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홀로코스트

아돌프 히틀러의 전말(1)

Que sais 2020. 12. 31.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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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대학교 김정운 교수2차 세계대전의 주역으로 다음 외국 정치가가 누구인지 추측해보라고 제시했다.

 

부패한 정치인과 결탁한 적이 있으며 점성술로 결정을 내리고, 두 명의 부인이 있으며 매일 줄담배를 피우고, 하루에 910잔의 마티니를 마셨다.

 

귀족 중에 귀족으로 태어나 회사에서 두 번 쫓겨난 적이 있으며 정오까지 잠을 자고, 대학 때 마약을 복용했고 매일 한 번씩 위스키의 1/4을 마신다.

 

전쟁영웅으로 채식을 주로하고 담배도 안 피고 필요할 때만 맥주를 조금 마신다. 불륜도 없고 죽을 때까지 단 한 명의 애인만 있었다.

 

이들 설명만 보면 의 인물은 매우 성실한 사람으로 귀감 대상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정답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의 주인공은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jlin Roosevelt, 18821945), 윈스턴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18741965),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로 세 사람 모두 2차 세계대전의 핵심 인물이다.

루즈벨트는 민주당 출신의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재임 19331945)으로 미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4선 대통령이다. 192139세의 나이에 두 다리가 불구가 되는 소아마비에 걸렸음에도 이를 극복하고 1924년 정계에 입문했다. 193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자, 지명수락연설에서 뉴딜(New Deal)’정책을 제창하였다. 1929년 이래 몰아닥친 대공황으로 전 국민이 고통받고 있던 당시 뉴딜정책은 상당히 매력적인 정책이므로 결국 허버트 후버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루즈벨트는 특히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미국 대통령이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1941일본의 진주만(U.S. Pacific Fleet at Pearl Harbor)공격을 계기로 참전하여 전세를 뒤집었다. 세계평화를 위한 8가지 원칙을 천명한 대서양헌장(Atlantic Charte)을 주창했고 이후 카이로선언(Cairo Declaration)과 포츠담선언(Potsdam Declaration)에서 한국을 자유 독립국가로 승인할 것을 결의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했다. 그의 역할이 아니었다면 당대의 여건상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의 독립이 간단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루즈벨트가 미국에서 크게 인정받는 것은 승자를 찬양하고 패자를 경멸하는 미국 문화에서, 가난하고 실패한 사람들의 친구로 알려지기 때문이다. 그는 경제공황 때 낙담하고 절망한 사람들을 격려하며, 함께 미국의 새로운 판을 짜자고 외쳤다. 특히 미국대통령은 재선만 허용되는 관례임에도 세계대전이라는 특수성으로 4선에 당선되어 실질적으로 종신 집권을 한 셈이지만, 아무도 그를 독재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가 민중과 대화할 줄 아는 보기 드문 사람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앞의 설명과 같은 상식에 어긋나는 생활을 한 것은 물론 수많은 여자들을 정부로 갖고 있었다. 천하의 루즈벨트가 이런 엉망의 사생활을 갖고 있다는데 믿어지지 않지만 그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돌프 히틀러

2차 세계대전에서 궁극적으로 영국이 승리자가 되도록 만든 윈스턴 처칠은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 중 하나인 말보로 공작의 후손이다. 그러나 학교에서 말썽꾸러기 낙제생으로 생활기록부에 따르면 그에 대한 기록은 그야말로 놀랍다.

 

품행이 나쁜 믿을 수 없는 학생으로, 의욕과 야심이 없고 다른 학생들과 자주 다투며, 상습적으로 지각하고 물건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며 야무지지 못하다.’

 

성적도 하위권이었지만 역사 과목만은 뛰어났다고 하는데 그가 영국을 구한 장본인이라고 거론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의회에서 연설한, 다음 연설은 그가 얼마나 대중을 휘어잡는 힘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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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칠 것은 피와 땀과 눈물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가장 호된 시련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기나긴 투쟁과 고난의 세월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정책이 무어냐 묻습니다. 나는 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땅에서 바다에서 하늘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신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모든 힘과 우리의 모든 능력을 다하여, 인류가 저지른 개탄스런 죄악의 목록 가운데에서도 가장 극악한 폭정(暴政)과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책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냐 묻습니다. 나는 한 마디로 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승리입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승리합니다. 모든 공포를 이겨내고 반드시 승리합니다. 승리에 이르는 길이 아무리 길고 험난해도 반드시 승리합니다. 승리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 기필코 승리를 쟁취합시다. 승리하지 않으면 대영제국이 존속할 길이 없고, 대영제국이 지탱해 온 모든 것들이 존속할 수 없습니다. 승리하지 않으면 인류가 그 숭고한 목표를 향해 전진하게 만드는, 시대의 추동력도 존속할 수 없습니다. 나는 활기와 희망으로 나의 과업을 떠맡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우리의 대의(大義)와 소명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나는 모든 이에게 도움을 호소해야겠습니다. ! 단결된 힘으로 우리 함께 전진합시다!”

 

위와 같이 당당한 어조로 독일과의 전투를 끝까지 지속하여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주역이 되어 영국의 자존심을 구했다. 또한 문학에도 재주가 있어 1953노벨문학상도 수상하는 등 윈스턴 처칠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삶이 곧 영국이었다. 2002BBC가 영국인 100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위대한 영국인 100가운데 아이작 뉴턴과 셰익스피어를 제치고 처칠이 1를 차지한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드높은 사회적 명성과 귀족 가문 상류층이라는 신분적 지위, 하원의원, 장관, 총리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대학 때 마약을 복용했고 줄담배와 술을 물처럼 마시는 등 사생활이 엉망이라는 것은 다소 놀랍지 않을 수 없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인 루즈벨트와 처칠의 사생활이 공적인 업무와는 다르다고 항변하는 사람들도 막상 그들의 사생활을 항상 덮어두어야 하느냐 에는 반론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히틀러와 같은 사람의 사생활을 낱낱이 공개하는 것도 껄끄럽다. 그가 세계사의 한 장면을 선이 아니라 악으로 포장시켜 역사상 가장 악당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으로 참전하여 전쟁 영웅이 되었으며 그의 개인 생활은 거의 청교도에 가까웠다. 그의 사생활이 루즈벨트와 처칠에 비해 비난 받을 점이 없다는 것은 인간의 속성이 그렇게 이율배반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루즈벨트나 처칠과 같은 위대한 정치가에 대한 사회적 전형성에 그야말로 엉뚱한 히틀러가 연결되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히틀러의 이런 이율배반에 대해 많은 연구들이 있었는데 가장 놀라운 것은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되었다는 것이다. 무려 600여 만 명의 유태인이 학살되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학살된 숫자에 과장이 있다는 말도 있으나 엄청난 유태인이 살해된 것만은 사실이다. 소위 홀로코스트.

 

<화가의 재주>

세계를 경악하게 한 홀로코스트의 주인공 아돌프 히틀러1889420일에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남부 주인 바이에른 국경 지대에 위치한 브라스나우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돌프는 세관원인 아버지 알로이스가 나이 차이가 많은 어머니 클라라와의 세 번째 결혼에서 낳았다.

 

유아시절 히틀러

아버지가 퇴직한 후 오버외스터라이히의 수도인 린츠 근교로 이사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히틀러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레알슐레(실업계중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성적이 불량해서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아돌프의 학적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 학생은 자제력이 부족하고 오만하며 성격이 나쁘다. 충고나 잔소리를 하면 적의를 드러낸다. 또한 자신을 지도자로 상상하여 동료 학생들에게 쓸데없는 아첨을 요구한다.’

 

그는 학업을 끝마치지 않고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인 빈으로 가서 1909년부터 1913년까지 머물렀다. 그림에 남다른 소질이 있어 빈 미술학교와 건축학교에 지원했지만 모두 낙방하자 작은 가게의 조잡한 광고나 포스터를 그리거나 도배를 하면서 겨우겨우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히틀러도배장이였다는 것은 연합군 측이 지어낸 이야기라는 설이 많다. 1903, 1908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망했지만 히틀러는 부모의 유산과 국가의 고아연금이 있었으므로 생활에 큰 곤란을 겪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친구가 없이 외롭게 지냈기 때문에 자신의 예술가적 재능을 모르는 부르주아 사회에 적의를 갖게 되는데 만약에 그가 이때 미술학교에 입학했다면 세계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히틀러그림으로추정되는 만화

실제로 히틀러의 젊은 시절 그림을 보면 그의 그림에 대한 재주가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종종 그림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것은 히틀러의 서명'A·H'가 들어간 1937년 작 디즈니만화 영화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등장인물인 부끄럼장이(Bashful)와 똘똘이(Doc), 1940년 작 디즈니 영화 피노키오 등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난쟁이 캐릭터 뒷면에서는 서명이 발견됐으나 피노키오 캐릭터에는 서명이 발견되지 않았다.

 

히틀러의 그림

20082월 윌리엄 하크바크 노르웨이 전쟁박물관 관장은 독일의 한 경매에서 구입한 '히틀러'(A. Hitler)라고 서명된 회화 속에 복수의 만화가 감춰져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집권후 사설 영화관에서 종종 관련 애니메이션을 보았고 당시 백설공주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크바크 관장"이것이 위작이라면 회화 작품 속에 감춰져 있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번 만화는 히틀러 작품이라는 것을 100% 확신한다"고 밝혔다.

참고적으로 그동안 히틀러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그림들은 출처가 명확하지 않아도 경매시장에서 고가로 꾸준히 팔려왔다. 2007년에는 히틀러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수채화 19점과 스케치 2이 영국 남서부 콘월의 작은 마을에서 223000달러(118000파운드)에 팔렸다. 그 작품들은 히틀러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벨기에에서 하사관으로 근무하면서 그린 것으로 추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