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 노벨상이 만든 세상/방사능

방사능이 만드는 세상(3) : 마리 퀴리

Que sais 2020. 10. 13.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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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12 뢴트겐이 발견한 X1896년 초 베크렐이 발견한 우라늄의 방사선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렸다. 일반 대중은 뢴트겐이 X을 이용해 촬영한 손의 골격 사진을 보고 열광한 반면 그보다 미약한 우라늄 방사선은 거의 무시했다. 하지만 마리 퀴리베크렐의 우라늄 방사선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실험에 매진했다. 당시 마리가 선택한 방법은 방사선의 영향을 직접 보여주는 사진 건판이 아니라 방사선의 강도를 측정할 수 있는 전류측정기를 사용한 것이다. 그녀는 연구로 인한 과실보다는 탐구적인 현상을 밝히는데 주력했다. 당연히 연구에 따른 고통이 따랐는데 마리는 이런 글을 남기기도 했다.

 

어느 때는 온종일 내 키와 크기가 비슷한 무거운 쇠막대를 가지고 가서 열 비등 장치를 젓는 일을 계속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피곤에 지쳐 부서질 것만 같았다.’

 

여하튼 마리의 수상 경력은 그야말로 신화적이다. 마리19036월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1영국 런던 왕립학회에서 주는 데이비 메달을 받았고 12에는 피에르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다. 마리박사학위를 받은 뒤 겨우 6개월 만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노벨상을 받는 신기록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했지만 마리의 노벨상 수상은 계속하여 구설수가 따라다녔다. 베크렐방사능을 발견한 것과는 달리 퀴리 부부무거운 광석불로 용융하여 불순물을 분리해내는 육체적인 노동에 불과하므로 노벨상 수상 업적으로는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현대에 살고 있는 과학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의 연구가 노벨상에 걸 맞는 지적 활동은 찾아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라늄 원광(피치블렌드)에 미량으로 혼재되어 있는 폴로늄이나 라듐을 단리하기 위해서는 아직 분리되어 있지 않은 폴로늄이나 라듐과 광석과의 성질의 차이를 발견하고 그 성질의 차이를 이용하여 각자를 분리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 당시로서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또한 분리 작업 중에 폴로늄이나 라듐이 예상만큼 농축되어 있는가를 알기 위해 폴로늄과 라듐의 양쉽게 측정하는 방법도 고안해야 했다. 실제로 그 어느 것이나 미지의 문제였지만 퀴리 부부는 그러한 과제를 하나하나 해결해 낸 것이다.

 

라듐우라늄 원광에 중량으로 보아 1백만 분의 1이라는 극소량만이 들어 있으므로 그것을 확인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퀴리 부부의 노벨 물리학상은 우연의 산물이 아닌 것이다.

방사능원자핵이 불안정할 때 생긴다. 불안정한 원자핵방사능 붕괴를 통해 보다 안정된 원자핵이 되는데 원자핵방사성 붕괴할 때마다 다양한 유형의 복사선이나 입자가 방출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라늄 원자핵불안정하므로 토륨으로 붕괴된다. 토륨프로탁티늄으로 붕괴되며 계속하여 안정된 원소으로 붕괴되기까지 14단계를 거친다. 라듐과 폴로늄은 이 방사성 붕괴 계열의 중간에 있는 것이다.

 

1903년 영국의 화학자 프레데릭 소디(Frederick Soddy)는 이 신비한 에너지가 얼마나 막강한지를 다음과 같이 추산하여 적었다.

 

1그램의 라듐붕괴하는 동안 방출되는 총 에너지는 적어도 108그램칼로리 이상으로 1091010그램칼로리의 사이일 것이다. 방사능 변화에 따른 에너지2만 배에서 100만 배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분자 변화에 따른 에너지에 맞먹는다.’

 

1년 후 소디라듐 사용을 주제로 한 토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극도로 옹줄한 성격의 소유자가 이만한 에너지를 방출하는 무기를 손에 넣은 후 마침내 레버를 당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무기를 사용하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지구도 박살날 수 있을 겁니다.’

 

소디가 막상 그런 말을 했지만 불과 40년이 지나 그러한 무기가 개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발사 레바가 올라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피에르노벨상 수상식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라듐이 범죄자의 수중에 들어간다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던져질 것입니다. 자연의 비밀을 아는 것이 인류에게 유익한가, 자연의 힘선용할 만큼 인류가 성숙한가, 또는 그 지식이 전혀 해롭지 않다고 밝혀질 것인가?

 

피에르 퀴리의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는 각자의 몫이지만 베크렐과 퀴리 부부에 의해 방사선이 발견됨으로써 원자야말로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이며 어떤 방법으로도 쪼갤 수 없다는 당시 과학자들의 믿음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그들이 발견한 방사선은 극히 미세한 물질입자를 포함하고 있고 그것은 원자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원자보다도 더 작은 입자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퀴리부부는 하룻밤 사이에 너무나 유명해졌지만 1906 피에르파리 퐁뇌프 다리에서 짐마차와 부딪혀 사망한다. 당시 피에르마흔 일곱, 마리서른아홉이었다. 당시 퀴리 부인이 쓴 일기그리움으로 가득하다. 마리남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그는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단호하게 몰두했고, 인격과 재능만을 도구로 삼아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가며 인류에 봉사한 사람이다. 그는 과학과 이성만이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기에 진리 탐구에 삶을 바쳤다.’

 

마리는 충격에 빠졌지만 1908년 피에르가 맡고 있던 소르본 대학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소르본 대학 최초의 여교수였다. 처음 강의하는 날 아침 피에르의 무덤에 다녀온 다음 강의를 시작했다. 특히 1910은 그녀에게 가장 기념비적인 해로 무려 1000페이지에 달하는 방사능에 관한 불멸의 역작인 종합교과서 방사능론(Treatise on Radioactivity)을 발간했다.

그런데 마리에게 개인적인 문제로 계속 구설수가 따라 다녔다. 1911년 한 일간지가 남편이 사망한지 단 5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마리폴 랑주뱅(Paul Langevin)과 간통했다고 비난했다. 랑주뱅퀴리 부부의 실험실에서 연구하던 피에르의 동기 과학자로 퀴리부부와 정치적 사회적 의견에 동감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1차세계대전피에르가 도출한 압전 효과를 응용해 초음파 기술개발하기도 했다. 마리 퀴리노벨상을 받은 여성인데다 정치적으로 좌파 성향을 갖고 있고 특히 폴란드 태생의 유태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스캔들은 더 악화되었다.

그러나 마리는 주위의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연구에 굳굳이 정진했는데 놀랍게도 수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1911다시 노벨상을 수상한다. 새로 발견된 원소들의 화학적 성질을 밝혀낸 공로로 이번에는 단독 수상이다.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그녀는 방사성의 발견에 대한 우선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단호히 밝혔다.

 

그 물질을 발견하고 추출하기까지의 역사가 내가 세운 가설을 입증해 주었다. 방사성이란 물질의 원자 수준의 성질이며, 방사성에 의해 새로운 원소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11마리에게 매우 중요한 해이다. 1911년 제1차 솔베이 회의가 열렸는데 여기서 마리아인슈타인을 만난다. 아인슈타인에 호감을 느낀 마리는 아인슈타인스위스의 취리히대학교에 교수로 취직할 때 추천장을 써주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마리는 적극적인 행동을 주저하지 않았다. 마리야전병원에 반드시 있어야 할 방사선 의료기구가 없는 것에 매우 분개한 후 개인적으로 X선 장치를 갖춘 자동차를 직접 설계하고 기금을 모금하면서 의료봉사대조직하여 차를 직접 몰고 전선을 누볐다. 전쟁이 끝난 후 퀴리18대의 차량을 갖출 수 있었는데 이들 차량은 리틀 퀴리라 불렸다. 이때 조수로 당시 18살의 딸 이렌느를 함께 데리고 다녔는데 그녀는 1934년 최초로 인공방사능을 발견하여 1935년 남편인 졸리오와 함께 노벨화학상을 수상한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마리의 실험실은 곧바로 라듐 연구의 세계적인 메카가 되었다. 파리대학교와 파스퇴르 연구소가 공동으로 파리에 설립한 라듐연구소의 소장으로 취임했고 폴란드에서도 1913년 마리의 업적을 기려 바르샤바방사선치료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학문적인 좌절은 있었다. 1911과학아카데미 입회거부당한 것이다. 그녀가 과학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지 못한 이유는 그녀의 연구가 전적으로 피에르 퀴리의 것이라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피에르 퀴리사망한 후 폴 랑주뱅과의 간통사건 때문에 품위를 손상했다는 것과 폴란드라는 약소국 출신인데다가 유태인이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물론 그녀는 1927년 프랑스 의학 아카데미의 첫 번째 여성 회원이 되었다. 또한 프랑스 의회1923 그녀에게 평생 동안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만병통치약으로 변한 메가톤급>

라듐이 발견된 초창기에 라듐에 대한 열풍은 그야말로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당시에 라듐보석의 색깔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고 산소를 치료효과가 있는 오존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물론 산소와 수소로 분리해줄 수 있다고 알려졌다. 더구나 라듐으로 원하는 만큼의 금을 생산해 낼 수 있으며 나병이나 매독 같은 질병들도 치료할 수 있다고 선전되었다. 심지어는 망막에만 결함이 없다면 장님들도 다시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소문도 따라 다녔다.

이와 같은 기적의 물질마법의 물질을 어떠한 가격을 들여서라도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폭주하자 1902년 라듐 1그램의 가격15,000마르크였는데 3년 뒤에는 10배로 뛰어 올랐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이후 3개월 사이에 15만 마르크에서 25만 마르크로 뛰어 오르기도 했는데 사실상 힘들이지 않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꾼들에게 라듐 사업은 수지맞는 장사였다.

라듐의 가격이 폭등하자 마리 퀴리에게 역청우라늄을 공급한 요아힘스탈 광산은 파산의 위기에서 오랜 기간 동안 라듐 최대생산지의 지위를 누렸다. 이후 미국과 콩고 특히 카탕카 지방(오늘날 샤바)에서 다량의 우라늄이 발견되자 라듐을 취급하는 회사들도 속속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서로 가격으로 다투더니 방사능 물질을 그들끼리 독점하자고 협의한 후 라듐가격1그램당 무려 75만 마르크까지 제시하기도 했다.

라듐건강에 해를 끼친다는 것곧바로 관찰되었다. 베크렐마리 퀴리가 추출한 라듐을 며칠 동안 조끼 주머니에 넣고 다녔는데 이 라듐 때문유두 바로 옆에 궤양이 생겼다. 이 상처는 여러 달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았는데 1908 베크렐사망한 요인을 이 때문으로 추정한다.

톰슨의 수많은 업적은 다 방면에 호기심을 갖고 이를 자신이 직접 연구하려는 자세에서 얻어졌다고 인식되는데 뢴트겐X선을 발견하자마자 그는 곧바로 놀라운 의문을 제기한다.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X인체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이다. X의 긍정적인 면만 아니라 존재할지도 모르는 부작용에 대해도 알아야 한다며 곧바로 직접 실험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 하나수일간 X선을 쬐었는데 몇 주일 후에 화상과 같은 현상을 관찰했다.

당대의 학자들도 X선의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도 파악해야 한다는데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여하튼 베크렐의 이야기를 듣고 피에르 퀴리도 검증하기 위해 직접 자신의 팔뚝소량의 라듐을 한참 동안 올려 놓았다가 라듐을 내려놓고 반응을 관찰했다. 놀랍게도 몇 시간 후에 붉은 반점이 생기고 4일 후 수포가 생기고 5일 때에 궤양으로 전이되더니 쉽게 치료되지 않았다. 라듐을 놓았던 자리만 화상을 입은 것처럼 빨갛게 변했는데 그리 아프지는 않았으나 빨갛게 변한 곳에는 상처가 생겼다. 상처는 점차 심해저 두 달 정도가 지나서야 겨우 아물로 딱지가 떨어졌으나 흉터가 남았다.

라듐의 영향이 생각보다 빠르며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학자들이 에게 라듐방사실험을 하자 쥐들은 마비 증세를 보이다가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다. 그러나 톰슨과 마찬가지로 과학자들은 방사선의 그러한 장해를 중대한 문제로 보지 않고 참을 만한 정도의 직업병으로 이해했지만 이들 실험은 의학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얼마후 의학계에서는 라듐병든 세포를 파괴하여 종양이나 악성 병의 치료에 매우 유옹하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것이 유명한 퀴리요법이다.

 

엄밀한 의미로 볼 때 라듐의 광풍은 바로 라듐으로 상당히 많은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라듐에 의한 부작용은 라듐으로 인한 긍정적인 효과로 인해 완전히 무시되었다. 추후에 알려졌지만 퀴리가 라듐 발견시 사용한 우라늄의 산지인 보헤미아 지방의 광산에서 광부들의 폐암 발생률이 특히 높다는 기록도 방사능 장해의 하나로 생각되지만 방사선이 양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상당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