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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웰의 전설>
아인슈타인은 거의 독학으로 오랜 동안 별개의 현상인 것으로 생각되었던 전기와 자기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에 관심을 기우린다. 전기와 자기에 대해서는 19세기 초로 앙드레 마리 앙페르(1775~1836)와 마이클 패러데이(1791~1867) 등의 연구에 의해서 많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중에서 가장 탁월한 이론을 제시한 사람은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 1879)이다. 특히 맥스웰은 전자기 현상과 관련된 모든 것을 수식으로 표현하는 ‘맥스웰 방정식’을 1864년에 발표했다. 맥스웰의 방정식이 뜻하는 것은 간단하게 말하여 빛도 전자기장의 일부이며 폭이 넓은 스펙트럼 가운데 눈에 보이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맥스웰은 1831년 6월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변호사 존 클라크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직후 아버지가 커크커드브라이트셔에 있는 글렌레이의 맥스웰 가문의 영지를 상속받아 그곳에서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철저한 기독교인인 어머니가 여덟 살에 사망했지만 그녀의 영향으로 그는 평생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아버지는 그를 1841년 에든버러 학교에 입학시켰는데 학교에서 그의 재능은 그리 두드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다소 수줍음을 타고 친구도 별로 없었으므로 동료들은 그를 ‘얼간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14살 때 갑자기 그는 명석함을 드러냈다. 그는 실 한 가닥으로 수학 곡선을 그리는 방법을 설명하는 복잡한 논문을 썼다. 그의 생각이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14살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능력이었다.
16살 때인 1847년 맥스웰은 에든버러 대학교에 입학했고 에딘버러 왕립학회지에 두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1850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해 수학을 배웠는데 동기생인 윌리엄 톰슨(후에 켈빈 경)은 맥스웰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맥스웰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것은 그의 말보다는 성격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주제를 말하다 다른 주제로 빨리 화제를 바꾸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기 힘들었다. 특히 그의 생기 넘치는 상상력은 너무나 많은 화제를 만들어 하나가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것을 쫓았기 때문이다.’
1854년 우등으로 졸업하자마자 맥스웰은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발리지의 연구원이 되었고 1856년 에버딘에 있는 매리셜 칼리지의 자연철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가 교수로 임명되자 마자인 1857년 케임브리지대학교가 영국에 있는 젊은 연구자를 대상으로 수여하는 에덤스상의 주제가 토성 고리의 운동이라는 것을 알고 응모했다. 그는 토성의 고리가 완전히 고체 혹은 액체 상태가 아니라 수많은 작은 고체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을 때만 안정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에담스상을 받았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은 그의 연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수학을 훌륭하게 물리학에 적용시킨 연구다.’
맥스웰의 결론은 우주탐사선 보이저 1호가 1981년 토성 고리를 근접 촬영함으로써 증명되었다. 1860년 맥스웰은 런던 킹스 칼리지로 옮겼고 이곳에서 그의 일생에서 가장 값진 전자기에 대한 연구를 한다.
당대의 슈퍼스타인 패러데이는 철사가 자기장 안에서 움직이면 철사를 따라 전류가 흐른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자기가 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전자기 유도라고 알려진 이 효과는 발전기의 기본 원리다. 패러데이는 이들 간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를 완성하지 못했는데 이에 도전한 사람이 맥스웰이다. 그는 곧바로 전기와 자기는 동일한 현상 즉 전자기가 두 가지로 표현 된 것임을 알았다. 그는 간단한 전류에서 서로 교차하는 전파와 자기파를 만들어 냄으로써 이를 증명했다. 맥스웰의 위대성은 이것을 네 개가 서로 연관된 방정식으로 표현했다. 이를 맥스웰 방정식이라고 부른다.
맥스웰 방정식은 전파와 자기파가 빛의 속도에 아주 근접한 속도로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를 통해 그는 놀라운 통찰력을 보였다. 빛 자체가 일종의 전자기파라는 것이다. 그가 빛과 전자기를 연결시킨 것이야말로 물리학 역사에서 이정표나 다름없다. 또한 그는 서로 다른 파장을 가진 다른 형태의 전자기파도 존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맥스웰의 가설은 많은 학자들로부터 경원을 받았으나 맥스웰이 사망하고 8년이 지난 1887년에 독일의 물리학자 헨리크 루돌프 헤르츠(1857~1894)가 맥스웰의 이론을 실험으로 증명했다. 그는 실험을 통해 우리가 눈으로 감지할 수 있는 가시광선 외에도 수많은 전자기파가 우리들이 살고 있는 공간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빛의 속도는 초속 약 30만 킬로미터였다.
그의 전자기, 기체 분자 운동, 삼색설 이론, 천체 물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그의 업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전자기 분야로 학자들은 그의 기여가 현대 문명의 기초를 놓았다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노벨상 수상자인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류의 역사를 길게 보면 즉 1만 년 후에 보면 19세기에 가장 중요한 사건은 맥스웰이 전기 역학의 법칙들을 발견한 것이다.’
파인만이 극찬했지만 맥스웰은 뉴턴이나 아인슈타인만큼 친숙하지는 않다.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의 연구로 유명해지기도 전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중과는 다소 거리가 먼 맥스웰이지만 1860년 자신의 연구 즉 과학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우리는 과학의 스승들이 발견해 낸 것을 끝까지 파고들면서 그들을 고무시키고 그들에서 생기를 불어넣었던 지식에 도달하는 똑같은 기쁨과 알고자 하는 똑같은 욕구를 어느 정도는 경험해야 한다.’
<에테르는 존재하지 않는다>
맥스웰과 함께 아인슈타인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마흐의 책이다. 당시에는 뉴턴의 관성법칙이 절대적인 법칙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마흐는 그러한 뉴턴의 사고 방식을 비판했다. 마흐는 과학(특히 물리학)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골라내는 작업에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특히 그는 경험적으로 검증 불가능한 이론적 언술을 과학에서 수용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여 보통 실증주의자라고 불린다. 또한 종종 외부 세계에 대한 감각 경험과 측정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도구주의자, 경험론자라고도 불린다.
마흐의 비판의 칼날은 뉴턴에까지 미쳤다. 그는 뉴턴이 주장한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을 부정했다. 또한 물질의 관성질량은 물체의 고유한 성질이 아니라 그 물체와 우주의 다른 모든 물체의 연관에서 비롯되는 양이라고 주장했다. 바로 이러한 마흐의 대담한 주장은 아인슈타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은 마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흐는 뉴턴의 사고 방식이 물리학의 최종적인 기반이라는 신앙을 뒤흔들고, 학생이었던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물론 아인슈타인이 마흐의 주장을 수용하기는 했지만 마흐처럼 모든 이론에 대해 의심하지는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모든 이론을 거부하는 마흐의 인식론을 ‘구태의연한 것’으로 간주했는데 마흐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이 상대성 이론의 원조로 간주되는 데도 상당한 불쾌감을 표시했고 상대성이론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을 쓰겠다고 호언했지만 이 비판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흐는 추후 독일 물리학계의 거장이 되는 막스 플랑크와도 논쟁을 벌여 ‘아직 참인지 아닌지 모르는 복잡한 과학 이론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필요는 없다’ 말해 플랑크를 발끈하게 만들기도 했다.
맥스웰에 의해 빛이 전자기파의 일종으로 파(파동)처럼 전파되는 것으로 생각되자 곧바로 의문점이 제기된다. 파동이란 충격이나 진동이 주위로 전달되어 가는 현상이다. 음파는 공기를 매개로 전달되고 바다의 파도는 물을 매개로 전달해나간다. 공기나 물처럼 파동에는 그것을 전달시키는 역할을 하는 물질이 필요하다. 빛이 파동이라면 빛의 파동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물질이 존재해야 하며 이러한 가상의 물질을 ‘에테르’라고 불렀다.
아인슈타인도 적어도 1901년까지는 에테르의 존재를 믿고 있었다.
그는 학생일 무렵, 에테르의 존재를 증명할 실험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하튼 당시 과학계의 화두는 에테르(ether)의 존재였다. 에테르는 눈에 보이지도 않으면서 질량과 마찰도 없고 안정되어 있는데 우주에 이들이 존재하느냐 아니냐가 화제였다. 지구는 말하자면 광대한 에테르의 바다 속에 잠겨 진 잠수함처럼 에테르를 가로질러서 태양 주위의 공전운동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에테르가 존재한다면 역시 이상한 의문점이 제기된다. 맥스웰의 이론에 따르면 빛은 횡파(매질의 진동 방향이 파의 진행방향과 수직인 것(가로파))였다. 횡파는 고체와 같은 단단한 물질 안에서 밖에는 전달되지 않는다. 더욱이 횡파의 전달 속도는 그 고체가 단단할수록 빨라지는 성질이 있다. 광속은 매우 빠르므로 에테르가 매우 단단한 것이 되어야 하는데 어느 누구도 그것을 느낄 수 없다. 어딘가 이상한 점은 있지만 그래도 빛이 파동으로 되어 있다는 관점을 받아들이기 위해 에테르는 존재해야 한다고 믿었다. 한 마디로 에테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이제까지 알려진 적이 없는 새로운 종류의 물질이어야 했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 우주 공간에도 에테르가 충만해 있다면 지구는 에테르 속을 운동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지구는 주위의 에테르를 질질 끌면서 진행하고 있는가 아니면 에테르가 완전히 정지하고 있는 공간 속을 지구가 나아가고 있는가 라는 에테르에 대한 논란의 끝이 없었다.
만일 에테르가 존재한다면 그 존재를 알아낼 실험 장치를 고안해야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러한 측정이 단순한 일이 아님을 누구나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사를 보면 이렇게 어렵고 고난에 찬 업무를 자청하는 사람이 꼭 나타나기 마련이다.
피조(Armand Hippolyte Fizeau)는 관에 물을 흐르게 하고 이 물이 흐르는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진행하는 빛과 반대 방향으로 진행하는 빛과의 속도를 조사했다. 만약 에테르가 존재한다면 물의 흐름의 속도를 더하거나 뺀 분량만큼의 속도가 관측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험의 결과 두 방향의 빛의 속도 차이에는 물이 흐르는 속도만큼의 차이가 없었다. 이것은 에테르가 물의 흐름에 끌리지 않고 정지하고 있기 때문에 물의 흐름에 의한 차이를 약화시키고 있는 결과라 생각되었다.
마이컬슨(Albert A. Michelson, 1852~1931)과 몰리는 역사상 가장 정교한 실험을 통해 에테르의 존재 유무를 검증했다. 이론의 예측에 의하면 멈춰 있는 에테르에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지구에서 측정할 경우 빛의 속도는 미약하나마 변해야 했다. 다시 말해서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는 멈춰 있는 에테르를 기준틀로 해서 볼 때 6개월마다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므로 지구의 운동 방향으로 발사한 광선과 그 반대 방향으로 발사한 광선이 특정 거리만큼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에 차이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실험의 결과, 빛의 진행 방향과는 무관하게 속도의 차이는 검출되지 않았다.
에테르의 존재를 부정한 마이클슨은 빛의 속도를 측정하여 궁극적으로 1907년 노벨상을 받은 폴란드계 미국인으로 1873년에 아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876년에는 해군사관학교 물리학과 화학강사의 자리에 있었다. 그들이 에테르를 측정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간단했다. 지구가 운동하고 있으므로 지구가 움직이는데 따라 지구 뒤로 흘러가는 에테르의 바람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바람과 같은 방향으로 전파되는 빛의 속도는 그만큼 빨라야 되며 바람에 거슬러서 전파되는 빛의 속도는 그만큼 느려지지 않으면 안 된다. 지구 위에서 모든 방향에 대해서 빛의 속도를 측정한다면 이 에테르의 바람에 의한 속도 차이를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빛의 속도가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이 속도 차이를 확인하려면 실험의 정밀도를 높이는 것이 관건이지만 이미 빛의 속도를 정밀하게 측정한 그들로서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결과는 당시의 과학자들을 놀라게 했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이 나왔다.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헨드리크 로렌츠(1853~1928) 박사는 에테르에 대해 물체가 움직여 나가면 진행방향으로 그 물체가 물리적으로 수축한다는 가설을 내 놓았다. 로렌츠의 이론은 ‘움직이고 있으면 그 만큼 전자기 법칙 자체가 변화하고, 그 효과에 의하여 원자 사이의 전기적인 결합 방식의 힘이 변화하여 물체가 정말로 수축한다’는 것이다. 로렌츠는 이 연구로 1902년 제 2회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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