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고초려>
조조는 유비가 자신을 넘보기 전에 꺾어야한다고 생각했고 결론을 말하자면 조조의 생각은 옳았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조조가 유비를 공격하려고 했을 때 유비를 공격하는 것에 반대하는 부하들은 없었지만 유비에게 새로운 무기가 생겼다고 조언했다. 그가 얻은 무기는 바로 제갈공명이다.
조조가 제갈량의 친구로 이름이 높았던 전략가인 서서(徐庶 ?~230년경)에게 제갈량의 재주가 어떠냐고 묻자 천하의 서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 같은 사람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반딧불이의 형광(螢光)이라면 제갈량은 호월천리(晧月千里)의 밝은 달입니다.’
나관중은 『삼국지』에서 제갈량을 주인공 중 한 명으로 설정하고 서서의 입을 통해 그를 지나칠 정도로 찬양했는데 그것은 제갈량을 돋보이게 하기 위함임은 물론이다.
서서는 영천 사람으로 제갈량의 ‘융중 문화 살롱’에서 함께 교유한 친구 중의 친구다. 융중이란 제갈량이 유비에게 발탁되기 이전에 기거했던 곳으로 그는 융중에서 당대의 소위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 있었다.
여하튼 유비의 책사로 융중 문화 살롱 멤버인 서서가 제일 먼저 발탁된 후 제갈량을 곧바로 천거했다. 이때 서서는 제갈량은 절대로 부른다고 달려올 사람이 아니므로 직접 찾아갈 것을 권했다. 유비가 제갈량의 존재를 알고 세 번 찾아가 겨우 그를 만났다는 삼고초려(三顧草廬)가 태어나게 된 배경이다.
『삼국지』에 나타나는 삼고초려는 다음과 같다.
서서의 말을 들은 유비는 제갈량을 청해 천하를 얻기 위해 관우·장비와 함께 그의 초가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제갈량이 집에 있지 않아 빈 손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으며 몇 일 후 제갈량이 돌아왔다는 말을 들은 유비는 다시 관우·장비와 함께 눈보라를 맞으며 찾아갔으나 제갈량이 마침 외출하여 다시 한 번 허탕쳤다. 세 번째에 비로소 제갈량을 만났는데 이야기를 나누던 유비는 제갈량이 천하의 형세를 매우 예리하게 분석하는데 탄복했고 제갈량도 유비가 세 번이나 자신의 초가집을 찾아온 것에 감동하여 산을 내려가 돕겠다고 말했다. 유비는 제갈량을 군사로 모시고 관우·장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에게 공명이 있으니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다.”
그러나 『삼국지』에 그려진 삼고초려에는 다소 이견이 있다. 『위략』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유비가 형주에 있을 때, 제갈량이 북쪽으로 유비를 찾아갔지만 유비는 제갈량과 면식이 있는 사람도 아닌데다가 나이 차이도 많이 나 서먹서먹하게 대했다.’
유비와 제갈량의 만남으로 유명한 삼고초려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기록이지만 『위략』의 다음 글을 보면 유비가 제갈량을 계속 박대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우대한 것은 사실이다.
‘처음에는 둘 사이가 서먹했지만 서로 대화를 나누고 신임하고 존경하는 사이가 되었다. 나중에 유비가 제갈량의 계책을 따르자 많은 사람들이 반발했지만 유비는 제갈량이 뛰어난 계책을 가졌음을 알고 극진히 예를 갖추었다.’
이 설명만 보면 삼고초려와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부 학자들은 『위략』의 기록을 볼 때 제갈량이 스스로 북쪽으로 유비를 찾아 간 것도 사실이며 유비가 추후 세 번 찾아가 초빙한 것도 사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갈량이 유비의 책사가 될 때 유비의 나이는 48세 제갈량의 나이는 27세였다.
유비가 처음에는 의기투합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제갈량의 명성을 듣고 약간 삐진 제갈량을 초빙하기 위해 세 번이나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지』는 제갈량을 보다 부각시키기 위해 서서를 또 한 번 극적으로 활용한다. 서서는 208년 조조가 형주를 치자 유비를 따라 남쪽으로 달아나다가 어머니가 조조 군사에게 사로 잡혔다는 말을 듣고 부득이 조조 수하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서의 어머니도 강골이라 서서가 유비를 섬기기를 바라며 자살을 한다. 이후 서서는 마음을 항상 유비에게 두고 있기 때문에 조조에게 결정적인 조언을 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서서의 어머니가 자살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문열은 이의 원형을 『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항우가 유방 휘하에 있던 장수 왕룽의 어머니를 잡아 회유하는 장면으로, 이 부분에서 왕룽의 어머니는 유방이라는 좋은 주인을 만났으니 항우에게 가지 말라며 목을 찔러 자살한다는 것이다. 나관중이 『삼국지』를 저술하면서 단순하게 동 시대의 단편만 고려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전체 역사를 아우르면서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임을 다시 한 번 알려주지만 역사를 마음대로 각색한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서서가 조조 진영으로 들어간 후 아무런 계책도 내놓지 않고 죽는 날까지 유비에게 충성을 지켰다고 했지만 이것도 사실과 부합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서서가 단 한 번도 계책을 내놓지 않았다면 그가 위나라에서 우중랑장(황제의 시종관)과 어사중승(전국의 지방관들을 감찰하고 탄핵하는 직책)조차 임명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두 관직은 제갈량에 비해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것은 사실로 제갈량조차 서서의 품계가 너무나 낮다고 아쉬워했다. 228년 제갈량이 북벌할 때 위나라에 있는 서서의 벼슬이 높지 않은 것을 알고 다음과 같이 말했을 정도이다.
“위나라에 인재가 그렇게도 많은가? 어찌하여 서서와 석광원(石廣元) 같은 사람이 중용되지 않는가?”
<제갈량의 조언을 거절한 유비>
공명은 유비의 삼고초려 끝에 세상에 나오자마자 조조의 대군이 몰려왔을 때 실력을 발휘한다. 박망파에서 화공으로 조조의 대군을 격파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박망파 전투는 건안 7년(202)에 벌어졌는데 제갈량이 초야에서 나온 것은 건안 12년이기 때문이다. 유비도 박망파 전투는 자신이 직접 지휘했다고 적었다. 유비의 몇몇 안 되는 승리 중에 하나인 것이다.
여하튼 유비가 유표에게 의지하고 있을 때 제갈량은 유비에게 유표를 공격하여 형주를 취하라 건의한다. 유비는 차마 그럴 수 없다며 이를 거절했다. 그런데 제갈량이 유비에게 유표를 공격하라 한 것은 사실 매우 놀라운 일이다.
형주자사인 유표는 '삼국지'에서 무능한 사람의 대표적인 주자로 거론될 정도로 매우 유약한 사람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유표는 190년 형주자사 왕예가 장사태수 손견에게 피살되자 형주자사로 임명된 사람으로 상당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다. 당시 형주는 매우 불안정하여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도적이 활보하는 세상으로 소위 무법지대와 같았다. 유표는 남군 사람 괴월, 양양 사람 채모 등을 활용하여 강남 3군의 반란을 평정하고 점차 형주 8군을 통일해 당대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할거 세력이 되었다. 형주가 지형상 삼국의 중심부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사실 형주는 중국 지도를 볼 때 중앙으로 천하 통일을 이루려면 반드시 확보해야 할 지역이었다. 조조는 남으로 확장해야 천하를 도모할 수 있고 동오의 손권도 이곳까지 세력을 확장해야만 패권다툼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형주가 비교적 안정된 것은 유표에게 남다른 정치력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형주에 있는 19년간 동안 중국이 한 치도 알 수 없는 와중에 휩싸여 있었지만 형주에서는 비교적 안정적인 형세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그에게도 남다르게 정세를 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지』에서 그의 역할이 매우 미비하게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유표에게 당대의 영웅과 호걸에 비해 담력과 재간이 다소 부족하다고 나관중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유표도 자신의 능력을 잘 알고 있으므로 중국의 패권다툼에 끼어들지 않고 형주만 안전하게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다.
유표의 생각이 기본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건 당대의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형주가 삼국 패권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라는 것은 삼국의 누군가에 의해서 언젠가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형주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비상대책을 세워야 했다는 것이다.
형주의 상황을 가장 잘 꾀뚫어 보고 있던 사람이 바로 조조다. 그는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해야 할 지역이 형주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대의 패권을 차지하는데 중요한 지형을 확보하고도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 유표만 제거하면 삼국은 저절로 통일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유표에게는 조조가 반드시 제거해야 할 유비가 의탁하고 있으므로 형주를 접수한다는 것은 유비의 세력도 자동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적벽대전이 일어나는 이유이다. 그런데 상황은 전혀 엉뚱한 방면으로 흘러간다. 조조가 건안 13년(208년) 7월 대군을 동원하여 본격적인 남정에 돌입하자 나름대로 유비를 포섭하여 형주를 수호하고 있던 유표가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그런데 유표의 뒤를 이은 사람은 형인 강하(江夏)태수 유기(劉琦, ?~209)가 아니라 차남 유종(劉琮, ?~208 이후)으로 그는 곧바로 조조에게 형주와 양주를 바치겠다면서 항복의사를 밝혔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유표에게는 큰아들 유기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유표가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유기의 동생인 유종이라는데 문제가 있었다. 나이 어린 유종은 형주를 지키려는 생각을 할 정도의 재목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나이가 14세에 불과하므로 그럴만도 한 일이다.
이는 조조로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다. 사실 형주를 조조에게 헌납한 사람은 유표가 아니라 그의 아들과 형주의 집권세력이지만 이 일로 유표는 삼국시대에서 가장 무능한 사람의 대명사로 거론된다. 그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자식농사조차 제대로 짓지 못해 그동안 쌓아 놓은 공과가 모두 허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유비에게 유표의 형주를 접수하라고 조언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정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유표의 자질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이유는 유표가 바로 제갈량의 근친이 되기 때문이다. 제갈량의 장인인 황승언의 누이동생이 유표와 결혼했다.
사실 제갈량은 당초 형주목인 유표의 우산 아래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유표가 제갈량의 근친이 되기는 하지만 제갈량은 유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유표가 백성을 아끼고 인재 양성을 위해 노력하는 등 어느 정도 명망을 갖고는 있었으나 아쉽게도 너무 보수적이고 성격이 흐리멍덩하다는 단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자신의 웅지를 펼치는데 결정적인 흠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한편 제갈량은 자신을 삼고초려를 통해 초청한 유비에게 형주를 접수하라고 이야기했지만 유비로서는 선뜻 제갈량의 말을 들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유비가 그때까지 얻은 명성은 유씨라는 족보 때문인데 자신이 유씨를 공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론을 따진다면 유비의 말도 맞고 제갈량의 말도 맞았다 볼 수 있다. 결국 유비가 추후에 형주를 접수하였지만 형주를 접수하기 전에 유비가 많은 고초를 겪은 것은 사실이다. 만약 유비가 초창기 제갈량의 건의를 곧바로 받아드렸다면 삼국의 역사는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적벽대전 전야>
형주의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할 때 유비는 당시 번성(樊城)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는 누구보다도 후각이 예민한 사람이었다. 조조가 남하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조조가 완성(宛城)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생각할 것도 없이 십 수 만 부대를 이끌고 당양으로 퇴각한다. 이때 유종이 있는 양양(襄陽)을 지나치게 된 유비에게 제갈량은 양양을 취하라고 간했지만 유비는 이 역시 거절하고 뒤를 따르는 백성들과 함께 강릉(江陵)으로 향했다.
조조는 기병 5천을 이끌고 유비가 백성들과 함께 후퇴하는 것을 쫓았다. 조조군의 공격이 거세자 유비는 그의 장기라고도 볼 수 있는 꼬리를 과감히 끊어버리는 줄행랑 즉 심지어 처자식까지 버리고 제갈량 장비 조운 등 수십 기병만 이끌고 도주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삼국지』에서는 매우 극적으로 그렸다. 즉 조자룡이 장판파(長板坡)에서 조조군에 포위되자 유비의 아들 아두(阿斗)를 가슴에 품고 혈투를 벌이면서 겨우 탈출한다. 이어서 장비가 장판교(長板橋)에서 혼자 버티고 서서 큰 목소리로 덤비라고 하자 조조가 퇴각한다.
두 가지 사건은 대체로 사실로 여겨진다. 진수의 『삼국지』 <조운전>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유비가 당양 장판에서 조조에게 추격을 당하여 처자식을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날 때 조운은 유비의 어린 아들을 껴안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후주(後主)였고 또한 감부인(甘婦人)을 보호했는데 그가 바로 후주의 생모였다. 이들은 모두 조운의 노력으로 재앙을 면할 수 있었다.’
진수의 『삼국지』 <장비전>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유비는 조조가 갑자기 추격해온다는 말을 듣고 처자를 버리고 달아나면서 장비에게 기병 20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후방을 막게 했다. 장비가 강물을 이용하여 다리를 끊고는 눈을 부릅뜨며 창을 꼬나 잡고 말했다. ‘나는 장비다. 나에게 덤비는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하라.’ 적들은 모두 감히 접근하지 못했고 결국 유비가 재앙을 피할 수 있었다.’
장비가 대갈일성으로 다리를 끊어 물이 거꾸로 흘렀다는 설도 있는데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누구나 알만 한 일로 전설일 뿐이다. 그런데 장비의 큰 목소리에 조조의 대군이 놀라 공격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장비의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가장 큰 소리의 세기는 들을 수 있는 가장 작은 소리의 세기의 1,000,000,000,000배까지이다. 그러나 소리의 크기의 차이는 이보다 훨씬 적다.
귀가 듣는 상대적 소리의 크기를 음량이라 하고 데시벨(db) 단위로 측정한다. 데시벨은 ‘로그(log)눈금'을 사용하므로 10데시벨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장 작은 소리인 0데시벨보다 10배, 20데시벨은 100배이다. 일반적으로 집에서의 라디오 소리를 40데시벨, 집에서의 대화소리를 65데시벨, 귀에 장애를 주는 소리를 85데시벨, 매우 혼잡한 교차로는 90데시벨, 도로공사 시 굴착기의 소음은 100데시벨이다. 일반적으로 가장 큰 소음은 제트기 이륙 때 나는 소리로 140데시벨로 본다. 인간은 120데시벨에서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고 140데시벨에서 고막에 통증을 느끼며 방향감각을 일시 잃는다. 140데시벨이 얼마나 높은 수치인가는 일반 소음계(sound level meter)의 측정 범위가 30~130데시벨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장비가 대갈일성으로 장판교에서 조조군이 추격을 막아냈다면 그 목소리가 우렁찼음은 틀림없을 것 같다. 특히 장비의 목소리가 제트기의 소음과 같을 정도인 140데시벨 이상이었다면 조조군이 방향감각을 잃고 장비를 추격하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 정도의 목소리를 낼 수는 없다. 실제로는 조조가 장비의 뒤에 복병이 있을 것으로 알고 퇴군한 것이다.
얼마 후 유비는 관우와 회합하고 유표의 장자로 만 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던 유기(劉琦)와 연합하여 하구(夏口)에서 2만 여명의 연합군을 구성할 수 있었지만 여기에서 유비는 앞으로 진로를 놓고 결단을 내려야 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어디로 도망가서 근거지를 확보하느냐였다.
천하를 제패하기 위해 남정을 시도한 조조의 생각은 단순했다. 형주를 접수했으므로 여세를 몰아 오나라의 손권을 격파하고 더불어 유비의 잔존 세력을 제거하겠다는 것이다.
유비로서는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었다. 조조에게 항복한다는 것은 그동안 쌓아 온 모든 명성을 한꺼번에 잃는 것은 물론 패배자로서 목숨조차 부지하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유비로서는 어떠한 경우로든 조조와 대항해야 했는데 마침 오나라의 손권이 있었다.
강동의 손권은 사실 적벽대전이 벌어지기 전만해도 '삼국지'에서 중요 세력은 아니었다. 당대의 패권은 원소 조조 등 강북의 실권자들 간에 벌어진데다가 강동은 전력에 있어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강동을 침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형주가 방패막이 되어 주었기 때문에 '삼국지' 초반 비교적 안정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동안 방패막이 되어 준 형주가 조조에게 항복했으므로 손권과 조조 사이의 완충지대는 사실상 사라진 셈이다. 유비가 착안한 것은 바로 이점이다. 조조와 손권 간에 언젠가 전면전이 일어나야 하는데 손권에게 힘을 실어주면 조조와 대항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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