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홀로코스트

아돌프 히틀러의 전말(2)

Que sais 2020. 12. 31.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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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급철십자훈장 수상>

여하튼 1913히틀러오스트리아 제국군(히틀러는 태어날 때 오스트리아의 시민권을 갖고 있었음)의 강제 징집을 피하기 위해 빈을 떠나 뮌헨으로 갔다. 그런데 1914118일 오후에 놀랍게도 형사가 그곳에 나타나서 체포했고, 다음날 그를 오스트리아 영사관으로 인도하였다.

그가 당면한 죄목은 무거운 것이었다. 그런데 우연이 그를 도왔다. 린츠 병무당국이 출두날짜를 너무 짧게 잡아서 그는 소환에 응할 수가 없었다. 소환날짜가 연기되면서 그는 세심하게 계산된 서면상의 사유서를 제출했다. 그는 소환장에서 자신을 예술화가라고 적은 것에 대해 정당한 지칭이기는 하지만 수입은 별 것 없어 독립적 예술 화가로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고 적었다.

그는 최초의 징집기한을 놓쳤기 때문에 몇 번이나 자진 신고를 하였지만 아마 서류가 도중에 분실된 것 같다는 내용을 적었다. 그는 징집에 출두하지 못한 것을 빈 시절의 절망적인 생활사정 탓으로 돌렸다. 그가 내세운 변명은 뻔한 것이었지만 전체적으로는 효과가 있었다.

14일 후 191425일에 히틀러잘츠부르크의 심사위원 앞에 출두하였다. 놀랍게도 그는 신체검사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당시 히틀러에 관한 소견은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병역의무와 보조의무에 적합하지 않음. 너무 약함. 무기를 다룰 능력 없음.’

 

그는 뮌헨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1914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 제국군 병사로 징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독일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바이에른 왕에게 직소를 올려서 자신은 오스트리아 태생이지만 바이에른 연대에 지원병으로 받아달라고 청했다.

그가 직소를 올린 다음날 답장이 왔다. 떨리는 손으로 그는 편지를 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거기에는 지휘관의 이름을 따서 리스트 연대라고도 불리는 바이에른 16예비보병 연대에 출두하라고 되어 있었다. 그의 군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히틀러는 플랑드르 지방에서 주로 영국군과 싸웠는데 전쟁 내내 히틀러 상병연락병으로 중대와 연대본부 사이에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두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겼고 191412월에 2철십자 훈장을 받았고 19185월에는 적을 앞에 두고 용감했다는 이유로 연대훈장을 받았다. 같은 해 84일에 1철십자훈장을 받았는데 이것은 사병에게 극히 드믄 일이었다.

 

1처세계대전 연락병 히틀러

히틀러가 1급철십자 훈장을 받게 된 구체적 이유에 대해서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고 히틀러에 대한 평전을 쓴 요하힘 C 페스트는 말했다. 히틀러 자신도 그에 대해 한 번도 말하지 않았는데 전해져 내려오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진다.

 

어떤 보고에 따르면, 히틀러가 열다섯 명의 영국 정찰조를 사로잡았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열에서 스무 명의 프랑스군을 극적으로 체포했다고도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대포알이 무섭게 날아오는 한가운데를 뚫고 포병부대로 들어가서 아군이 심각한 포격을 당하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물론 가장 신빙성 있는 설명은 그가 행한 어떤 하나의 행동이 아니라 여러 해 동안 증명해 보인 끊임없는 노력의 덕으로 훈장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1급철십자 훈장히틀러의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친다. 훈장들은 오스트리아 사람인 히틀러에게 독일에서 더 높은 권리를 갖도록 해주었고, 그럼으로써 그의 경력의 탄탄한 대로를 만들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주었다.

여하튼 히틀러는 군에서 큰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특히 191810, 영국군의 독가스 공격은 그의 한쪽 눈 시력을 빼앗을 만큼 치명적인 것이었다. 나의 투쟁에서 그는 이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

 

나는 타들어 가는 듯한 눈을 감싸 쥔 채 비틀거리며 후퇴했다. 몇 시간 후 내 눈은 새빨갛게 타는 석탄이 되고 온갖 주변의 것이 캄캄해졌다.”

 

그는 포메른에 있는 파제발크 육군병원으로 수송되었고 독일이 패배했다는 것을 들었다. 독일의 패배에 히틀러는 대단히 낙담했다. 군대생활은 그에게 전우애를 가르쳤고, '참호의 사회주의'라고 불리는 공동생활을 체험하게 했으며,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전쟁터를 고향으로 여길 정도였는데 그의 상관도 이러한 점을 뒷받침해 주었다.

 

히틀러 상병에 있어 리스트 연대는 고향이었다.”

 

패전에 따른 독일 군대의 해체, 유럽에서 독일 패권의 실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슬라브 민족들의 독립과 강화, 중유럽으로부터 독일의 후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 금지 등은 히틀러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특히 그는 독일과 연합군 사이에 체결한 베르사유 협정에 대한 격렬한 반대자 대열에 선다.

여하튼 1918년 전쟁이 끝난 뒤 그는 뮌헨 육군 지구사령부 공보과에 배치됐고 연대 교관 교육공무원으로 임명된다. 19199월 그는 상관으로부터 <독일노동자당>이라는 보잘것없는 과격파 정당의 회합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조사 임무를 수행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조사를 받고 있는 독일노동자당이 이상적인 기구라고 생각한 후 당에서 일하겠다고 제안하여 승낙을 받았다.

히틀러의 당원번호는 555. 당원번호는 501번부터 시작되므로 히틀러는 55번째로 입당했고 선전과 홍보를 담당하는 7당위원이 되었다.

1920년 퇴역한 후에 그의 활동은 두드러진다. 히틀러는 자신의 생각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비범한 재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선동가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

히틀러 연설의 비결감정에 호소하는 능력과 논리 전개가 명확하다는 점이다. 그의 논리는 매우 거칠고 단순했다.

 

'독일은 정치가와 유대인에게 배신당했다. 국제적 사회주의를 바라는 유대인들은 스스로의 국가를 갖지 못하고 깊은 국가적 뿌리를 가진 민족을 시기한다. 독일의 비운은 게르만의 용맹성으로 극복할 수 있다. 우리를 배신한 인간들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면 된다. 그리고 우리들은 게르만의 위대한 전통에 눈을 떠야한다.'

 

물론 히틀러가 연단 위에서 증오와 복수만을 외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대중이 지닌 고귀한 감정에 호소하여 전독일인의 결집, 국내외 압력으로부터 독일 국민의 해방,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통일 및 조화, 중산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생활안정 및 향상, 용병제도의 폐지와 국민군의 창설, 독일 국민의 강인함과 능력에 대한 신뢰, 자유라는 대이상에 대한 빛나는 희망 등을 역설하여 독일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한편 히틀러는 사람이란 공포, 탐욕, 권력욕, 질투에 의해 움직이고 때로는 수단이나 작은 동기에서도 움직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정치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러한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방법을 아는 기술이라고 결론지었다.

노동자당에 히틀러가 합류하자 그의 연설을 듣고 당에 입당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가 워낙 많은 당원을 확보하자 곧바로 확실한 당 지도자로 부각된다. 그는 당 명칭을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tional 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나치스로 바꾸었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이 패배했기 때문에 국내의 정정이 매우 불안하여 어느 누구도 테러를 당할 우려가 있었기에 돌격대(Sturmabteilung) 또는 SA로 불리는 암살단을 모집했다.

히틀러의 생각은 매우 단순했다. 테러 당하기 전에 먼저 테러하는 것이 테러를 당하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SA히틀러의 경호원처럼 행동했고 히틀러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무자비하게 처리했다. 히틀러가 SA를 만든 이유를 물었을 때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지한 사람들을 폭력으로 일단 교화시키는 것이 최선이라고 대답했다.

 

<공화정 타도>

1923년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은 내적 분열과 경제적 붕괴로 만신창이가 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독일은 승전국간에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19211월, 연합군 손해배상회의를 통해, 독일이 앞으로 42년 동안 총 2,260억 황금 마르크에 이르는 손해배상을 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나아가 같은 기간 독일 총수출액의 12퍼센트를 양도하라는 결정도 나왔다.

 

봉급으로 받은 지폐 더미

이와 같은 배상금을 독일이 지불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판명되자 인플레이션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1918년 독일 마르크화 가치는 1달러에 4마르크였는데 1923년 초에는 1달러에 7,000마르크가 될 정도였다.

이 사태는 19231월 프랑스군이 루르 지방을 점령하자 독일에서 이에 대한 수동적 저항운동이 전개되면서 더욱 가파르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좌파에서 우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독일인이 소극적 저항에 동조했지만 히틀러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치유해야 한다면서 유대인에 대한 투쟁과 베를린의 공화정부에 대한 투쟁을 주장했다. 특히 나치당 내에도 반프랑스 투쟁을 중시하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히틀러도 적극적으로 프랑스에 대한 독일공화정부의 소극적 태도를 공격했다.

1923926독일정부는 프랑스에 대한 수동적 저항을 중지하겠다고 발표하자 이 결정에 반대한 극우파는 공화정의 타도를 외쳤다. 바이에른에 있는 극우운동의 공동단체'독일투쟁동맹'을 이끌고 있던 히틀러는 바이에른 우익정부에 의한 베를린으로의 진격, 전독일 우익독재정부의 수립을 제창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당시에 히틀러가 나치당만의 단독정권을 세우거나 바이에른 우익정부에 반역하여 봉기를 일으킬 의사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독일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민심이 떠나자 히틀러는 당시의 독일 정황을 잘 이용하면 독일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후 중앙정부를 무너뜨릴 전주곡으로 폭동을 계획한다. 히틀러가 이와 같은 대담한 계획을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세운 나치스가 계속하여 국민들의 호응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