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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의 마녀. 일자 코흐(2)

Que sais 2020. 10. 12.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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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에서의 일자 코흐(좌)

나치 홀로코스트의 마녀

 

카를과 일자 코흐가 부헨발트에 도착한 후 일자는 자유롭게 자기가 할 일을 찾기 시작했다. 1941, 그녀는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소수의 여성감독관들을 휘하로 두는 최고여성감독관(Oneraufseherin)으로 임명받아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근무한다.

이때부터 다시 말해 본격적으로 홀로코스트 역사에 한 획을 긋는 행위에 몰입한다

그녀는 낮에 채찍을 들고 수용소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수감자들을 무차별 채찍질했는데 채찍을 맞은 수감자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는 것은 그녀를 즐겁게 했고 활력을 주었다. 밤에는 장교 부인들과 레스비언 향연을 벌였고 남편의 부하 장교들과 하루에 12명까지 관계를 가졌다고 자랑했다. 일자학대 기술과 수감자들의 고문에 매혹되었고 곧 색정증 환자와 사디스트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녀의 큰 업무는 새 수감자들이 도착할 때 속옷 차림으로 수용소 정문에 서 있는 것이다. 한 명의 수감자라도 그녀를 오래 바라볼 경우 정신을 잃을 때까지 두들겼다. 한 번은 세 명이 그녀의 아랫도리를 쳐다보자 두 명은 현장에서 죽도록 두들겨 맞았고 다른 한 명은 얼굴을 흙에 쳐박힌 채 목이 눌려 질식사했다. 그녀는 추후 재판에서 그들은 그녀를 음탕한 눈길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처형당했다고 진술했다.

일자는 수용소를 죽음의 놀이터로 만드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하루는 수감자들이 일하고 있는데 보초가 수감자들에게 총을 쏘기 시작하자 그녀도 권총으로 수감자 24명을 쏘아 죽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그녀의 테러를 알리는 서곡에 불과했다.

그녀는 죽은 사람들로 집안을 장식하는데 열중하여 수감자의 머리를 절단해 자몽만한 크기로 화학처리토록 한 후 집안에 놓았다. 인간의 머리뜨거운 물체로 장시간 감싸면 작아진다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남아메리카히바로 족은 목을 베어 그 머리를 뜨거운 모래 속에 넣어 줄어들게 했다고 알려진다. 놀라운 것은 그녀가 아이들과 함께 매일 식사하는 식당에 12개의 머리를 놓았다고 한다.

또한 재봉사로 하여금 살해된 수감자들의 피부를 떼어내 책 커버, 지갑, 장갑 그리고 전등갓을 만들게 했다. 한마디로 인간의 피부로 수공예품들을 만들었는데 전등갓독일 인종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특별히 만들어졌다고 한다.

일자 코흐는 수용소 소장의 부인이므로 수용소에서 가장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인간 피부로 만든 악세사리들을 자신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에게 주는 선물로도 활용했다. 그녀는 고운 피부로 악세사리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여 수감자 중 고운 피부를 갖고 있는 경우 곧바로 살해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그녀가 인피로 만든 것들이 적나라하게 재판에 제시되어 현재도 전해진다는 점이다. 특히 일자는 문신이 있는 피부로 장갑을 만들었고 고문할 수감자를 찾아 수용소를 돌아다닐 때마다 이들 장갑을 꼈다고 한다.

유태인 대학살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나치의 수용소에서 대학살이 일어났다는 자체를 부정했다. 그런데 그녀가 인피(人皮)로 만든 수공예품들을 보고 경악하면서 실상을 이해했다는 말도 있다.

 

물론 그녀 혼자만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은 아니라 카를도 일자의 만행에 합류했다. 그는 부헨발트에 도착하자마자 동물원을 짓게 했는데 4마리와 원숭이 5마리를 넣을 수 있는 물웅덩이와 방이 있었다. 곰 우리는 수감자들에게 훤히 들여다 보였는데 한 수감자는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수용소에는 곰과 매가 있는 우리가 있었다. 그들은 유태인을 매일 한 명씩 그곳에 집어 넣었다. 곰은 사람을 갈가리 찢었고 독수리는 뼈를 쪼았다.’

 

어느 부헨발트 수감자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출석을 부르는 동안 SS의 아내들은 희생자를 선택했다. 그들은 예술적으로 문신을 한 아름다운 피부를 찾았다. 그녀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종종 광장에서 특별 점호를 하곤 했는데 이때 모두 나체로 점호를 받았다. 그러면 그녀들은 패션쇼에서처럼 열 사이를 지나다니며 그들을 조사했다. 그녀들이 킬킬거리는 소리와 감탄과 만족을 표시하는 웃음소리를 보이며 선택한 대상을 손가락으로 지적했다.’

 

일자는 집시와 러시아 포로의 피부를 선호했고 피부가 손상되지 않도록 주사를 놓아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수감자들의 살해는 SS의 정책 중 하나이기도 했다. SS는 인간의 머리카락을 수집했는데 머리카락은 U보트 대원들과 국영철도의 사용용 양말을 제조하는데 사용했다고 알려진다.

놀랍게도 카를과 일자는 1941무자비한 만행, 부패 그리고 불명예라는 혐의 즉 공문서 위조, 횡령, 관리소홀, 반항, 군법 위반, 암시장 혐의, 2명의 정치범을 사살한 것에 대해 SS법정에 섰다. 그러나 혐의는 기각되어 일자부헨발트로 되돌아왔지만 카를은 폴란드에 있는 마이다네크 포로수용소의 소장, 소련 전쟁포로들을 관리하는 바펜의 사령관이 되었다.

일자는 남편인 카를이 곁에 없지만 수용소 장교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평소와 같은 행위를 계속했다. 그녀는 공식적으로 부헨발트의 최고여성감독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1944년 카를이 부헨발트로 다시 돌아와 수용소장이 되었다.

그가 부헨발트로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여러 건의 새로운 고발을 당했다.

 

이번에 가장 큰 죄목은 절도와 횡령에 관한 것이다. 나치로 보아 제국을 상대로 횡령하는 것은 수용소 내에서의 수용자들에 대한 고문이나 살인과 차원을 달리하는 중대 사건이었다. 조사와 재판 후에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그는 매독에 대해 자신과 상의한 것을 발설하지 못하도록 의료진을 사살하도록 명령했음이 밝혀져 살인죄도 추가되었다. 그는 19454월 자신이 잔인한 행위들을 지휘했던 바로 그 장소인 수용소 운동장으로 끌려나와 총살되었다.

그러나 부헨발트의 마녀로 불리던 일자는 살아남았다. 그녀는 실제로 남편을 부추켜 똑같은 죄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고발되었음에도 방면되었을 정도다.

 

그러나 연합군이 접근하자 일자는 일반 사람들 틈에 섞여 피신했다.

19454미군이 부헨발트에 진입하자 해방된 수감자들이 그녀를 잊지 않고 그녀를 고발했다. 미국인들이 목격한 잔악한 행위들은 너무나 끔찍하여 아이젠하워 장군은 부헨발트에 진입한 사단의 모든 장병들에게 수용소 내의 참혹한 장면을 모두 보여주라고 명령했다. 아이젠하워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말했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모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제 그들은 무엇에 대항하여 싸웠는지 알게 될 것이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일자 코흐는 아무도 모르게 숨어 살았으나 1947년 마침내 체포되었다. 부헨발트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이 몇 주 동안 계속해서 그녀의 행위를 증언했다. 검사가 그녀의 손에 의해 50,000명이 넘는 수감자들이 고문당하고 죽어갔다고 주장하자 일자는 자신은 나쁜 사람들의 단순한 하수인에 지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시체 더미를 쌓아놓은 사진을 보여주자 일자는 거짓말이라고 소리쳤다. 그녀는 모든 혐의를 부정했고 연합군이 자신을 옭아맨다고 주장했다.

 

일자 코흐가 체포되었다는 기사

그녀는 재판 중에도 극적인 코미디를 연출했다. 일자가 경련을 일으키면서 간질병에 걸린 체했다. 그러나 후에 그녀의 감방에서 의사가 그녀를 검사했을 때 그녀는 웃으며 일급 코미디를 하면서 정말 즐거웠다고 말했다. 다카우의 재판에서 수감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된 그녀에 대한 고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태인 수감자의 피부를 발라내어 전등갓이나 지갑 혹은 책 겉표지를 만들었음.

친위대 의사 발데마르 호벤에게 '전수' 받은 기술로 유태인의 장기를 수집하였음.

유태인 수감자들 가운데 특유한, 희한하게 문신된 피부를 발라내어 수집.

유태인 수감자들에 대한 학대(승마용 채찍 끝에 면도날을 달아 수용소 내의 임산부에게도 채찍질을 함).

직접 유태인 수감자들의 머리를 축소시켜 '장식품' 을 제작(부헨발트 수용소가 해방된 직후2개가 발견)

유태인 수감자들을 일종의 색광 파티에 강제적으로 참석시켜 능욕함. 

 

재판 중 제시된 인피 자료

 

법정 밖에서 군중들이 일자를 즉각 처형하라고 요청했지만 법정은 무기징역을 선고하며 중노동을 부과했다. 그런데 1951미군의 루셔스 장군은 수감된 지 4년 만에 그녀를 계속 감금할 만한 증거가 충분하지 못하다며 증거 불충분을 내세워 석방했다.

 

일자 코흐의 재판

그녀가 석방된 이유는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는 자산이 그녀에게 있으므로 그녀를 살리는 것이 연합군에게 유리하다는 것이다. 다소 놀라운 이야기이지만 이 부분은 사실이다.

미국의 루셔스 장군이 제2차 세계대전 사상 가장 악독한 독일군 마녀라고 불리던 일자 코흐방면한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인체 실험 결과가 의학상 그 어느 연구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소 놀라운 이야기지만 나치의 생체실험미국 우주 계획의 일등공신으로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인류 최초의 우주 비행사는 구소련의 유리 가가린(Yurii Alekseevich Gagarin)으로 인정하는데 그는 1961년 지구 밖을 나갔다 생환했기 때문이다. 이후 미국과 구소련의 본격적인 우주 경쟁이 시작되었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우주여행은 독일의 악명 높은 포로수용소 다카우(Dachau)에서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

 

최초의 우주인은 어떤 종류의 우주 유영이나 비행 훈련도 받아보지 않았고 비행기도 타 보지 않은 유대인이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식료품 가게의 점원으로 건장한 체구를 갖고 있어 뽑혔는데 단지 ‘L'로만 알려진다. 1942년 어느 날 그는 강제수용소에 설치된 감압실로 들어갔다. 그는 실험실의 공기압이 대기권 밖의 수준으로 떨어지자 남은 생애의 마지막 몇 분을 엄청난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 보냈다. 마침내 그의 숨이 끊어졌을 때 그의 몸뚱아리는 과학자들의 면밀한 관찰을 받은 후 쓰레기 소각장에 던져졌다. L은 다른 생체 실험용 인간 모르모트에 불과했지만 최초의 우주인이라는 달갑지 않은 명예를 얻었다.

L의 감압실이란 특별한 환경에서 인체실험에 동원된 것은 당시 독일이 강력한 엔진을 장착하여 높은 고도에서도 작전을 펼칠 수 있는 항공기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조종사들의 적응이었다. 나치가 개발한 최신 비행기는 고도 50,000피트까지 올라가는데 이때 조종사들이 다양한 유형의 신체적 고통을 겪었다. 산소호흡기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 기기를 제대로 조종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독일공군연구소기압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는 탑승자용 차폐용 장치를 개발코자 했다.

독일의 기초 설계안1941년 이미 원숭이를 통해 성공했지만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필요했다. 다카우 수용소의 유대인들이 우주 개발을 위한 실험용 모르모트로 선정된 것은 이 때문이다. 당시 다카우 수용소에는 독일에서 가장 뛰어난 200여 명의 의사, 군의관, 임상병리학자, 미생물학자들이 있었다.

 

이 인체실험의 총 책임자가 우주의학의 아버지로 알려지는 위베르투스 스트럭홀트(Hubertus Strughold) 박사. 그는 우주생리학이 뭔지도 모를 때 미국의 우주 개척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학자들은 1950년대 미공군의 초음속기 개발아폴로 계획도 시작 자체가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스트럭홀트 박사가 혜성같이 등장한 것이다. 그 당시 각종 우주복, 여압복, 우주인들의 생리 상태 등에 대한 개념을 도입한 사람도 스트럭홀트 박사였다.

 

그런데 그의 이런 정보는 모두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의 결과. 그는 자신이 저지른 생체실험의 데이터를 모두 미국에 제공하는 대가로 면죄부를 받았다. 사실 그는 종전 후 국제군법재판소(The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에 전범으로 올라갔지만 그와 함께 생체 실험한 부하 과학자 수십 명은 모두 군법재판소에 전범으로 기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범 명단에서 빠진 후 곧바로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생리학교수로 부임했다.

 

미국의 처신은 비난받아야 하지만 우주계획 자체로만 보면 상당히 현명했다는 설명도 있다. 미국이 전후 독일과 일본 731부대의 이시이 시로 장군을 비롯하여 생체실험에 가담한 전범 과학자들과 뒷거래를 하여 그들의 정보를 토대로 결국 달을 정복했고 구소련과 벌인 우주 계획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루셔스 장군이 일자를 석방한 것은 루셔스와 일자가 타협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미군은 당시 나치의 잔악한 행동이지만 인체실험을 매우 중요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나치의 포로수용소가 아니라면 사람을 대상으로 의학실험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꼼꼼한 일자가 수용소에서 일어난 인체실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조건에 합의했다는 것이다. 일자가 비록 의사가 아니지만 그녀가 직접 수감자를 실험용으로 살해한 정황은 의료진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석방을 둘러싼 의혹을 잠재우는 정황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의 죄상과학자로서 생체 실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녀가 자행한 수많은 행동이 걸림돌인데 그녀의 석방으로 전 세계에서 항의가 일어나자 재건된 서독정부는 그녀를 체포하여 독일 법정에 회부했다.

그녀의 재판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 240명 이상의 목격자들이 그녀에 대해 증언했고 결국 감형되지 않는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61살이 된 1967, 일자는 감옥 교도관의 아이를 임신하여 출산한 후 자신이 낳은 아이인 아베에게 계속 편지를 썼다. 그녀는 자신이 나치당의 더 높은 계층을 위한 속죄양이 되었다고 불만을 털어놓으면서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후회도 슬픔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19679 아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 후 침대 위에 침대보를 매듭지어 목을 맸다. 그녀는 마지막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게 다른 길은 없다. 죽음만이 유일한 해방이다.’

 

참고문헌 :

http://blog.naver.com/eponine77/220126435204

http://cafe.naver.com/oktaesokkk/64895

http://cafe.naver.com/nuke928/31042

세상을 움직인 악, 미란다 트위스, 이마고, 2003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어니스트 볼크먼, 이마고, 2003

엽기세계사, 이성주, 추수밭,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