두 걸리는 것이었다. 이에 <한국전력공사>에서 전공들이 다수 동원되어 에밀레종을 실은 트레일러가 지나갈 때마다 전깃줄을 끊었고 지나간 다음에 다시 이어주는 식으로 우대했다. 에밀레종이 경주 시내를 지나가는 동안 10만 시민들이 종이 옮겨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트레일러를 따라갔다고 한다.
동양의 범종은 그 형식과 특징으로 보아 중국종, 한국종(주로 신라 및 고려 시대의 범종 형식) 및 일본종으로 구별한다. 중국의 종은 유리컵을 거꾸로 한 모양에 역U자형의 고리를 갖는 형태로 종의 하단부가 서양종처럼 나팔 모양으로 벌어진다. 또한 하단이 파행선을 이루는 형태로 되어 있고 표면에는 모양이 거의 없이 단순한 구획선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본종은 원통과 반구를 합쳐 놓은 듯한 일정한 형상에 역시 단순한 선의 조합이 표면에 조각되어 있다. 반면에 한국종은 몸체의 곡선미가 뛰어나며 조각과 문양이 아름답다.
종의 꼭대기에 있는 용뉴(龍鄙)의 용은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을 종각에 달기 위한 현가(縣架)용 시설물을 종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동양종의 종뉴는 서양종보다 화려한데 기원전 433년을 전후로 용 또는 새 모양의 형태가 등장한다. 범종은 주로 용뉴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반적으로 중국종과 일본종은 쌍용두를 갖고 있지만 한국종은 유독 단용두로 한 마리의 용이 목을 구부려 천판에 입을 붙이고 있으며 목 뒤로 굵은 음통이 부착되어 있다. 물론 한국에서도 해인사의 동종처럼 쌍용두가 보이기도 한다.
어깨와 구연부에는 보상당초무늬가 장식된 문양대가 돌려졌고, 구연부의 끝부분이 모서리로 이루어졌는데 각 모서리마다 연꽃 한 송이씩을 배치하여 변화를 주었다. 어깨 밑에는 보상당초문양대가 장식된 유곽(乳廓)이 4곳에 배치되어 있고 그 안에는 연꽃 모양의 유두(乳頭)가 9개씩 조각되어 있다. 유곽 아래로는 서로 마주보고 있는 4구의 비천상과 연화 당좌(幢座) 2개를 교대로 배치했다. 비천상은 연화좌 위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두 손을 모아 향로를 받들고 공양을 드리고 있으며 그것을 휘감아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보상화무늬가 구름처럼 표현되어 있다.
학자들은 성덕대왕신종의 비천상이야말로 신라의 미를 대표하는 상징이라고 설명한다. 천인은 연화좌에 무릎을 꿇고 향로를 받들고 있으며 하늘로 휘날리는 옷자락 주위로는 보상화가 구름처럼 피어나는 섬세하고 미려한 조각이 신라의 간판스타라는 것이다.
동양의 범종은 그 형식과 특징으로 보아 중국종, 한국종(주로 신라 및 고려 시대의 범종 형식) 및 일본종으로 구별하는데 한국 범종은 다른 나라의 범종이 갖지 못한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최응천 박사는 연곽 안에 표현된 연꽃봉오리는 상원사종과 달리 돌출된 형태가 아니라 연밥이 장식된 둥근 자방(子房) 밖으로 두 겹으로 된 8엽 연판이 새겨진 납짝한 연꽃으로 표현되어 매우 독특하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형태는 나중에 운주지(雲樹寺) 소장 종이나 조구진자(常宮神社) 소장 종과 같은 8∼9세기 통일신라 범종에까지 계승되는 일종의 변형 양식이다. 성덕대왕신종은 이뿐만 아니라 주악천인상과 종구(鐘口)의 모습 등이 다른 종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몇 가지 독특한 양식을 갖추고 있다. 즉 종신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일반적인 주악천인상과 달리 손잡이 달린 향로[병향로(柄香爐)]를 받쳐든 모습의 공양자상(供養者像)이 앞뒤 면에 조각되었는데, 이는 종의 명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된 것인 만큼 성덕대왕의 왕생극락(往生極樂)을 간절히 염원하는 모습을 담았다고 볼 수 있다. 연화좌(蓮花座) 위에 몸을 옆으로 돌린 공양상의 주위로는 모란당초무늬가 피어오르고 머리 뒤로 천의를 흩날리고 있다.
종구 부분 역시 여덟 번의 굴곡을 이루도록 변화를 준 점이 독특하다. 이에 따라 그 위에 장식되는 하대 부분도 8릉의 굴곡이 생기고, 굴곡을 이루는 골마다 당좌 같은 원형의 연꽃무늬를 여덟 군데에 새겼으며 그 사이를 당초무늬로 연결시켜 한층 화려하게 꾸미고 있다. 당좌는 그 주위를 원형 테두리 없이 유려한 보상화무늬로 장식하였다.
우선 8세기의 한국 범종은 동아시아 어느 나라 종보다 훌륭한데 그것은 범종 재료의 배합비가 다르기 때문이다. 보통의 청동 제품은 구리, 주석, 납을 섞어 만들지만 용도에 따라 비율이 달라지는데 한국의 청동에는 유난히 아연의 함량이 많다. 아연이 포함된 청동은 중국에서는 한(韓)나라 이전에는 없고 송(宋)나라 때 드물게 나타난다. 아연은 섭씨 900도에서 끓기 때문에 아연이 많이 들어 있는 청동을 합금으로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한국의 청동이 기술적으로 중국이나 일본보다 우수한 것은 자유자재로 우수한 합금을 만들 수 있었다는 뜻이다.
신라의 종에 대한 명성은 세계적으로 매우 높았는데 16세기의 명나라 이시진이 쓴 『본초강목』에는 신라종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고 전상운은 적었다. 본초학이라고는 하지만 박물학에 가까운 책인데 이 책은 그 당시 중국의 박물학을 집대성한 세계적인 명저로 꼽히는 과학의 고전이다.
페르시아동은 거울을 만드는 데 좋고, 신라동은 종을 만드는데 좋다.
그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질이 좋은 동합금들을 소개한 것인데 페르시아의 황금빛 나는 황동과 신라에서 만든 아연-청동이 최고라는 것이다. 성종 19년(1488)에 우리 나라에 사신으로 왔다가 조선의 풍토를 읊어 쓴 명나라 동월의 『조선부』에도 고려동은 질이 우수하다는 글이 있음을 볼 때 신라와 고려의 동이 얼마나 유명했는지를 알 수 있다.
두 번째, 범종을 청동으로 만드는 데는 회전법과 납형법이 있는데 서울대학교의 남천우 교수에 의하면 한국의 범종은 최고급 기술인 납형법을 주로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회전법은 만형법(挽型法) 또는 총형법(總型法)이라고 부르며 간단히 말하면 밥솥과 같이 원형의 단면을 가지는 기물을 주조하는 방법이다. 주형의 내형과 외형은 각각 따로 만든다. 내형을 만들 때는 내형의 외면과 같은 단면 곡선을 가진 외판을 만들어서 그것을 회전시켜 가며 그 안쪽에 진흙을 쌓아 올려 만들고, 외형을 만들 때에는 외형의 내면과 같은 단면 곡선을 가진 내판을 만들어서 그것을 회전시켜 가며 진흙을 쌓아올려 외형을 완성시킨다. 그러나 외형은 원형보다 크게 만들어야 하는데다가 무겁기 때문에 여러 단으로 나누어 쌓아 올릴 수 있게 만든다. 당연히 종에 주형선(鑄型線)이 생기게 된다. 또한 문양을 조각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것은 외형을 일단 완성한 다음에 그 외형에 또다시 조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납형법은 만들고자 하는 물체의 모양을 밀초로 미리 만들어 놓은 다음에 진흙을 발라 두텁게 씌워서 주형을 만든다. 그 후 밀초에 열을 가하여 모두 녹여 빼낸 다음 주형에 쇳물을 부어 종을 완성하는 방법이다. 이와 같은 방법은 밀초로 종을 조각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종의 표면이 부드러우면서도 우아하고 정교한 문양을 표현하는데 적격이다.
현재 불상이나 동종의 거푸집을 만들기 위한 밀랍의 원틀을 만드는 방법을 노태천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선 점토에 만들려는 물체의 모양을 조각한 원형을 토대로 석고의 음형을 제작하고, 석고의 음형에서 다시 석고의 원형을 만들고, 또다시 석고의 원형으로 제라틴 음형을 만든 후에 밀랍의 원틀을 만든다. 합성밀랍을 구성하는 밀랍과 수나무 수지의 배합비율은 기후에 따라 다르다. 여름에는 형태가 변하지 않을 정도의 단단함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겨울에는 반대로 너무 단단하지 않아야 한다. 여름에는 대략 30퍼센트, 겨울에는 20퍼센트의 소나무 수지를 배합시켜서 합성밀랍을 만든다.
물론 납형법이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중국종도 처음에는 회전형법이 사용되다가 납형법으로 이행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754년에 이미 49만 근의 황룡사종을 만들었으며 755년에는 30만 근의 약사여래동상을 만들었다. 그런데 49만 근 짜리 거대한 황룡사종을 거뜬히 만든 신라에서 불과 12만 근의 봉덕사종을 만드는데 많은 실패와 오랜 제조 시간이 걸렸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황룡사의 종은 주형법으로 만들어졌지만 봉덕사 신종은 납형법으로 제조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재료의 확보도 수월한 일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벌통 하나에서 1년에 생산되는 밀초의 양은 1~2리터밖에 되지 않는다. 봉덕사종의 부피를 약 3세제곱미터로 추정할 경우 이 정도의 밀초를 준비하려면 손실량을 감안할 때 적어도 4,000~5,000개의 벌통이 있어야 한다. 당시의 여건으로 보아 단기간에 확보할 수 있는 밀초의 양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봉덕사종의 완성도를 위한 신라인들의 노력을 인정해 주어야만 할 것이다.
신라시대에 주조한 범종의 화학조성도 놀랍다. 동 80〜85퍼센트, 주석 12〜15퍼센트 정도 함유된 주석청동이다. 에밀레종, 상원사종, 선림원종, 실상사종의 평균은 동 81.3퍼센트, 주석 13.8퍼센트다. 이들 수치는 한국식동검(세형동검)의 분석치인 동 79.2퍼센트, 주선 13.4퍼센트와 매우 유사하다. 한국종과 동검의 동 : 주석 조성비가 유사한 것은 단단하면서도 사용(타격)할 때 잘 깨져서는 안 된다는 칼과 종의 특성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청동무기를 제작했던 전통이 한국종 제작에도 그대로 전해져 좋은 종이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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