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적벽대전은 없었다

적벽대전(赤壁大戰)은 없었다(1)

Que sais 2020. 11. 3.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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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대전(赤壁大戰)은 없었다(1)>

프랑스에서 오래 주재했던 친구가 프랑스에서 있었던 한 일화를 이야기했다.

어느 날 라디오를 틀었다가 한국에서 대단히 놀라운 오페라를 보았다는 프랑스 기자의 이야기가 흘러나와 깜짝 놀랐다고 한다. 프랑스 기자는 한국의 오페라는 단 두 사람이 하는데 한 사람은 부채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다른 한 사람은 북을 친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오페라가 있다는 것도 생소하지만 공연 시간이 8시간이나 되어 더욱 놀랐다고 말했다.

그의 칭찬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부채를 든 가수가 8시간이나 계속 노래를 부르는 데도 관객들 중 어느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았고, 자신 또한 끝까지 한국의 오페라를 들었노라고 했다. 그는 한국의 문화에 독특한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프랑스 기자가 체험한 것은 우리의 판소리였다. 친구는 프랑스에 오래 살았지만 한국의 판소리 공연이 한 외국인에게 이처럼 잊을 수 없는 깊은 감동을 주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반가웠고 또 판소리를 한국형 오페라라고 주저 없이 설명하는 데에는 가슴이 벅차오르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우리 판소리가 프랑스인뿐 아니라 온 세계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는 사실은 2003117유네스코2차 회의에서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된 데서도 알 수 있다.

현재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이 아니라 무형문화유산으로 변경되었는데 이에 등록되기 위해서는 문화적 기준으로 뛰어난 가치가 있는 무형문화유산의 집합체이자 역사적, 예술적 민족적, 사회학적, 인류학적, 언어학적, 문학적 관점에서 뛰어난 가치가 있는 대중적이고 전통적인 문화적 표현일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판소리가 이 같은 기준을 거뜬히 통과했음은 물론이다. 이렇듯 자랑스러운 우리의 무형문화유산인 판소리의 대표작 중의 하나가 바로 적벽가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근래 학자들은 조조와 손권, 유비가 전투를 벌인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적벽대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적벽(赤壁)에서 적벽대전이 벌어진 것이 아니라 오림(烏林) 즉 현재 하북성 홍호현 동북쪽 장강 북쪽 연안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판소리 적벽가가 아니라 오림가가 만들어졌어야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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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붙여진 적벽가>

문학으로서의 판소리는 이야기를 노래로 부르는 구비서사시(口碑敍事詩)이다. 구비서사시에는 서사민요서사무가 그리고 판소리가 있다.

서사민요는 내용도 단순하고 누구나 부를 수 있다. 서사무가는 무당이 굿을 하면서 부르는 것으로 서사민요보다는 복잡하고 길지만 판소리에 비한다면 단순하고 짧은 편이다. 서사무가는 신의 내력을 다루고 초경험적인 원리를 제시하면서 청중의 관심을 끌지만 판소리는 평범한 인물을 등장시켜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다룬다.

그러므로 구비문학 중에서 판소리만큼 변화와 다양성이 두드러진 것은 없다.

이야기 줄거리는 단순해도 표현과 수식은 가사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한 문체를 사용함은 물론 가사나 소설에서 차용할 수 없는 일상생활의 구체적이고 발랄한 제시를 특징으로 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판소리의 작자는 창의력이 풍부한 작가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모든 구비문학이 그렇듯이 판소리도 원칙적으로 공동작이다. 그러나 판소리 광대는 이미 이루어진 전승을 받아들이는 한편 자기 나름대로의 창의력을 다채롭게 발휘한다. 학자들은 판소리가 탈춤과 함께 조선후기 민중예술의 가장 중요한 성과라 의미를 부여한다. 탈춤이 희곡문학에서 이룬 것이라면 판소리 서사문학 이루어낸 성과라는 설명도 있다.

 

적벽대전판소리(문화재청)

최소의 인원, 최소의 도구로 최대의 표현을 하는 것이 판소리의 원리이자 묘미이다. 소리 음반으로 취입하면 그 흥취가 사라지고 창극으로 개편해도 사라지므로 반드시 직접 어야 제 맛이 난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 원리 때문이다.

본래 판소리는 열두 마당으로 알려져 있다. 열두 마당은 일반적으로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강릉매화전, 옹고집, 장끼타령, 왈자타령, 가까신선타령 등을 말한다. 이 중에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등 다섯 마당뿐으로 이를 오가(五歌)라고도 한다.

판소리의 기본 골격은 전승 설화이다. 가객들이 전승된 이야기를 골격으로 그중 특히 흥미로운 부분을 확장시키거나 부연하는 방식으로 사설을 발전시켜나간 것이다. 이렇게 전승된 내용에 첨가된 문학적이면서 음악적인 창작 부분더늠이라고 한다. 현존하는 판소리는 이들 더늠이 무수히 변하고 집약된 결과이다.

따라서 판소리는 이야기 전체의 흥미나 구성의 긴박성을 추구하기보다는 각 대목이나 장면을 확장하여 흥미와 감동을 주는 극적인 효과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판소리에서 앞뒤의 내용이 잘 맞지 않거나 때로는 뚜렷이 모순이 되는 것 이 때문이다.

오가(五歌) 판소리 중에서 적벽가는 다른 판소리와는 달리 특이한 점이 있다. 적벽가는 중국의 삼국지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적벽대전(赤壁大戰)을 묘사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연대와 작자는 미상이지만 화용도(華容道), 화용도타령이라고도 불린다. 화용도는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주할 때 화용도에서 관우와 조우하는데 이때 조조는 관우에게 과거의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살려달라고 목숨을 구걸하여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다. 이 내용이 화용도, 화용도타령또는 적벽가의 주제이다.

적벽가삼국지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 중의 하나인 적벽대전을 주제로 했으나 판소리의 성격상 적벽 전투 부분이 그대로 소리로 짜인 것이 아니고, 그 대목을 중심으로 몇몇 부분이 덧붙여졌거나 빠진 소리 사설이다. 그러므로 적벽가삼국지와는 거리나 문체 따위가 사뭇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벽가가 많이 공연되었던 것은 과거 조선말 왕이나 사대부들이 판소리 가운데서도 가객의 목청이 당당하고, 호령을 하듯 소리를 지르며 부침새를 잘 구사하는 적벽가를 특히 좋아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느닷없이 판소리 적벽가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판소리 중에서 유일하게 작가의 창작이 아닌 역사적인 사실을 노래한 것으로 인식되어온 적벽가의 주제인 적벽대전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설명을 하기 위해서이다.

삼국지를 읽은 많은 사람들은 그런 황당한 일이 어디 있느냐고 하겠지만 역사상 중국을 삼분하게 되는 결정적인 문제의 대 전투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이 전투가 실은 적벽이 아닌 다른 곳에서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따지고 보면 적벽가라는 이름은 잘못 붙여졌다는 이야기이다.

 

<베스트셀러 삼국지의 파괴력>

중국 역사상 유명한 전투를 꼽으라면 어느 전투가 제일 중요하다고 단정해서 이야기하기가 매우 어렵다. 전쟁은 일반적으로 역사에 미치는 영향이 지극히 크므로 시대별 전투의 성격은 물론 파급 효과 등에 따라 역사적 가치가 달라진다.

그러나 전투 사상 가장 흥미 있는 전쟁의 시기를 꼽으라면 비교적 쉽게 말할 수 있.

한 제국의 성립과정에서 일어난 한전과 한 제국의 패망 이후의 삼국쟁패가 바로 그것이다. ‘한전진시황제가 사망한 후, 한나라라는 통일제국이 성립되기까지 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혈투를 벌인 전쟁이다. ‘삼국쟁패는 그 초한전의 승자인 유방이 세운 한 제국의 패망에서부터 의 삼국시대를 관통하는 동안 서로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려고 싸웠던 전쟁이다. 이 두 전쟁은 대중들에게는 가장 돋보이는 관심의 대상이 되어온 전쟁이다. 이 때문에 이 두 전쟁은  『초한지』 삼국지라는 문학으로 대중들이 즐겨 읽는 고전이 될 수 있었다. 특히  삼국지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영토가 결국 세 나라로 분리되면서 거의 100여년에 걸 혈투를 벌이는 장대한 스케일 때문에 더욱 흥미를 갖게 한.

전쟁에는 승자와 패자가 분명하게 갈리고 또 항상 영웅이 나타나지만 이 두 시대처럼 걸출한 인재들이 많이 나타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만큼 두 시대의 전투가 박진감 있게 벌어졌다는 이야기도 되지만 반면 그 시대의 전투가 중국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컸다는 말도 된다. 아무튼 이 두 전쟁에 대해서는 상세한 자료가 많이 남아 있다.

물론 두 시대는 여러 면에서 서로 뚜렷한 차이가 있다. 한간의 쟁패 시기에는 인재가 한 편으로 몰려있어 곧바로 통일 제국이 성립될 수 있었지만 삼국시대의 인재들은 각각 세 집단으로 나뉘어 혈투를 벌였기 때문에 중원이 통일되지 못하고 결국 삼국으로 분리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역사가들은 중국이 삼국시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요인으로 적벽(赤壁)에서 벌어졌다고 알려 이른바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손권유비의 연합군에게 패배한 사실을 든다. 더욱이 병력 수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조조가 손유 연합군에게 패배했다는 것은 특기할 만 한 사항이다.

그런데 삼국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전투가 많았을 뿐 아니라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 유명한 적벽대전에 대한 내용은 매우 불확실하다.

 

중국의 정사 진수의 삼국지

그 원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중국의 정사인 진수(陳壽)삼국지에는 전쟁에 대한 기록이 사마천의 사기에서처럼 명료하지도 않을뿐더러 요약되어 있지도 않다는 점이다. 둘째는 나관중의 삼국지의 영향이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보다 엄청나게 커져 적벽대전에 대한 진위여부를 가릴 필요도 없이 나관중이 그린 삼국지의 내용을 진실로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삼국지』라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뜻하지만 진수의  삼국지』는 정사이고 나관중의  삼국지소설이다. 그러므로 나관중의  삼국지를 뜻할 때 정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관중이 지은 소설임을 이해하기 바란다.

 

삼국지연의의 나관중

엄격히 따져보면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에 속하는 삼국지는 정확치 않은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얼버무려 마치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처럼 쓴 소설이다. 이 소설이 워낙 인기가 있다 보니 판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그 내용이 달라지므로 독자들은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가 역사적인 사실인지 아닌지 분간할 필요가 없이 흥미 있는 내용에만 관심을 기우린다는 점이다.

베스트셀러는 책의 내용 여하를 불문하고 많이 팔린 책을 가리킨다. 독자가 많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든 그 책이 큰 영향력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 베스셀러 작가에게는 독자들을 빠져들게 하여 기쁨과 만족감을 주는 상상력과 경험 그리고 지식, 이를 이야기로 풀어내는 재주가 있다.

국지에서 다루어진 내용이 모두 사실일 수는 없다. 식자들은 대부분 이를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삼국지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로 알려진 적벽대전이 실제로 적벽에서 벌어진 전투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학자들은 역사상 적벽대전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언하여 말한다. 이른바 적벽대전이 실은 적벽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벌어졌다는 것이다.

 

<유비가 용을 얻다>

삼국지전반부에서 조조는 동탁과 원소 세력이 제거되자 명실상부한 후한의 실권자가 됐지만 중원을 확보하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큰 산이 남아 있었다. 바로 유비 세력이다. 유비는 당대의 군벌들과는 달리 특정한 거주지가 없고 출신도 돗자리를 만드는 한량에 지나지 않았지만 항상 세간의 높은 지명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제국의 황제와 같은 유씨로 소위 족보가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대의 군벌들은 유비가 자신보다 부상하는 것만 견제할 수만 있다면 그의 이름을 이용하는 것에 손해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돗자리를 짜던 신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곳에서 예우와 환영을 받은 이유이다. 유비형주(荊州)로 나가자 유표(劉表 142208)가 직접 성 밖으로 나와 그를 맞은 후 상빈으로 대할 정도였다.

건안 12(207), 조조가 북으로 오환(烏桓)을 정벌하러 나서자 유비가 유표에게 이때를 타서 허현을 습격하라 말했지만 유표는 응하지 않았다. 이때 유비에게 큰 행운이 따른다. 유비삼고초려의 형식을 빌려 그의 제일 중요한 참모라 할 수 있는 제갈량(諸褐亮 181234)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삼국지는 온통 제갈공명의 무대가 된다. 실제로 삼국지의 주인공은 조조유비손권이 아니라 제갈공명이라는 말도 나올 정도이다.

여하튼 조조는 북방에서 위나라를 공격할 수 있는 강력한 기마민족인 오환격파하여 휘하에 편입시킨 후 삼공(三公)제도를 폐하고 유비를 제거하기 위해 하후돈(夏候惇 ?220)을 총대장으로 하여 박망성(博望城)으로 진출한다.

조조가 우선 유비를 격파해야 한다는 뜻을 세운 것은 자신보다 명성을 얻고 있는 유비를 계속 자라게 한다면 결국 그가 그리고 있는 큰 그림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조의 이런 생각은 중국의 고사에서도 읽을 수 있다. 유명한 한나라의 유방과 초나라의 항우 관계이다. ·한 간의 전반적인 전투를 볼 때 승자는 항상 항우였고 유방은 도망다니기에 급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통일한 사람은 유방인데 그 이유는 유방이 항우보다 백성들로부터 높은 신임평판이 좋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