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홀로코스트

아돌프 히틀러의 전말(4)

Que sais 2020. 12. 31.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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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집권>

히틀러로서는 반 데르 루베사형 선고를 받고 곧바로 처형되었다는 증거만 있으면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오래전부터 국회의사당 방화나치가 방화에 가담했다는데 비중을 둔다.

그러나 근래의 자료에 의하면 반 데르 루베의 단독 범행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루베나치를 괴롭히기 위해 베를린에서 몇 차례 소규모 방화를 저지른 경력이 있었다. 특히 검찰에서 루베의 동조자로 체포되었던 불가리아 공산당원과 독일의회 공산당 지도자가 그와 함께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만약 나치가 방화를 계획했다면 혐의자 전원에 유죄판결을 내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는 설명이다.

 

히틀러에 열광하는 독일인들

방화범인 루베19341월에 처형되자 히틀러가 사실상 독일 정부를 접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히틀러는 자신에게 대항할 세력이 사라졌다고 생각하자 이제는 단체가 아닌 반대파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신속함을 강조하는 히틀러는 19346, SA의 총사령관 에른스트 룀이 자기를 암살할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룀을 비롯하여 수백 명의 돌격대원을 살해하고 독일 군대와 SA 내에서 숙청을 감행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으로 죽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학자들은 적어도 500여명이 재판도 없이 사라졌다고 추정한다. 그들을 재판도 없이 처형한 이유를 묻자 히틀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독일 국민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다. 내가 바로 최고의 정의다. 그리고 장래에 국가에 해가 되는 일을 시도한다면 그의 운명은 죽음뿐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된다.”

 

82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더욱 기민하게 움직였다. 한 시간 안에 대통령 집무실과 수상 집무실이 합쳐졌고 히틀러국가수반이자 독일 전군의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조처를 합리화하기 위해 국민투표자신과 나치에 대한 신임을 물었다. 819일 선거에서 4,600만 명의 유권자 중에서 90퍼센트 이상이 그에게 찬성표를 던졌으므로 독일에서 그의 위치는 확고한 기반을 갖는다.

1935년 히틀러는 독일과 연합군 사이에 맺어졌던 베르사유 조약의 군사제한조항을 폐기하고 징병제를 부활시켰으며, 6월에는 영국-독일 해군협정을 체결하여 독일 해군을 증강시켰다. 9월에는 뉘른베르크법을 공포했다. 이 법의 주요 골자는 2대 위로 두 명 이상의 유대인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은 독일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유대인과 비유대인과의 결혼도 금지했다.

유럽의 각국은 비로소 이 히틀러의 독일을 불편한 이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19363월 히틀러는 최초의 큰 도박을 시도했다. 로카르노 조약을 파기하고 라인란트 지역을 침입한 것이다.

당시 독일군의 전력은 2만 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프랑스가 역습해오면 패배는 명약관화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독일인들이 똘똘 뭉치면 주변국을 제압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당시 독일에서는 히틀러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고도 과언이 아닌데 그의 탁월한 연설 능력을 그 이유로 든다. 그러나 학자들은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한 후 다른 독재자들과는 달리 국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요인은 특별히 의심이 가지 않는 한 국가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정책 결정들을 그의 부하들에게 모두 일임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당연히 그의 밑으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몰려들었다. 물론 특정 인물의 지나친 권력 독점을 방지하기 위해 2명 이상의 인물에게 같은 일을 배당하여 충성 경쟁을 유발시켰다.

히틀러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금욕적인 생활을 했고, 채식주의자였으며 개인생활은 검소했다. 오랫동안 결혼하지 않았지만 남성으로서는 정상적인 체질의 소유자였다. 히틀러의 일상생활은 색다른 데가 있었다.

그는 매일 한낮이 될 때까지 침대에 누운 채 조간신문을 훑어본 후 직무를 시작했으며, 이튿날 동틀 무렵에 잠자리에 들었다. 사치나 여성편력 또는 미식가로서의 기질은 전혀 없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부근에 있던 산장에 가서 자신의 사진사의사운전수비서에 둘러싸여 마음 편히 담소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겼다. 이때의 화제는 대개 개 사육법, 최신유행, 예술계의 이야기, 개인생활의 사소한 사건 등 다양했는데, 오페라의 노래를 듣고 여가수의 이름을 알아 맞추기 게임을 즐기는 등 독일인들에게 어필하는 생활을 견지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 영국과 프랑스 등 제국주의에 희생된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독일인들이 세계를 지배해야 하며 순수한 독일인들로 구성된 독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믿었다.

히틀러는 우선 병자와 약자는 사회의 나머지 구성원들에게 불필요한 부담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집시, 장애인, 장기 실업자유전학적으로 표준 이하라고 생각되는 40만 명을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대대적인 사회정화운동으로 독일이 어느 정도 정화가 되었다고 생각한 히틀러는 독일이 군사강국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것은 히틀러가 당시 유럽 정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재무장이 첨예한 문제점이었는데도 영국, 프랑스 등 승전국은 다소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과 같은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생존을 위한 재무장을 어느 정도 묵인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합군은 독일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고만 다짐한다면 독일의 재무장은 어느 정도 눈감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부 국가에서 독일의 재무장을 강력히 반대했지만 독일이 또 다시 전쟁을 일으키리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대다수 연합국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은 히틀러가 어느 정도 군사력을 갖추었다고 판단했을 때 곧바로 나타났다. 1938311독일군은 히틀러의 조국인 오스트리아에 진입하여 곧바로 합병한 것이다. 이때도 연합국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은 원래 같은 민족이므로 큰 위험성이 없다고 방관했다.

그러나 1년 후인 1939년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고 1940년에는 폴란드, 네델란드, 벨기에 그리고 프랑스를 휩쓸었다. 유럽인들이 절대로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이다.

 

<유대인제거>

2차 세계대전은 유대인에 대한 홀로코스트로 악명을 얻고 있는데 학자들은 전쟁이 발발하자 히틀러가 독일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이 자신에게 등을 돌릴 것으로 생각하여 이를 근원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을 강구했다고 설명한다. 문제는 히틀러의 결론이 유태인들이 등을 돌리기 전에 선수쳐서 전부 제거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전 세계에 있는 수많은 민족 중에서 유독 유대인에 대한 이러한 박해가 왜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유대인 박해를 당연시하던 인종주의나치독일이 발명한 유산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유대인 박해에 대한 기원은 무려 3세기까지 거슬러 간다. 유대인에 대한 공식적 박해는 이 당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신학과 철학을 가르쳤던 오리겐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오리겐은 예수가 동정녀로부터 출생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성경의 변개를 주도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모든 약속들은 더 이상 유대인들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위 유대인들은 선민이 될 수 없다고 뜻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신의 저주를 받은 사악한 민족이며 그들이 부여받았다는 모든 약속은 교회가 물려받았다고 주장했다. 심지어는 예루살렘 입성도 금지 당했는데 결론은 그리스도교인들은 유대인들이 신의 선민인 체 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시온 원로들의 의정서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십자군 원정 때 절정에 이른다. 이슬람교도들이 점령한 이스라엘 땅을 탈환한다는 목적을 갖고 있는 이 성전회교도뿐만 아니라 예수를 죽인 민족인 유대인들에 대한 미움으로 바뀌어 유대인들에 대한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심지어는 제1차 십자군 원정 때 예루살렘에 거주했던 유대인들은 모두 살해되었다.

이후에도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계속되었다.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건물이나 토지 등 부동산을 소유하지 못하게 막았으므로 대부분 현찰 거래 즉 고리대금 등 금융 거래에 손을 대었다. 이것이 유대인들은 일을 하지 않고 약자들의 피를 빨아먹는 악한 민족이라는 인상을 유럽인들에게 깊게 심어주게 된 요인이다.

유대인을 말살해야 한다는 근거인 인종주의 근원은 역사를 따져 보면 독일이 아니라 프랑스. 고비노(Gobineau)인종 불평등론(1853)에 따르면 유대인은 열등하고 비열한 민족이고 기독교도의 생활과 문화를 더럽히는 기생충이기 때문에 격리하여 없애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아리안인종만이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했다. 이 순수 인종이 그 후 저질 인종들과 교잡을 통해 그 순수성을 잃었으므로 혈통을 정화하지 않는 한 인류는 영영 타락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교잡을 통해 순수 인종이 타락하고 문명이 몰락한다고비노의 이론은 비관주의적 성격을 띈 것인데 그의 뒤를 이어 독일의 드 라프지과학기술을 이용해 고급 인종의 혈통을 보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선택교배와 단종수술이라는 인공도태법을 사용하면 아리아족의 인종적 순도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비관적인 인종이론낙관주의적 이론으로 변모하면 나치의 인종론으로 귀결되며 결국 유대인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죽여도 좋다는 사형언도가 된 것이다.

여기에 히틀러반유대주의를 촉발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시온 원로들의 의정서라는 책이다. 이 책은 유대인 원로들의 24번에 걸친 비밀 회합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타민족들을 유대인 제국으로 흡수하기 위한 전략민주주의사회주의혁명언론예술 등의 각론으로 나누어 설명해 놓은 것이다.

 

렌느의 재판정에서 증언하는 알프레드 드레퓨스 

이 책은 금세기 초에 성경 다음으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이다. 이 책의 저자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프랑스어로 나왔던 첫 판이 쓰인 시기는 1894년이나 1897년으로 추정한다. 이 당시는 프랑스에서 드레퓌스 사건으로 반유대주의가 활발했던 시기로서 책은 1903년에 러시아의 비밀 경찰 후원 하에 발간되었다. 그들은 이 책을 발간한 목적은 책의 내용에 분개한 많은 사람들이 반유대주의에 동참하도록 조장하는 것이다.

 

드레퓌스 사건(L'affaire Dreyfus)사건이란 은 19세기 후반의 수년 동안 프랑스를 휩쓸었던 반유대주의와 이 때문에 희생된 무고한 드레퓌스 대위의 무죄 여부를 놓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군부 등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이 격돌했던 사건이다. 이때 에밀졸라가 나서 사건을 원천적으로 재검토하게 만들어 펜이 칼보다 얼마나 강한가를 알려준 본보기로 알려진다.

 

여하튼 이 책은 여러 가지 내용을 짜깁기 한 것이다. 1864년의 프랑스 나폴레옹 3를 비난하는 내용의 허구적인 대화 내용이 거의 수정 없이 표절된 것은 물론 헤르만이 발간한 비아리츠라는 소설의 일부도 도용했다. 역사학자 살로 배런시온 원로들의 의정서'20세기에 가장 위세를 떨친 최대의 사기'라고 말할 정도로 완전히 조작된 내용이라고 잘라말했다.

시온 원로들의 의정서가 허위라는 사실은 드러났지만 이 책의 판매는 줄어들지 않고 더 많이 팔렸다. 번역본은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발간되었는데 특히 독일의 나치 정권에 의해 적극적으로 보급되었다.

시온 원로들의 의정서에 나와 있는 유대인의 음모를 가장 확고하게 믿었던 사람 중에 한 명이 바로 히틀러였다는 점이 바로 유대인들에게는 불행이었다. 히틀러는 나는 시온 원로들의 의정서가 아주 유익한 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고 나는 단번에 그것을 우리 식대로 변형시켜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유대인의 머리로 유대인을 이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1923년의 한 연설에서 독일의 인플레가 자꾸 격심해지는 것은 유대인의 음모 때문이라고 시온 원로들의 의정서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시온 원로들의 의정서가 허구라고 밝혀졌음에도 히틀러는 오히려 더욱 더 깊은 믿음을 가졌다. 유대인들이 이 책을 허구에 바탕을 둔것이라고 주장하는 자체가 진짜임을 보여주는 최고의 증거라고 말했다. 특히 정치적 음모나 음모 방법, 혁명을 통한 전복이나 유언비어의 날조, 속임수, 조직화 방법 등을 시온 원로들의 의정서에서 도움을 받았다고 인정했다. 히틀러의 유대인에 대한 증오는 다음과 같은 그의 유언장에도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나는 국가와 민족의 정부에게 모든 국가에 해독을 끼치는 국제주의 유대인들을 무자비하게 제한하고 저지하는 인종 차별 법규를 지지하라고 명령한다.”

 

시온 원로들의 의정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계속 출판되고 있는데 특히 아랍권에서는 이 책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시온 원로들의 의정서의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았고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잘 국왕시온 원로들의 의정서를 자신의 애독서라면서 방문 기자들에게 증정까지 했다.

19889이슬람 근본주의 테러단체하마스(HAMAS)는 이스라엘에 대한 성전을 촉구했는데 그들이 전쟁을 벌이는 가장 큰 이유는 시온 원로들의 의정서때문이라고 발표했다. 그들이 발표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시온주의자들의 야욕은 그칠 줄 모른다. 저들은 팔레스타인에 이어 나일강에서 유프라테스강까지 팽창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다. 시온 원로들의 의정서가 바로 그 증거이다.'

 

유대인들이 즉각 항의하고 반박할수록 시온 원로들의 의정서는 더욱 더 잘 팔리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생산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특히 어떤 거짓말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간의 영악함은 존경스럽기만하다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