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적벽대전은 없었다

적벽대전(赤壁大戰)은 없었다(8)

Que sais 2020. 11. 3.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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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적벽대전>

적벽대전을 중국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전투가 전체 중국사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적벽대전의 파급 효과는 광의와 협의로 구분하여 설명된다.

먼저 협의의 결과를 보면 적벽대전은 군사적인 결정성을 갖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조가 상대가 되지 않는 손·유의 연합군에게 패전하여 형주를 떠나 중원의 으로 돌아갔지만, 그의 권력기초는 적벽대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았다. 조조의 군사력은 여전히 손권과 유비의 군사력을 월등히 앞섰다는 것은 그 후 조조가 다시 오나라를 침공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213). 적벽대전은 단기적으로도 남북 간의 군사적 평형을 깨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면 광의적인 측면에서 적벽대전은 역사상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학자들은 만약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승리했다면 신속하게 중국을 통일하는 데 어떤 장애도 없었을 것이라고 확언하여 말한다. 조조가 승리했다면 후한에 이어 새로운 제국을 설립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사실은 그와 반대이다.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패배하고 그 결과 제갈량이 손권을 설득할 때 예측하였던 것과 같이 유비와 손권의 세력이 조조를 견제할 수 있는 정족의 형세가 되었다. 즉 적벽대전의 패배 때문에 조조는 중국을 통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잃었고 사백년 동안 이어온 한나라가 멸망하자 중국 역사상 유명한 삼국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삼국지에서의 또 한 가지 의문은 손유의 연합군에서 유비의 역할이 무엇이냐이다.

진수의 삼국지이든 나관중의 삼국지이든 유비는 연합군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한 것으로 나온다. 특히 삼국지의 주인공으로 나관중은 제갈량을 부각시켰고 이에 따르는 실무 책임자로 주유를 다루었으며 작전에 동원된 군사의 대부분도 유비군이 아니라 동오군이다.

그런데 당시 손·유 연합군은 57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유비의 군사는 유기의 1만 명을 합하여 2만 명에 불과하지만 이들의 역할을 적벽대전에서 결정적이라고 생각한다. 학자들은 조조 수군과의 수전(水戰)은 동오군이 담당하였을지라도 유비와 주유의 육군이 공동작전을 구사하여 조조를 추격하는 추격부대를 구성하지 않았다면 조조군은 궤멸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손권의 강점은 육군이 아니라 수군이며 유비의 군대는 육전으로 전장을 누빈 정예병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진수의 삼국지에는 적벽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다섯 번의 설명 중에서 네 번이나 유비를 거론했고 손권을 두 번 거론한 것으로도 그 당시의 유비 역할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려준다.

 

촉의 유비 관우 장비 제강량 마초

한편 삼국지의 주인공은 조조, 유비, 손권이지만 또 다른 주인공은 제갈량이다. 나관중은 삼국지120회 중에서 약 70회에 걸쳐 제갈량을 등장시킨다. 그렇다면 제갈량이 적벽대전에서의 진정한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제갈량

그런데 삼국지에는 온통 적벽대전이 제갈량의 작품이라고 설명된다. 한마디로 제갈량이 종횡무진하며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심지어는 수군의 공격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동남풍도 빌어오며 단 몇 일안에 수많은 화살도 얻어 온다. 제갈량의 이같은 능력은 인간이 아니라 신의 경지라고도 볼 수 있는데 사실 나관중의 삼국지가 세기를 이어오며 사람들의 인기를 끌 수 있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인격의 설정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제갈량이 진짜 그런 능력을 발휘했는지는 다른 문제이다.

학자들은 적벽대전에서의 제갈량의 가장 큰 공헌손권으로 하여금 전쟁을 결심토록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제갈량이 화공에 필요한 동남풍을 불게 했고 이것이 연환계와 합쳐 조조에게 패배를 안겨준 것은 제갈량의 역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중천(易中天)제갈량이 실질적인 직무를 제대로 얻지 못했던 사람이라고까지 평할 정도였다. 그는 유비가 제갈량을 그저 친구와 손님으로 대했으며 실제 일등 책사는 방통이었다고 말했다. 물론 방통이 사망하자 유비는 제갈량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유비는 제갈량에 대해 끝마음을 놓지 못해 죽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들 유선을 부탁하는 자리에서도 다른 신하인 이엄(李嚴, ?234)배석시킨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엄은 젊은 시절 재주로 이름을 날렸고 형주의 유표 아래서 군과 현의 관원으로 있었는데 208년 조조가 형주를 차지한 뒤 촉으로 들어가 유장의 신하가 되었다. 213년에는 호군으로 면죽에서 유비를 막다가 항복해 비장군이 되었고 유비가 성도를 차지하자 건위태수, 흥업장군이 되었으며 그가 사망하기 1년 전 중도호가 되어 그 지위가 제갈량 다음이었다.

이엄231년 제갈량이 북벌하면서 기산에 주둔할 때 보급을 책임졌는데 장마철이 되어 운송이 불가능해지자 조정의 명령을 위조해 제갈량이 퇴군하게 만든 장본인으로 제갈량이 철군하게 되는 요인이 된다. 결국 제갈량이 그를 탄핵하여 귀향 보냈는데 제갈량이 234년에 죽었을 때 그 역시 귀향지에서 병사했다.

 

삼국지의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은 모든 작전을 떡 주무르듯 좌지우지하고 주유의 살해위협에서 유유히 빠져 나온다. 삼국지결론은 간단하다. 나관중이 제갈량을 천하의 명장이요 신과 같은 존재로 부각시키기 위해 적벽대전을 그의 역할을 중심으로 전개했다고 설명된다. 여기에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학자들은 제갈량이 실제로 적벽대전에서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결국 조조가 중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삼국시대가 열리는 큰 그림을 그리는 데는 제갈량이 결정적으로 일조했다고 나관중이 평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제갈량이 유비를 만났을 때 유비에게 자신의 견해 즉 중국을 통치하는 청사진융중대를 제시하여 단번에 유비를 사로잡는다. 융중대의 기본은 소위 천하삼분이다. 물론 천하삼분론은 동시대의 노숙이나 감녕도 갖고 있었다. 노숙은 손권에게 한실은 부흥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조조를 무너뜨릴 수도 없습니다. 강동에 기반을 두고 천하의 형세를 살피십시오.”라고 말했는데 이는 조조, 유표와 함께 천하를 삼분해야 함을 의미한다.

 

융중대에서 천하삼분론을 설명하는 제갈량

여하튼 제갈량의 융중대는 입사 지망생이 최고 경영자와의 면접에서 자신의 구상을 내놓은 소견서로 볼 수 있다. 융중대에서 제갈량은 유비가 대외적으로 직면한 위협내부의 핵심 경쟁력 등을 정확하게 분석했다. 이를 현대 기업 경영에서 활용되고 있는 SWOT 분석(기업의 강점(strength), 약점(weakness), 기회(opportunity), 위협(threat)을 분석하여 이를 토대로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는 기법)에 맞먹는 국가 경영도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유비는 유씨라는 장점을 갖고 부지런히 중국을 누볐으나 뚜렷한 시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의 중국을 보면 전국적으로 시장이 분화되었지만 조조와 손권이 선점한 시장은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형주와 익주는 시장 구조가 취약했다. 제갈량은 유표가 자신의 이모부가 됨에도 그릇이 모자란다고 생각하여 유비에게 형주를 취하라고 건의할 정도였다.

그런데 적벽대전이 일어날 때 유표가 사망하자 큰아들 유기를 제치고 유종이 후계자가 된다. 유종이 곧바로 조조에게 항복하자 제갈량은 사촌형이 되는 유기에게 손권과 결합하여 조조에 대항토록 유도한다. 아무리 제갈량의 능력이 출중했다고 하더라도 제갈량의 탁월한 언변력만 갖고 유비와 손권의 연합을 이끌어내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제갈량․유 연합이라는 큰 프로젝트를 성사시킬 수 있었던 것은 사전에 끈끈한 연이 있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친형 제갈근의 추천을 받아 손권 휘하에서 일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제갈량이 스무 살 되던 해에 형의 추천으로 손권을 만난 일도 있었는데 이때 노숙과 함께 손권의 예우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손권이 제갈량의 제안을 들을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제갈량이야말로 적벽대전을 성사시킨 실무자라고도 볼 수 있으므로 삼국지에서 나관중이 적벽대전을 제갈량의 작품으로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적벽대전의 근원지는 누구인가>

마지막 질문으로 들어간다. 앞의 설명을 통해 볼 때 문제의 대전을 적벽대전이 아니라 오림대전이라고 해야 하는데도 그 동안 계속 적벽대전으로 불린 이유가 무엇이냐이다. 가장 큰 의문은 최초로 적벽대전을 사용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결론은 다소 맥이 빠지지만 매우 간단하다. 진수가 정사인 삼국지에서 앞에 설명한 것처럼 애매모호하게 적벽대전이라 기록했기 때문에 후세인들이 당연히 적벽에서 전투가 일어난 것으로 적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적벽대전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나관중의 삼국지때문이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에 대해 커다란 비중을 두지 않은 반면 나관중은 삼국지의 가장 중요한 전투 소재로 적벽대전을 꼽았다.

 

적벽대전이벌어진 장강 안개

그런데 나관중진수의 잘못된 표현을 그대로 삼국지에 사용했기 때문에 모두들 오림대전이 아니라 적벽대전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청나라 시대의 장학성(章學誠)병신찰기(丙辰札記)에서 다음과 같이 아쉬움을 표시했다.

 

열국지, 금병매등 유명 소설은 모두 상상력에서 만들어진 픽션이므로 작가가 소설의 내용을 어떻게 끌고 가든지 큰 부작용이 없다. 그런데 삼국지70퍼센트의 역사적인 사실에 30퍼센트의 허구를 섞은 소설이다. 문제는 삼국지에서 가장 중요한 적벽대전을 허구의 사실에 기초하여 전개했다는 점이다. 적벽대전이라는 단어만 보면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역사는 진실을 요구한다. 그런데 30퍼센트의 허구가 진실로 포장되면 그 폐해가 적지 않다. 나관중 제갈량을 삼국지의 주인공의 하나로 만들기 위해 천재적인 군신으로 묘사했다.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

삼국지에서는 주유가 여러 차례 제갈량을 살해하려 하는 반면 제갈량도 주유의 화를 돋어 조조에 대항토록 사주하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이런 상황이 연출되었다면 적벽대전은 커녕 조조가 나타나자마자 제갈량조차 도망가거나 항복했을 것이다.

 

삼국지를 읽은 사람들은 당연히 조조와 손·유 연합군의 전투지점이 적벽이고 불타는 조조 수군의 선박은 적벽에서 전멸했다고 생각한다. 삼국지에서의 과대 묘사적벽대전이란 역사적 명소를 태어나게 한 것이다.

일부 역사학자들이 나관중을 정말로 성의 없는 작가라고 비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소설의 한 재미로 제갈량을 부각시키는 등 역사적인 사실과 다르게 적었는데 막상 베스트셀러가 되자 그가 적은 내용이 마치 진실처럼 오도되었다는 것이다. 한데 그를 소설가로 본다면 그렇게 할 일도 아니다. 소설의 본령이 바로 픽션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소설가는 역사가의 진실을 최대한 잘 활용하고 또 역사가는 언제나 소설가의 상상력과 창작력을 존중하여 역사적인 사실을 더욱 많이 밝혀내는 데 매진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참고문헌 :

적벽대전 실제 기록은 1페이지도 안 돼, 배영대 외, 중앙일보, 2008.5.16.

이중텐, 삼국지를 다시 말하다, 유광종, 중앙일보, 2008.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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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의 이해, 조동일 외, 창작과 비평사, 1978

영웅의 역사(5), 토모노 로 외, , 2000

본 삼국지(11), 리동혁, 금토,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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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강의, 이중텐, 김영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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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이종호, 북카라반,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