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살무늬토기가 한국인에게 특별히 중요한 것은 한국의 고대사를 원천적으로 다시 쓰게 만든 파괴력을 갖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중국인들의 역사와도 관련있다. 중국은 그동안 황하유역에서 태어난 선진 문화가 각지로 전파되었다는 황하중심문화를 기본 정설로 견지해 왔다. 따라서 문명화된 세계로서의 중국의 이상형은 통일된 ‘하나의 천하대국’ 중국이다. 황하의 풍부한 물을 이용해 문명을 이룩해 가면서 점차 주변의 야만국들을 흡수했기 때문에 중원(中原)은 중국의 중심지라는 견해이다. 이는 중국 문명이 오늘날 산서성(山西省) 남부 및 하남성(河南省) 서부인 이른바 중원지역에서 발전했으며 주변 지역으로 퍼져나갔다는 것으로도 설명된다.
이런 화이관(華夷觀)을 바탕으로 그들은 중국에서의 국가의 시작을 대체로 기원전 1500년에서 2000년으로 잡았다. 이것도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을 통해 하(夏)나라를 기원전 2070~기원전 1600년으로 올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화이관에 앞서 중국에서는 중국이 ‘만국의 중심, 또는 천하의 중심(萬國之中心, 天下之中心)'이라는 뜻으로 갑골문자(甲骨文字, 卜辭)이후 시경(詩經) <대아편(大雅)>의 ‘중국 사람들을 사랑하여 사방 각국의 사람들을 안정시키셨다(惠此中國 以綏四方).’이라든가 상서(尙書)의 ‘구주·오복제(九州․五服制)’를 내세워 그들 자신을 천하의 중심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시경의 ‘천하는 전부 중국의 땅이고 온 백성은 그들의 신하’(溥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賓 莫非王臣)라고 자칭하는 이른바 중화사상(中華思想)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공산국가다. 유물사관에 따르면 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객관적이고 측정 가능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과거 중국의 황하문명이 세계 4대문명 중에서 가장 낮은 연대의 문명이고 삼황오제(三皇五帝) 특히 오제시대를 역사시대로 인정하면서도 연대를 올리지 않은 것은 증거 위주의 역사관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중국이 갑자기 ‘중화5천년’으로 역사를 올려 잡는 이유는 그동안 3600~4000년 전으로 추정되는 하(夏) 이전에 등장하는 ‘삼황오제’가 전설의 인물이 아니라 실재 인물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찾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바로 홍산의 우하량유적(牛河梁遺蹟) 즉 요령지역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는데 그 연대가 기원전 3000~3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 중국학자들은 이들 유적을 근거로 ‘신비의 왕국 또는 여왕국’이라는 고대국가가 이 지역에 존재했다고 발표했다. 한마디로 기원전 3500년경부터 우하량 홍산지역 즉 요령지역에 국가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기원전 2,333년의 단군조선이 실재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로 설전을 벌이고 있는데 중국 측에서는 이들 지역에서 적어도 단군보다 1,000년 전에 이미 국가 즉 ‘신비의 국가’가 존재했다는 설명으로 그들 중국의 역사를 끌어올린 근거로 삼았다.
<중국역사를 끌어 올린 홍산문명(紅山文明)>
중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5년 단위로 장기적인 국가 전략을 ‘5개년 계획’으로 진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3공화국 시절에 수행했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유사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경제개발에만 초점을 맞춘 반면 중국은 정치․경제․문화․역사 등 모든 분야를 아우른다.
중국은 1996년 5월 ‘95중점 하상주단대공정’이라는 명목으로 대대적인 유적 발굴과 연구를 추진했다. ‘95’란 9차 5개년 계획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는 총 9개의 대형 과제에 44개의 전문 과제가 도출되어 2000년 9월에 종료되었다.
단대공정은 간단하게 말하여 중국 고대사에 공백으로 남아있는 하(夏)․상(商)․주(周)의 연대를 확정하는 사업이다. 공식적으로 중국은 기원전 841년 이후의 일들만 정확한 연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세계 4대 문명이라는 영예를 갖고 있지만 중화문명이 세계 최고 문명의 하나라는 설명에는 문제가 있었다.
중국은 ‘하상주단대공정’이 진행되는 동안 고대 유적지 17곳에 대한 새로운 발굴 조사를 추진했고 기존의 유물도 C14 연대측정을 새롭게 했다. 이를 토대로 ‘하상주단대공정’이 끝나자마자 하나라의 연대를 기원전 2070년에서 기원전 1600년으로 확정짓고 상나라는 기원전 1600년에서 기원전 1046년(19대 반강왕(盤庚王)이 기원전 1300년 도읍을 은(殷)으로 옮겼으므로 이후 은(殷)이라고 하지만 상(은)으로도 설명함), 주나라를 기원전 1046년에서 기원전 771년으로 다시 설정했다. 하상주단대공정의 결과에 대해 지나치게 의도적이고 이들 결론에 반대되는 결과들을 무시했다는 지적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은 보다 공격적인 역사 만들기에 착수했다.
중국은 이어서 2000년부터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이라는 새로운 역사작업을 진행했다. 하왕조의 건국이 기원전 20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그 이전시대를 설정하는 것이 무리한 일은 아니라는 뜻으로 ‘중화문명의 근원을 탐구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중화고대문명탐원공정’은, ① 신화와 전설의 시대로 알려진 ‘3황 5제’의 시대까지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하여 중국의 역사를 1만 년 전으로 끌어올리고, ② 이를 통해 중화 문명이 이집트나 수메르 문명보다도 오래된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임을 밝힌다는 것이다.
이것이 요하(遼河) 일대를 기존의 세계 4대 문명보다 앞서는 '1만년 역사의 새로운 문명권’으로 부각시키려는 ‘요하문명론(遼河文明論)’이다. 중국이 이와 같이 대대적으로 그들의 역사를 올려 잡은 것은 1980년대 이후 요하 일대에서 소하서문화(小河西文化, 기원전 7000~6500년), 흥륭와문화(興隆洼文化, 기원전6200~기원전5500) 등 세계적으로도 이른 시기의 신석기 유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적봉시 오한기(敖漢旗) 보국토향(宝國吐鄕) 인근의 흥륭와촌(興隆洼村)에서 발견된 흥륭와문화는 특별히 한민족에게 중요한 곳이다. 기원전 6200년까지 올라가는 신석기문화 유적으로 현재 중국 국경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신석기 집단 주거지다. 약간 후대인 사해 유적에서 서북 방향 약 150킬로미터 지점으로 유적은 마을의 동남쪽 지면보다 20미터 높은 언덕에 있다. 유적의 서남쪽 경사 아래에 샘물이 있으며 망우하(牤牛河) 서쪽 1.5킬로미터 지점이다.
유적은 매우 잘 보존되어 주거지 120여 곳, 실내 무덤 11기, 회갱과 교혈(窖穴) 약 200기, 그 밖에 다량의 토기, 석기, 옥기 및 골기가 발견되었다. 4만㎡에 달하는 마을인데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주변을 파서 물길을 두른 해자(垓字)도 발견된다. 해자는 일반적으로 적이나 위험한 동물로부터 주거지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추정한다.
집자리의 규모는 보통 60㎡(약 18평)인데, 가장 큰 두 곳은 140㎡(약 42평)이나 된다. 중국학자들은 큰 집자리 두 곳은 영도자가 살았거나, 회의 혹은 원시종교의식을 행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약 300명이 살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각 방의 모습을 보면 취사용구뿐 아니라 생산도구, 심지어 식품저장용 움막까지 지니고 있었다. 이는 가정마다 경제적인 독립성을 지녔다는 설명이다. 또한 마을은 10개 정도의 열(列)을 지어 일정하게 구획됐다.
학자들이 특히 주목한 것은 같은 열에 살았던 가정끼리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1개 마을의 최소단위인 가정과, 같은 열에 사는 혈연관계로 맺은 가까운 친척, 그리고 마을 안에서 함께 살았던 먼 친척까지 하나의 씨족마을을 이뤘음을 말해준다. 중국은 이곳을 중화원고제일촌(中華遠古第一村) 또는 ’화하제일촌(華夏第一村)‘이라 부른다.
흥륭와문화에서 학자들을 놀라게 만든 것은 흙으로 만든 사람의 얼굴(陶塑人物像) 즉 석두다. 이 인면상은 손바닥보다 다소 크고 두께는 5센티미터 정도인데 고대인들이 제사나 종교적인 의례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한국인들이 흥륭와문화에서 가장 주목하는 것은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다는 점이다. 빗살무늬 토기는 황하 지역과 전혀 다른 것으로 ‘평저통형(平底筒形)’과 ‘지자문(之字紋)’ 토기가 대표적이다. 이를 놓고 대련대학교의 설지강(薛志强)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흥륭와문화의 특징은 평저통형토기와 지자형무늬다. 평저통형관은 그 분포지역이 아주 넓어 동북삼성과 내몽고 동남부 외에도 오늘의 러시아 경내의 흑룡강 하류 지역 및 한반도의 동북부와 서북부 일부에서 모두 발견된다. 또 멀리 서방 즉 예니세이강 중류와 시베리아 3지역에서도 이들 토기가 발굴되는데 흥륭와문화와 놀라울 만큼 비슷하여 이들이 모두 동방의 전통 문화에서 기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풍은학(馮恩學)은 요서 일대는 물론 러시아 흑룡강 중․하류 지역, 한반도 지역까지 이들 토기가 널리 분포하는 것을 기반으로 ‘평저통형토기문화권’이라고 부른다.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는데 평저통형토기는 한반도 동북부에서만 발견된다. 이를 두고 동북만주 일대에서 백두대간의 동쪽을 타고 내려왔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또한 이곳에서 세계 최초의 옥(玉) 귀걸이(이상결식) 등 100여점의 옥기가 발견되어 세계를 놀라게 했는데 이들 옥은 적봉시에서 동쪽으로 45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압록강에 인접한 요령성 수암(岫岩)에서 출토되는 ’수암옥‘이라는 사실이다(압록강 단동에서 1~2시간 거리). 수암옥의 경도는 5~7이며 유지(油脂) 광택을 띠며, 주로 황록색 혹은 옅은 황색으로 묵옥, 청옥, 옥수 마뇌와 매옥(媒玉) 등으로 구분된다.
내몽고 지역에서 발견된 옥이 요동 지방의 수암옥이라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동안 중국의 각 신석기 문화는 상호 교류가 없이 고립적이었는데 기원전 4000~3000년경에 비로소 홍산문화 지역과 앙소문화 지역이 서로 교류하기 시작했다고 설명되었다. 그런데 기원전 6000년경의 흥륭와문화의 요하 일대 신석기를 주도한 세력이 만주 벌판 요동 지역 신석기인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수암은 고인돌이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수암현 흥륭향 설가보자촌(薛家堡子村), 백가보자촌(白家堡子村), 당가보자촌(唐家堡子村), 고가보자촌(高家堡子村), 홍석촌(紅石村), 황지촌(荒地村) 등에서 주로 대형 북방식 고인돌이 발견된다. 이는 홍산지역과 후에 고인돌 문화로 특징지어지는 만주 지역과 끈끈한 연계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민족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는 동이 지역에서 한민족 특유의 유물들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데 흥륭와문화 즉 홍산문화도 고조선보다 앞선 시대임을 감안하면 이들과 한국 역사와의 연계를 이해할 것이다.
이들 지역에서 발견되는 대표적인 유물이 빗살무늬토기, 고인돌, 비파형동검 등인데 이런 유물들이 나온 지역이라면 중국과 달리 우리 조상들이 거주했던 터전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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