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홀로코스트

아돌프 히틀러의 전말(3)

Que sais 2020. 12. 31.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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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홀 반란 사건>

1923, 히틀러는 자신이 봉기할 지역으로 뮌헨을 선택했고 1111일을 D-Day로 잡았다. 그 날은 휴전독일이 모욕적인 패망한 5주년이었다.

히틀러는 바바리아 출신 장교 중에서 중앙 정부에 대한 충성 서약을 무시하고 있던 로소브 장군, 계엄사령관 폰 카르 대령, 경찰국장 폰자이서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그들이 집회에 함께 모이는 1111일을 택했다. 히틀러의 원래 계획1110일 저녁 어둠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뮌헨 북부에 있는 프뢰트마닝 들판에서 대규모 야간연습을 실시하고 다음날 새벽에 보통 행진하듯이 뮌헨으로 들어와서 민족주의 독재체제를 선포하고 3거두에게 행동을 촉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초 예상한 1111일보다 3일이 빠른 118일 세 명의 바바리아 지도자들이 뮌헨의 맥주홀 뷔르거브로이켈러에서 연설할 예정이라는 것을 알고 거사일을 당긴다. 그가 일정을 당긴 것은 폰 카르가 자기보다 선수를 쳐서 쿠데타를 일으킬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맥주홀반란시군사령부앞의돌격대

118일 저녁, 돌격대로 하여금 사전에 계획된 대로 도시의 곳곳에 배치한 후 히틀러와 측근들은 맥주홀로 갔다. 그러나 맥주홀에서 돌발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받은 정부당국125명의 경찰관들을 맥주홀 주변에 배치했다. 맥주홀 중앙 홀에도 무장 경찰관이 요소요소에 배치했으며 500미터 반경에 언제든지 맥주홀로 출동할 수 있는 진압 경찰도 배치했다.

히틀러는 맥주홀에 들어가자 수많은 경찰이 도처에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돌격대가 건물을 경비할테니 경찰은 철수해달라고 했다. 830분이 되자 히틀러는 탁자 위로 뛰어 올라 천장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고 외쳤다.

 

민족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홀에 6백 명의 중무장 병사들이 장악하였습니다. 아무도 홀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얼른 조용하지 않으면 기관총을 회랑에 배치하겠습니다. 바이에른 정부와 중앙정부는 제거되었고 임시정부가 세워질 것입니다. 방위군과 지방경찰 청사들도 점령되었습니다."

 

당시 바바리아의 세 거두는 단상에 서 있었는데 히틀러가 그들 곁으로 가서 옆방으로 들어가라고 한 후 그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고 지지를 요구했다. 히틀러는 그들에게 반란을 지지해 준다면 중요한 자리를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독일의 정규 장교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세 사람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상등병이었던 히틀러의 말을 무시하고 확답을 하지 않았다.

이때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루덴도르프 장군이 약속된 시간보다 늦게 들어왔지만 히틀러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자  민족영웅의 모습을 직접 본 로소브루덴도르프의 말을 일종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자이서도 그를 따랐다. 오직 카르만이 고집스럽게 반항하였지만 결국 굴복하였다. 루덴도르프와 카르가 과열된 태도를 보이는 대중 앞에 나서자 쿠데타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히틀러루덴도르프의 지지에 고무되어 맥주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에른스트 룀이 이끄는 2000명의 히틀러 지지자에게 혁명이 성공적으로 시작되었다고 전화한 후 룀에게는 폰 로소브의 사령부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룀은 히틀러의 명령대로 사령부를 접수하고 자기 부하들을 배치했다.

이때 룀의 통한의 실책이 나온다. 그는 자신이 사령부를 접수했음에도 당직 장교를 그의 사무실에서 내쫓지 않았다. 당직 장교는 자신의 방에서 독일 전역에 반란의 전모를 상세히 전했다.

더구나 더 큰 문제점은 히틀러가 로소브와 카르가 떠나는 것을 방관했다는 점이다. 로소브는 맥주홀에서 돌아오자마자 장교들이 로소브가 쿠데타에 합류했다는 것은 히틀러의 협박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로소브는 결국 격분한 장교들 앞에서 쿠테타 의도를 포기한다고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 이어서 카르도 자신이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 쿠테타 동의를 철회한다고 발표하며 히틀러의 친위대 등의 해산을 선언하였다.

계엄사령관 카르가 히틀러 추종세력이 뮌헨으로 진입하는 길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도 히틀러는 아무것도 모른채 계획된 베를린 대행진을 위해서 아주 바쁘게 병력을 동원하고 다음날 무모한 행진을 했지만 로소브와 카르의 이탈은 결국 히틀러의 쿠데타를 좌절시켰고 히틀러와 루덴도르프는 체포되었다. 경찰 4, 나치 당원 14, 모두 18명이 짧은 총격전에서 죽었다. 히틀러란즈베르크 감옥으로 보내졌고 5년 금고형을 받았으며 당도 해체되었다. 루덴도르프는 무죄방면되었다.

히틀러는 재판에서 모든 책임을 혼자 떠맡고 봉기의 의도를 뚜렷이 표명하는 등 결연한 태도를 취하며 다음과 같이 자신의 쿠데타가 정당했음을 떳떳하게 선언했다.

 

우리에게 심판을 내리는 것은 당신(판사)들이 아니다. 심판은 역사의 영원한 법정에서 내려진다. 그러나 역사의 법정은 우리에게 너희들은 반역죄를 범했는가, 범하지 않았는가를 묻지 않는다. 우리 국민과 조국을 위해 싸웠는가, 충성했는가를 물을 것이다.’

 

재판은 그의 대중적 인기를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고 봉기의 유일한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또한 그는 이 봉기로부터 운동의 목적합법적인 수단으로 달성되어야 한다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그는 5년 금고형을 선고받았으나 6개월의 형기를 마치면 집행유예를 기대할 수 있을 정도의 매우 낮은 형량이었으므로 실제로는 9개월 동안 란츠베르크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옥중생활은 자유로워서 방문객들과 담화도 하고, 동지들과 식사도 했으며, 마음대로 독서할 수도 있었다. 그는 감옥에서 ()자서전 겸 나치 사상의 해설서나의 투쟁, Mein Kampf을 정리하는 데 전념했다.

모리츠와 헤스가 히틀러의 구술을 필기했고, 이것을 매주 토요일 저녁 감옥 내의 나치 동료들이 개최하는 공동집회에서 발표했다.

히틀러가 감옥에서 석방될 무렵 나의 투쟁상권은 거의 완성되어 1925년에 출판되었고, 하권막스 아만의 도움을 받아 1927년에 발표되었다. 1930년에는 합본판이 나왔고 1943년까지 총 984만 부가 판매되었다.

 

방화 사건

히틀러가 맥주홀의 반란에 연계되어 수감되어 있는 동안 독일의 경제적 파국이 일어나자 나치스에게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독일의 인플레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는데 1923년 초에 1달러 당 7천 마르크 하던 것이 11월에 무려 1,300억 마르크로 치솟은 것이다. 빵 한 조각을 사기 위해 큰 가마 한가득 마르크화를 넣어가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결국 바이마르 공화국은 국내 정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자 1924년 말, 독일인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은 히틀러를 석방하고 당의 재건도 허락한 것이다.

히틀러는 이때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고 말했다.

하나는 나치당 안에서 절대적인 통제권을 확보하는 것이고 둘째는 나치당을 독일의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만드는 것이다. 쿠데타에 비록 실패는 했지만 히틀러는 독일인을 위한 대안은 자신만이 제시할 수 있다고 외쳤다. 그는 독일을 지상낙원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하며 자신을 따르라고 말했고 차츰 범 독일정당으로 나치당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불타는 국회의사당

한편 히틀러는 천부적인 선동가의 기질을 발휘하여 정치자금을 통제하고 있는 중공업계의 대자본가들에게 접근했으며, 그들을 이용하여 정부에 대항하는 강력한 우파노동조직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공산주의의 발흥을 두려워하여 많은 자금을 히틀러에게 지원했는데 히틀러는 이들 정치자금으로 중하층과 실업자의 지지를 얻는데 투여했다.

1930914일의 총선에서 600만 표 이상을 득표하며, 독일의 제2당으로 부상했다. 그런데 선거직전 라이프치히 최고법정에서는 군대내에 나치를 조직하려다가 체포된 장교들의 군사재판이 있었다.

913일 법정에 출두한 히틀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치는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을 계획이므로 폭력이 필요 없다. 나치는 군부를 붕괴시킨다든가, 군부를 대신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나치가 국민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잡는다면 합법적 수단을 통하여 당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국가를 개조할 것이며, 11월 혁명에 대한 복수를 할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당당한 증언은 군 간부와 독일 지배세력의 호의를 얻었고 19331,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독일 수상이 되었다.

그런데 그가 집권하자마자 1933227일 밤, 국회의사당이 화재로 크게 부셔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히틀러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로 급부상하던 괴링은 언론에 공포했다.

 

이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폭동의 시작이다. 이제 그들을 몰아내야 할 때가 왔다. 1분도 지체해서는 안 된다.”

 

베를린 의사당 건물이 화염에 쌓여 있을 때 옷을 반쯤 벗어 던지고 땀을 흘리고 있는 젊은이가 현장에서 잡혔다. 그는 곧바로 자신이 방화범이라고 자백했다. 그는 복지사업국, 시청 등을 방화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한 사실도 털어놓았다. 그는 24살의 미장공 마리누스 반 데르 루베였다.

재판받는 방화범 마리누스 반 데르 루베

그가 체포되었다는 것을 보고받은 괴링은 한 네덜란드 공산주의자가 체포되었다고 발표했다. 루베는 공산당에 입당한 사실은 있었지만 오래 전에 공산당에서 추방되었음에도 괴링의 발표는 설득력이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말엽의 정치 사회 분위기와 심각해진 경제 위기 상황에서 많은 독일인들이 우익이든 좌익이든 극단주의자들의 반란이 예상되고 있었다. 나치는 국회의사당 방화를 나름대로 해석했다. 신생 민주국가에 대한 이런 불손한 태도는 질서의 수호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방화 당일 밤 수상 히틀러대통령 힌덴브르크에게 국민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서긴급명령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힌덴부르크긴급명령에 서명했고,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의 기본권은 효력을 상실했다.

긴급명령으로 우편과 통신의 자유가 제한되며 언론도 사전 검열을 받아야 하고 가택 수색도 허용되며 혐의가 있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은 증거나 고발, 변호사 없이도 체포는 물론 구금시킬 수 있었다. 국회는 한 달 후 수권법(授權法)을 통과시켜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했고 히틀러는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의 승리는 행정부가 의회의 동의 없이도 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권력을 잡은 히틀러가 제일 먼저 착수한 조치는 자신에게 반대할 수 있는 조직을 신속히 해체토록 명령한 것이다.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금지시켰고 가톨릭 중도파와 우익민족주의자들을 해체했으며 노동조합을 접수하는 등 단 몇 개월에 문제가 될 거대한 단체들을 모두 붕괴시켰다.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은 히틀러의 권력 장악에 큰 공훈을 세웠는데 반 데르 루베는 의사당 방화를 자백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가 혼자서 방화했다고 주장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소방 당국조차 20개의 불씨를 혼자 설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