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The postman always rings twice)』라는 영화가 국내에 상영된 적이 있었다. 당시 이 영화를 수입한 회사에서 원래 생각하던 영화제목은 「우체부는 벨을 두 번 울린다」였다고 한다. 그런데 우편집배원들이 우체부라는 말이 직업을 비하한다고 항의하여 이렇게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postman’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던 영화제목이 뜻하는 것은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우편집배원이 벨을 눌렀을 때 응답이 없으면 적어도 한 번은 더 벨을 울린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우편집배원이 우편물을 반드시 수신자에게 전해주어야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수신자가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적어도 두 번을 준다는 의미도 있다.
일상생활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말 중의 하나가 ‘삼세번’이라는 단어가 아닌가 한다. 가위바위보나 어떤 내기를 했을 때 ‘삼세번’은 많은 사람이 결과에 수긍하도록 만드는 마술적 힘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일을 단 한 번으로 끝내지 않고 또 다시 기회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예가 인류의 과학사에도 나타났다.
X선이 뢴트겐에 의해 발견된 바로 다음해인 1896년에 앙리 베크렐(Henri Becquerel, 1852~1908)이 ‘방사선’을 발견하고 곧바로 퀴리 부부의 라듐 발견으로 ‘방사능’이란 단어가 태어났다.
인류사에 가장 큰 공헌을 한 발견이 거의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X선에 의해 과학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방사능 때문에 과학은 또 한 번의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를 얻은 것이다. 마치 누군가가 X선 하나만이 아니라 방사선도 함께 알려줌으로써 인류가 보다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듯 했다. 인간에게 그런 기회를 제공한 ‘포스트 맨’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인류의 발달사에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뢴트겐이 X선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들은 세계의 과학자들은 모두 놀라면서 그 현상을 재현하려고 했다. 파리에 있는 에콜 폴리테크닉의 물리학 교수였던 베크렐도 예외는 아니었다.
베크렐은 파리 태생으로 그의 아버지 에드몽은 태양의 복사나 인광을 연구한 물리학자였고 할아버지 세자르도 전기 분해법을 사용하여 광석으로부터 금속을 추출하는 방법을 연구한 과학자였다. 앙리 베크렐은 소위 집안 좋은 과학자 가족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는 할아버지 세자르가 파리의 자연사박물관의 물리학 교수이자 관장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박물관의 교수직은 일종의 세습직이므로 그의 아들 장까지 4대에 걸쳐 계승되었다. 교수직을 4대에 걸쳐 계승했다는 것은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다소 이례적인데 베크렐은 부모의 도움으로 교수가 된 것은 아니다. 베크렐이 당대의 최고의 천재학교로 알려진 에콜폴리테크니크에 입학했기 때문이다. 과거는 더욱 경쟁력이 심했는데 현재도 에콜폴리테크니크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0대 1이상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여하튼 베크렐은 부모의 지원에다 공부도 잘하여 1872년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했고, 1874년 토목학교에 들어가 1877년 토목기사, 1894년 토목국 수석기사가 되었다. 또 1878년부터는 박물관 연구원으로 일했으며 1888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2년 파리박물관의 응용물리학 교수, 1995년 에콜폴리테크니크 교수, 1889년 프랑스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베크렐은 형광과 인광 등을 내는 물질(형광 물질은 빛을 조사(照射)하면 빛을 내지만 어두운 곳으로 옮기면 이 형광은 없어진다. 반면에 인광 물질은 조사가 중단된 후에도 잠시 동안 빛을 낸다)이 동시에 X선도 방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이는 당대의 유명한 수학자인 포앙카레(Henri Poincare)가 1896년 1월 뢴트겐의 연구를 프랑스 과학지(Revue generale des Sciences)에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질문했는데 베크렐이 그 질문에 도전했다. 포앙카레는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형광을 충분히 강하게 방출하는 물질이라면 형광의 원인이 무엇이든 X선을 방출할 수 있지 않을까?’
베크렐은 포앙카레의 질문을 확인하기 위해 즉 우라늄 원자를 포함하고 있는 황산칼륨우라늄염(potassium uranyl sulfate)이라는 형광 물질이 X선을 포함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검은 종이로 싼 사진 건판 위에 황산칼륨우라늄염을 얹어 햇빛에 노출시켰다. 자외선이 황산칼륨우라늄염의 형광 물질을 들뜨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몇 시간 후에 종이를 펼치자 그가 예상했던 대로 건판이 검게 되어 있었다. 베크렐은 이 실험 결과를 토대로 음극선관을 사용하지 않고도 X선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 후 베크렐은 검은 종이로 사진 건판을 포장한 후 어두운 서랍 속에 우라늄염과 함께 넣어 두었다. 며칠 후 그가 다시 건판을 꺼내 보았을 때, 놀랍게도 건판은 전보다 심하게 감광되어 있었다. 이것은 빛을 쬐지 않더라도, 즉 형광이나 인광의 발광과는 관계없이, 우라늄염이 X선이 아닌 다른 방사선을 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물질에서 방출되는 방사선이 확인된 것이다. 그후 그는 이들 베크렐선이 기체를 이온화하고, 또 베크렐선 가운데 어떤 것이 전기장이나 자기장에 의하여 구부려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온화란 원자나 분자가 마이너스 전기를 지닌 전자를 방출 또는 받아들여 이온(전기를 띤 원자 또는 원자단)이 되는 것을 말한다. 또 전기장이나 자기장에 의해 구부려지는 것은 그들 베크렐선이 플러스 또는 마이너스 전기를 띤 입자임을 의미한다.
베크렐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우라늄에 의해 방출되는 방사선이 우라늄의 화학적 상태나 물리적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순수한 우라늄이 우라늄염보다 더 강한 방출 물질인 것으로 보아 우라늄 자체가 방사선의 근원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이 결과를 자신의 논문 「인광성 물질의 복사선 방출에 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geulmoe.quesais
‘특히 강조하고자 하는 다음의 사실은 기대할 수 있었던 현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며 따라서 대단히 중요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사진판 위에 같은 조건에서 놓여진 같은 인광성 조각은 어둠 속에서도 동일한 사진의 상을 만들어냈다. (중략) 내가 연구했던 우라늄염은 그것이 햇빛에 의해 인광성을 나타내는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혹은 응고나 주조에 의해 만든 것이든 용액 상태로 있든 모두 비슷한 결과를 나타냈다. 따라서 나는 이런 현상이 이들 염속에 있는 우라늄 원소 때문이며 순수한 우라늄은 염보다 훨씬 강한 효과를 나타낼 것으로 예측했다. 몇 주 전에 오랫동안 실험실에 놓여있던 우라늄 분말을 가지고 실험하여 이 예측이 맞다는 것을 확인했다. 우라늄 분말의 상은 우라늄 염을 가지고 만든 것보다 훨씬 뚜렷했다.’
이 당시만 해도 베크렐의 발견이 갖고 있는 엄청난 중요성을 알아차린 사람은 거의 없었다. 추후에 20세기 물리학의 길을 개척한 베크렐을 기념하여 지금도 방사능의 단위로 ‘베크렐’이 사용된다. 불안정한 원자핵이 방사선을 방출하여 매초 1회의 비율로 붕괴할 때 그것을 ‘1베크렐’의 방사능이라고 한다.
베크렐은 자신이 발견한 이상한 현상이 우라늄 광물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성질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그는 추후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새 방사선이 우라늄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더 큰 활성이 다른 물체에서 나타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물질에서도 이런 현상이 있는지를 찾는 것보다는 그 빛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물리학적 연구가 더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마리 퀴리 등장>
베크렐의 발견은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에 의해 그 진가가 발휘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리 퀴리는 1867년 11월 7일 바르샤바에서 블라디슬라브와 브로니슬라바 슬로도프스키의 다섯 자녀 중 막내로 마리 슬로도프스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몰락한 물리 교사였고 어머니는 기숙학교 교장이었다. 어머니는 마리가 열 살 때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어머니가 죽자 마리는 종교에 반감을 갖고 평생 무신론자였다.
당시 폴란드는 독립국이 아닌 러시아의 한 지방이었고 러시아는 폴란드 문화를 짓밟았다. 그러자 마리가 태어나기 4년 전인 1863년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실패로 돌아가면서 이후 폴란드의 고난은 극에 달한다. 당시 러시아는 모든 공적 활동에서 폴란드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그녀는 이러한 와중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김나지움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학과 성적이 뛰어났음에도 당시 폴란드에서는 여자가 고등 교육을 받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다. 결국 1883년 김나지움을 졸업하자 체제 전복을 꿈꾸는 여성해방론에 따르며 비밀리에 ‘이동대학교’에 관계했다.
1886년 18세가 된 마리는 언니 브로냐와 서로 약속을 했다. 마리가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우선 언니를 파리로 보내 학비를 보내주고 그 다음 브로냐가 자격을 갖추면 마리의 교육비를 대기로 한 것이다. 언니인 브로냐는 두 사람의 약속대로 파리에서 의사자격시험에 합격하고 폴란드 유학생 카디미르 도르스키와 결혼하자 마리가 파리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주선한다.
마침내 마리는 1891년 프랑스로 옮겨 와 파리 대학에서 입학 허가를 받고 1893년 여자로서는 처음이자 수석으로 소르본 대학에서 물리학 학위를 받는다. 1894년에는 2등으로 수학과를 졸업했다. 원래는 공부를 마치고 폴란드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고국을 잠시 방문했을 때 조국의 상황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고 프랑스로 돌아와 물리학자 가브리엘 리프만(Gabriel Lippmann)을 지도 교수로 박사과정을 시작한다. 리프만 교수는 컬러사진을 발명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하는데 그의 수상은 노벨상 수상 역사상 가장 졸작이라는 평을 받는다. 이때 8살 연상의 피에르 퀴리(Pierre Curie, 1859~1906)를 만난다.
피에르 퀴리는 원래 어려서부터 정통 과학교육을 받지는 않고 외과 의사였던 아버지로부터 개인적으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14세에 소르본 대학에 입학했고 4년 후에 물리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문제는 피에르의 학문적 배경이 엘리트 과학자 군단 소속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소르본 대학을 졸업했지만 그는 에콜노르말, 에콜폴리테크니크와 같은 프랑스의 천재대학교 즉 에콜(Ecole) 출신이 아니었다. 더구나 가정형편 때문에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형 자크 퀴리가 근무하던 고등물리화학연구소에서 실험실의 조교자리를 얻어 실험을 지도하는 한편 결정구조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마리는 피에르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자마자 곧 친해졌다. 조국은 달랐지만 그의 생각과 사고방식은 놀라우리만치 나와 닮은 점이 많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은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과학에 대한 열정에는 서로 공감했으나 피에르가 몇 번 만나자마자 갑자기 청혼하자 마리는 그의 청혼을 거절하고 방학을 핑계 삼아 폴란드로 돌아갔다.
그런데 피에르는 마리를 설득할 글재주가 있었다. 그는 평소와 다른 필치로 마리의 애국적자로서의 꿈과 과학자로서의 꿈을 두 사람이 합한다면 이룰 수 있다고 설득했다. 피에르의 편지는 마리를 납득시켰고 마리는 곧바로 폴란드를 떠나 파리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1895년 결혼식을 올렸고 신혼 여행 기간에 자전거를 타고 프랑스 지방을 여행했다. 두 사람은 결혼 후 파리의 글라시에르 거리에서 세간도 없는 아파트에서 살았다. 마리가 살림살이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97년 추후 노벨상을 받는 첫딸 이렌이 태어났다.
피에르 퀴리는 가난했지만 1880년 형 조제프와 함께 압전기(押電氣) 효과, 즉 어떻게 결정체가 압력을 받아 전기를 생산했는지를 발견했으며 자기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여러 온도에서의 자성체」는 현재도 매우 중요한 연구로 평가받는다. 디지털카메라의 버튼을 누르면 카메라의 렌즈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데 이를 움직이는 힘이 바로 압전 효과다. 피에르 형제는 이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전하량 단위의 극소량 물질을 측정할 수 있는 압전 저울을 개발했다. 또한 피에르는 결혼한 후 곧바로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한다. 자기장에 관한 것으로 자석이 자성을 잃는 온도 오늘날 ‘퀴리점’으로 불리는 온도가 존재함을 밝히는 탁월한 내용이다. 반면에 마리는 첫째 딸 이렌을 갖게 되자 박사논문 일정을 다소 뒤로 미룬다. 그것이 오히려 퀴리에게는 행운이었다.
1895년은 빌헬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하였고 곧바로 앙리 베크렐이 우라늄의 신비로운 성질을 발견했다. 1897년 베크렐은 자신이 우라늄 외에 다른 물체가 방사선을 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마리 퀴리에게 박사학위논문으로 자신의 연구를 계속하도록 권유했다. 마리는 1898년 초 최종적으로 베크렐의 발견을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로 결정하는데 마리가 결혼으로 박사논문을 뒤로 미룬 덕에 결국은 세계적인 학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마리는 남편 피에르와 함께 베크렐의 복사선을 연구하기로 결심했는데 이것이 결국 퀴리 부부의 인생을 극적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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