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 노벨상이 만든 세상/아인슈타인

노벨상 딱 한 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

Que sais 2020. 10. 19.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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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만약 우주에 출발점이 없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우주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는가하는 의문점을 가졌다. 그는 이 해결책으로 어떤 우주의 사건에 관련된 관성좌표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관성좌표계가 꼭 지구여야 할 필요는 없다. 태양 또는 그 어떤 구역 중에서 가장 편리한 것을 선택하면 된다.

예를 들어 행성의 운동을 기술할 때는 지구 중심의 관성좌표계보다는 태양 중심의 관성좌표계가 훨씬 편하다. 따라서 공간과 시간의 측정은 주어진 관성좌표계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 되며 이러한 이유로 아인슈타인의 이론상대성이론이라고 한다. 갈릴레이아인슈타인이 사용하는 상대성이란 은 똑같지만 의미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라는 말을 보다 쉽게 설명한다면 사람은 고래보다 작다. 그러나 사람은 개미보다 훨씬 크다. 그렇다면 사람은 큰 것인지 작은 것인지 누가 알 수 있을까? 개미가 보면 사람은 엄청나게 크지만 고래가 보면 사람은 매우 작다. 그렇다고 사람의 키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누가 사람을 보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키를 평가하는 것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안트워프 걸리버 동상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서 걸리버난쟁이 나라 릴리풋에 도착한다. 그런데 걸리버릴리풋 사람들을 난쟁이라고 생각하고 릴리풋 사람들은 걸리버거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만약 릴리풋 사람들이 걸리버에게 난쟁이로 보이면서 걸리버릴리풋 사람들에게 난쟁이로 보인다면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그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성이론이 인간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간들에게 각인시켰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절대적인 지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러한 극적인 상황은 인간들이 평소에 생각하지 못하는 거대한 우주 분야까지 펼쳐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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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도록 이면 학교에 돌아오지 말아라>

아무리 과학에 문외한이라고 하더라도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을 모른다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애니메이션이나 SF영화에 나오는 천재 과학자들의 얼굴은 대부분 아인슈타인을 모델로 하고 있다. 타임머신을 주제로 공전의 흥행에 성공한 영화 백 투 더 퓨처시리즈의 천재과학자 브라운 박사 아인슈타인을 모델로 했음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영화 '백 투 더 퓨처'(1985) 천재과학자 브라운 박사

사실 지구 상에 태어난 사람 중에서 아인슈타인처럼 문화적인 상징인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젊은 시절 그는 물리학계공간과 시간, 그리고 중력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 만년에는 그의 외모와 인간성엉겅퀴같이 헝클어진 머리 모양, 침팬지를 닮은 슬픈 표정, 평화주의와 단순함으로 인해 인자한 과학 천재의 전형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그는 자신에 자서 자서전, Autographical Notes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뉴턴, 나를 용서하시오. 당신은 가장 고결한 사고와 창조력을 지닌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건 당신의 시대에 국한된 일입니다.’

 

세상에서 누가 이와 같이 뉴턴에 대해 당당한 글을 쓸 수 있을까. ‘만유인력이란 단어를 만들어 준 뉴턴이 발견한 것은 정말로 대단한 것이다. 그는 순전히 혼자의 힘으로 우주 전체에 작용하는 어떤 요소를 설명할 수 있는 체계를 세움으로써 근대과학을 열었다. 더구나 수학기초해 마련한 이론구체적인 실험을 통해 확증한 사람도 그가 처음이었다. 문제는 뉴턴이 우주의 모든 것을 규명할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뉴턴의 만유인력이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과학적인 개가임은 분명하지만 뉴턴의 이론은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학자들은 뉴턴의 이론만물의 현상에 적용하려했지만 잘 맞지 않는 것을 알고 뉴턴의 이론에도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밝혀낼 수는 없었다. 바로 아인슈타인이 등장하게 되는 필요충분조건이 준비된 것으로 오직 그 만이 세계의 패러다임을 바꾼 위대한 10대 발견 중에서 두 개가 선정된 이유라고도 볼 수 있다.

헤르만 아인슈타인(1847~1902)

아인슈타인1879314 독일의 시바아벤 지방울름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울름에는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160미터의 탑이 있었다. 그러나 이 탑과 아인슈타인의 집2차 세계대전연합군의 폭격으로 모두 부셔지고 말았다. 아버지 헤르만발전기와 아아크 등을 만드는 조그마한 공장을 경영하고 있었고 어머니 파우리네피아노를 잘 쳤다.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운 아인슈타인은 훗날 전문연주가에게도 뒤지지 않는 솜씨를 지니게 되었고 일생 동안 바이올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인류에게 다행한 것은 바이올린 연주보다 물리학의 재능이 더 뛰어났다는 점이다).

아인슈타인에게 위대한 인물이 될 운명을 타고 났다는 징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어머니파우리네는 아이의 지나치게 큰 머리통을 보고 처음에는 아이가 기형아인 줄 알았을 정도였다.

아인슈타인 어린시절

두 살 반이 되도록 아인슈타인말을 못했다. 마침내 말을 배웠을 때는 뭐든지 두 번씩 말했다. 또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법을 몰랐다. 그는 어린 시절 주로 혼자 놀았고 기계작동으로 움직이는 장난감을 무척 좋아했다.

다섯 살 무렵 아버지가 보여 준 나침반을 보고 아인슈타인은 언제나 북쪽을 가리키고 있는 것에 감동을 느끼고 이 체험이 나중에까지 남는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고 술회했다. 어릴 때의 아인슈타인혼자 놀기를 좋아하여 친구들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아인슈타인 소년시절

7초등학교에 입학하였지만 다른 어린아이와는 달리 사물을 차분히 생각하는 성격이어서 수학 문제를 선생이 질문해도 그 자리에서 대답하지 않거나 한참 뜸을 들이는 버릇이 있었다. 만년에 아인슈타인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완전한 문장으로 말하려는 욕심이 있어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조용히 혼잣말로 연습을 했다고 말했다.

열 살이 되어 뮌헨에 있는 김나지움(중고등학교)에 들어갈 때에도 말이 서툴렀고 공부에 열을 올리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열등생은 아니었다. 그는 특히 라틴어를 싫어했다. 외기를 싫어하는 아인슈타인라틴어공부는 싫어했지만 수학이나 과학 공부에는 딴 사람처럼 열심이었다.

1894 그의 가족이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이사했지만 아인슈타인김나지움졸업하기 위해 혼자 뮌헨에 남았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수업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자 6개월 간의 휴학원을 제출한다. 그가 휴학원을 제출하자 라틴어 선생은 반기면서 말했다.

 

"가능하면 6개월이 지난 후에도 학교에 돌아오지 말아라. 너는 반에서 언제나 외톨이인데다가 다른 학생과 어울리려고도 하지 않아. 예습도 복습도 하지 않으므로 너 같은 학생이 있으면 반 전체의 분위기가 흐려져서 못쓰게 되거든.”

 

그러나 수학 선생아인슈타인의 수학 실력이 출중하다는 증명서를 써주었다. 그는 1895년 스위스의 취리히에 있는 연방공과대학(ETH)입학시험에 응시했다. 독일식 이름으로 이티에이치로 더욱 유명한 공과대학은 입학하는데 반드시 고등학교 졸업장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입학할 때 어려운 시험에 통과해야 했다.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는 아인슈타인은 보통 학생들보다 한 살 반이나 어린 만 열여섯 살 육개월 때인데다가 언어와 관련된 일부 시험 과목을 공부하지 않아 낙방한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수학과목에서 천부적인 자질을 보였지만 어학과 역사의 성적이 낮아 불합격이 되자 아인슈타인을 그대로 낙방시키는 것이 아까운 일이라며 학장엘빈 헤어토크는 선생들을 설득하여 조건부 입학을 허락했다. 아인슈타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았으므로 1년만 더 고등학교에서 수업하고 졸업 자격증만 갖고 오면 소위 특례 입학을 시켜주겠다는 것이다. 그는 연방공과대학의 입학 자격을 얻기 위해 스위스 아라우에 있는 주립학교에 다녔다.

이 때 16세인 그는 하나의 의문을 떠올렸다.

 

만일 사람이 빛을 그 뒤에서 같은 속도로 뒤쫓아 가면 어떻게 될까?

 

이 의문은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최초의 사고 실험이며 그것이 나중에 특수상대성이론으로 이어진다. 특수상대성이론이 완성된 것은 이 의문을 품은 지 10년 후의 일이다.

아인슈타인을 줄곧 따라다니는 이야기는 김나지움에서 낙제생이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형편없는 성적표를 받은 학생들에게 수 세대에 걸쳐 위안을 주었지만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이와 같은 오해가 생긴 것은 아인슈타인아르가우 학교에서 1886학교의 성적 시스템을 거꾸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6’등급은 이전에는 최하 등급이었지만 이제 최상급이 되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6등급 중에서 4.91등급을 얻어 상당히 좋은 성적이다. ‘1’ 등급은 이전에는 최고 등급이었지만 이제는 최하 등급이 되었다. 아인슈타인의 성적표를 보면 그가 ‘1’ 등급 근처의 성적을 얻은 적이 한 번도 없음을 알 수 있다. ‘1’ 등급새로운 성적 시스템에서는 낙제를 의미한다. 적어도 아인슈타인이 모든 과목에서 우등생은 아니었지만 낙제생이었다는 누명은 벗겨주어야 할 것이다.

 

<독학으로 공부>

헤르만 민코프스키 (1864~1909) 출처 위키백과

아라우에서 대학의 수험 자격을 얻은 그는 1886년 연방공과대학입학했다. 대학에서는 헤르만 민코프스키(18641909) 교수수학 강의아인슈타인이 흥미를 느낀 것도 몇 가지 있었지만 강의 대부분이 고전적이라 수업에 별로 출석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친구인 마르셀 그로스만(18781936)의 노트에 의존하여 공부했다고 술회했는데 그로스만은 나중에 수학자가 되어 일반 상대성이론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아인슈타인의 연구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1838~1879) 출처 나무위키

대학 강의에는 별로 출석하지 않았지만 아인슈타인은 당시의 최첨단 분야였던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18381879) 전자기학독학으로 공부했다. 종래의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에른스트 마흐(18381916)의 역학에 대한 책을 읽었다.

연방공과대학의 수업은 매우 자유로워 4년 동안 시험도 두 번밖에 없었으므로 시험을 보기 전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었고 아인슈타인은 최대한 그런 자유에 만족했다. 아인슈타인의무적이고 강압적인 연구의 효과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현대 교육의 강압적 방법이 탐구에 관한 신성한 호기심좌절시키지 않았다는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과학자가 될 예민하고 작은 묘목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자유가 없다면 그들은 시들어 말라 죽을 것이다. 강압적이고 의무적인 교육으로 관찰하고 탐구하는 즐거움이 촉진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실수.’

 

물론 이런 생각이 어느 정도 옳기는 하다. 그러나 갈릴레오나 아인슈타인처럼 뛰어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일 수도 있다. 사실 물리학고도의 수학을 사용하는 학문이므로 아인슈타인처럼 스스로 터득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리학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선생님의 지도와 의무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공부하는 과정에서 길을 잃고 헤맬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런 행동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평판은 상당히 나빴다. 예를 들어 전기공학 분야의 권위자였던 웨버 교수에게 프로페서(교수님)이라고 불러야 하는데도 헤르()라고 불러 노여움을 샀다.

대학 강의에는 별로 출석하지 않았지만 아인슈타인은 당시의 최첨단 분야였던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18381879)전자기학독학으로 공부했다. 또한 헤르만 민코프스키(18641909) 교수수학 강의아인슈타인이 흥미를 느꼈으며 특히 물리 실험실에는 항상 참석하였다.

그러나 강의 대부분이 고전적이라 다른 수업에 별로 출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인슈타인은 친구인 마르셀 그로스만(18781936)의 노트에 의존하여 공부했다고 술회했는데 그로스만은 나중에 수학자가 되어 일반 상대성이론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아인슈타인의 연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또 종래의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에른스트 마흐(18381916)의 역학에 대한 책을 읽었다. 아인슈타인은 대학시절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감사의 표시를 했다.

 

내가 한창 배울 시기에 훌륭한 교수를 만난 것은 나에게 크나 큰 행복이었으며 감사한 마음 금할 수 없다.

에른스트 마흐 (1838~1916) 출처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