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의 마녀. 일자 코흐(1)

Que sais 2020. 10. 11.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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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역사에는 수많은 악당이 등장한다.

수많은 정복자 자체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무고한 많은 사람들을 살해했는데 어떤 사람은 만고의 영웅으로 칭송받고 어떤 사람은 악당으로 치부되는데 이들 대부분 남자. 한마디로 악당 중 악당이지만 역사는 이들이 자행한 악행 자체로만 평가하지 않는다.

여성도 마찬가지 잣대로 평가되어야하지만 여성을 남성과 똑같은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여성으로 알려진 정복자는 극히 드물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놀라게 하는 악녀가 있기 때문이다.

그중 한 명이 나치 '부헨발트의 마녀(The witch of Buchenwald) 나치 홀로코스트의 마녀로 불리는 일자 코흐(Ilse Koch, 19061967)라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1974돈 에드몬드(Don Edmonds) 감독, 다이안 손(dyanne Thorne) 출연의 영화 일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실화를 토대로 만들어졌는데 내용이 그야말로 생소롭다. 악명높은 나치의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을 담았는데 나치수용소 - 섹스 - 생체실험 등이 주제이다. 영화의 많은 장면이 나체의 여자 모습인데 포르노 물이 아니라 엽기물로 인식되어 한국에서도 방영되었다.

 

놀라운 것은 영화 자체가 B으로 평가되는데도 시리즈물로 4까지 나올 정도로 흥행에도 성공했고 만화도 수없이 나올 정도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는 소재 자체가 잔혹하고 비극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역사상 실제에 일어났던 사건을 토대로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제대로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주인공인 일자 코흐(Ilse Koch, 19061967)'부헨발트의 마녀(The witch of Buchenwald)란 별칭을 갖고 있을 정도로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에서 온갖 변태적인 살인, 섹스는 물론 생체실험으로 수용자들에게 가혹행위를 한 인물이었다.

일자 코흐의 만행은 그녀의 재판을 통해 철저한 검증을 거쳐 낱낱이 공개된 것으로 더욱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수감자들의 피부를 벗겨 책표지, 전등갓과 지갑, 장갑 등을 만드는 것은 물론 희생자들의 장기 등으로 그녀의 수많은 장식품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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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문신을 가진 피부를 좋아하여 문신을 도려내 그것을 콜렉션으로 삼기도 했다. 인류 사상 최악의 악녀로 거론될 정도로 그녀가 행한 행동 하나하나 엽기적인데 제시되는 증거 자체가 얼마 전 지구상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실이라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재판 중 제시된 인피 등 자료

2차 세계대전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참상이 잘 알려져 있지만 그런 행위가 알려진 것은 그런 행위를 실제로 행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생활을 면밀히 검토한 학자들은 히틀러가 처음에는 바람직하지 않은 분자들유태인, 집시, 정신이상자나 신체장애인, 동성애자 그리고 그의 정책에 반하는 지식인들을 추방하려고 했다는데 동조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나치 살인기계가 작동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상상을 초래했다. 유대인이 수백만 명 살해당할 정도로 광기의 극열한 행동들이 2차 세계대전 동안 지속되었는데 그 중심에서 서 있는 나치의 추종자인 일자 코흐는 남다르다.

그녀가 나치의 수많은 학살에서도 가장 악명을 높힌 것은 희생자들을 철저하게 살해하면서 각가지 난행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악행을 하나의 직업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우선 그녀가 그런 행동을 자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악명높은 부헨발트 포로수용소 소장인 카를 코흐 대령이 그녀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공식적으로 부헨발트 포로수용소에서 여성감독관으로 근무했으므로 수용소에서의 일이 공무로 처리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녀가 포로수용소의 근무자로서만 만족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학자들은 그녀가 정신병적인 사디스트이자 색정증 환자로 잔인한 분위기와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남녀노소를 고문하는 고통을 즐겼다고 설명한다.

부헨발트의 마녀로 불리는 일자 코흐1906년 작센 지방 드레스덴에서 노동자의 딸로 태어났다. 학교에서 그녀는 조용하고 애정이 넘치는 가정 출신의 품행이 단정한 학생으로 소년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15세에 학교를 그만둔 후 단기간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곧 서점의 사서가 되었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의 패배 여파로 휘청거렸는데 1930년 그녀에게 기회가 왔다. 당시 나치의 추종자들이 자주 서점을 찾았는데 그녀는 여러 SS(SchutzStaffeinel) 대원들과 관계를 가졌으며 1932나치당에 가입하고 나치 지부의 비서가 되었다. 그리고 SS와 게슈타포 사령관인 하인리히 히믈러에게 발탁되어 그의 일급 보좌관 카를 오토 코흐(Karl Otto Koch)와 결혼했다.

SS히틀러독일 군대를 견제하는 것을 물론 자신의 명령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 창설한 그의 경호부대 겸 친위부대이다. 그런데 SS가 남다른 것은 순수 혈통의 아리안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이다.

당시 나치의 큰 목적 중 하나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인 아이안을 새롭고 완벽한 아리아인으로 다시 창출하는 것이라고 선전되었다. 그런데 일자와 카를이 바로 나치 독일의 이상에 적합한 결합으로 간주되었다. 카를 코흐SS로 보아 완벽한 인물이다.

 

일자 코흐와 카를 코흐

카를 코흐1897년 독일 담스타드에서 태어나 1차 세계대전 동안 육군에 가입하였고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자 영국군한테 체포되어 191910월까지 포로로 구금되기도 하였다. 1930, 나치에 가입하였고 악명높은 SS의 대원이 되었다. 1934년에 리헤텐 부르크강제 수용소 안에서 근무했고, 부헨발트 수용소장으로 임명된 후 폴란드의 마이데닉수용소장, 소련 전쟁포로들을 관리하는 바펜의 사령관이 되어 포로들을 가혹하게 다루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의 만행은 우크라이나 총독시절볼세비키계 유태인들을 즉석에서 처형하는 등 더욱 맹위를 떨쳤다.

일자는 카를과 결혼한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농부의 딸에서 최고위급 장교의 부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1939년 독일이 전격전으로 유럽 각국을 격파하자 카를부헨발트 수용소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사실 독일의 나치 수용소에서 학살은 그다지 생소로운 것이 아니다.

1930년대 내내 바람직하지 않은 분자들의 청소를 시작하여 거리 사살, 유태인 강제거주지구의 기아, 철도 객차에 대한 독가스 공격 등을 자행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집단 학살이 생각보다 비효율적이라는 점이다.

상황에 따라 재판이라는 것이 필요하고 이들을 격리하는데도 교도소가 필요한데 이는 경비가 많이 들었다. 그러므로 단기간에 많은 사람들을 제거하려면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수많은 포로수용소몰살수용소로 바꾸면 되는 일이었다.

1937바이마르 지역에 세워진 부헨발트는 북으론 작센하우젠 수용소와 남으론 다카우 수용소를 거느릴 정도로 거대하며 나치 독일이 최초로 설립한 포로수용소 중 하나이다.

수용소의 임무는 기본적으로 노동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은 곧바로 살해하고 건강한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일을 시키는 곳이다.

특히 유태인들을 악명높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로 이송하기 전에 잠시 머물게 한 곳이기도 했는데 처음엔 다른 수용소처럼 1,0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수용소 인원들이 점점 증가하여 193998,634명으로 증가했고 194312월에는 37,319, 해방될 무렵에는 무려 80,436명이 되었다.

수용소는 130개 막사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형 막사에는 독일군과 수감자들이 함께 생활했고 소형 막사에는 격리수감자, ‘천막 막사에는 수천 명의 폴란드 포로들이 별도로 수감되었다. 또한 관리자 주택, SS막사, 수용소 공장들도 이 안에 있었다.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 입구

이들 수감자들은 철저하게 노동을 착취당했는데 수감자들이 채석장에서 수용소로 거대한 돌을 운반할 때 SS의 눈에 작은 돌을 운반하는 사람들은 당장 살해되었다. 나중에는 많은 수감자들이 거대한 짐수레에 사슬로 묶인 채 거대한 돌을 수용소까지 운반해야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는지 당시 수감자들이 돌을 옮겼던 도로를 피의 거리로 불렸다.

대부분 초기 수감자들은 정치범들이었는데 1938년부터 몇 만 명에 달하는 유태인, 동성애자 그리고 집시 등과 같은 반사회적 분자들의 수용소로 바뀌었고 이들을 7,000명의 SS 대원들이 통제했다.

부헨발트에는 악명 높은 나치의 가스실이 없었는데 사실 가스실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수감자들은 공장이나 야외에서 죽을 때까지 일했고 평균 잔존 수명은 고작 3개월이었다. 한마디로 강제노역장인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대상이었다.

질병이나 영양실조, 피로, 구타 등으로 살해되었지만 부헨발트가 특별히 악명을 떨친 것은 바로 의학 연구소. 이곳에서 발진티푸스 및 바이러스 연구를 했는데 그 방법이 다소 끔찍하지만 잘 알려져 있다.

마취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불임수술, 신약 실험을 위한 주사 그리고 고통과 열, 추위에 대한 실험 등이다. 살아 있는 채 생체를 해부당하기도 했고 화상을 입힌 후 독을 주사하기도 했다. 또한 수감자들을 치명적인 질병에 감염시킨 후 증상을 철저하게 기록했는데 목적은 나치 과학과 아리아인의 보호라는 영광스런 목적을 진전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에 코헨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적격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의학연구소를 주도한 사람은 화학 관련 의사장인 발데마르 호벤(Waldemar Hove)박사.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한 그는 1934SS에 입대하였고, 바펜SS에서 대위까지 진급했다. 그런데 그의 기본 업무는 부헨발트에서 유태인 수감자들에게 이산화가스, 아황산 가스, 이페리트 가스 등을 직접 주입하거나 여러 가지 전염병 등을 투입하여 그 증상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이다. 유독화약물인 아코니틴, 술폰아미드, 페놀, 가솔린 등을 주입시켜 수감자들을 살해하는 것은 기본이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그는 인간존엄성을 위반하는 범죄, 전쟁범죄에 대한 유죄로 사형 선고를 받아 19486, 바바리아주 란즈베르크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