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들을 괴롭히는 것은 그동안 고조선과 직접적으로 연계되는 하가점하층문화에서는 고동북유형과 고화북유형이 섞여서 나온다는 점이다. 남산근, 흑석구, 용두산 등 하가점상층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의 경우에도 고화북유형으로 발견되어 홍산문화나 소하연문화 단계와는 뚜렷한 차별성을 보인다.
중국에서는 그동안 동이족으로 거론되는 동호-선비-거란의 체질인류학적 특성으로 고몽골고원유형-현대 북아몽골인종과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농경 생활을 유지하던 하가점 하층문화를 대체해서 새롭게 출현한 유목생활인인 이들이 하가점상층문화를 대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가점상층에서 고몽골고원유형이나 현대 북아몽골인종과 유사한 모종의 집단(선(先)동호-선비-거란)과 함께 엉뚱하게 고화북유형이 튀어나온 것이다.
이에 대한 설명이 간단한 것은 아니지만 홍산문화-소하연문화-하가점하층문화의 경우 농경문화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하가점 상층문화의 경우 유목 생활로 들어선다. 하가점 하층문화는 대체로 기원전 15세기에 갑자기 사라지는데 이 문제는 기후 변화에 따라 농경이 어려워졌기 때문으로 인식한다. 생존 환경이 급격히 변하자 하가점하층에서 상층으로 교체되면서 그 이전에는 홍산지역에서 고화북유형에 속하는 집단이 광범위하게 출현하는 것은 이 당시 거주민의 이동이 크게 일어났다는 것을 알려준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홍산문화지역에서 탄생한 구홍산부터 후홍산문화를 이어 하가점하층문화인들은 고동북유형을 갖고 있으며, mtDNA(모계) 분석에 의거해도 현대의 한국인과 체질인류학적으로 유사하지만 나머지 두 유형은 차이가 많다는 점이다.
이를 하가점 상층문화와 중원의 상(은)과 연계시키면 다소 설명이 가능해진다. 하가점에서 기후 등이 바뀌어 농경이 어려워지자 이들이 남하하여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상(은)을 건설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고동북유형인들이 대거 남하하자 하가점상충에 고몽골고원유형인과 고화북유형인들이 진출했다는 것이다. 동이족인 고동북유형인들의 압박에 고화북유형인들이 북상했다는 것도 설명된다. 또한 하가점에서 남하한 하가점상층문화인들이 상(은)으로 진출하는 것과 병행하여 요동지역 즉 한민족의 터전으로 이동했다는 것도 자연스럽다.
이런 내용은 고대홍산인과 한민족과의 연계는 우하량 홍산문화 유적 출토 고인골에서 추출한 mtDNA로 비교한 결과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이 자료에 의하면 현대 일본인, 현대 조선족이 비교적 가깝고 그 다음으로 현대 중국 남방한족이 가까운 집단으로 나온다. 반면에 하가점하층문화의 전신으로도 설명되는 소하연문화인과의 비교는 이들과 현대 조선족이 가장 가깝고 그 다음이 현대 일본인으로 나온다. 또한 하가점하층문화의 대전자묘에서 출토된 고인골에서 추출한 mtDNA로 상호거리를 비교한 결과를 보면 현대 조선족이 가장 가깝고, 그 다음이 현대 일본인, 그 다음이 현대 한국인이다.
그런데 전국시대 요서 지역에서 출토된 대산전묘지의 인골을 보면 조선족 내지 한국인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남방 한족에 다소 가까운 것으로 나온다. 흉노와 중국이 역사에 등장한 이래 수많은 전투로 이들 지역은 한마디로 누가 주인인가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각축장이 된다. 그러므로 현대 중국 북부에 거주하는 사람은 역사시대 이후 거대한 혼혈화 과정의 산물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이 구홍산시대와 다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시 말해 구홍산시대부터 하가점하층에 이르는 시기에 요서지역에서 홍산-소하연-하가점 하층문화를 건설했던 종족은 현대 한국인과 친연성이 있지만 역사시대 이후 요하지역에 주로 거주했거나 통치했던 집단은 홍산시대인들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즉 역사시대 이후 문헌으로 추적할 수 있는 시대에 요하지역에 거주했던 종족과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고고학이 다루는 시기에 요서 지역에 거주했던 종족이 다를 수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한국과 일본이 부계(Y-염색체)로는 뚜렷한 차이가 나지만 모계는 거의 유사하다는 것은 그동안의 역사를 생각하면 조선족과 일본인, 한국인이 비슷한 거리로 나타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장우진은 한민족과 다른 민족간의 유사성을 펜로즈-크누스만 방법으로 분석한 결과 한민족은 만주족과 가장 가까운 분류학적 거리에 있다고 발표했다.
2. 빗살무늬토기
고조선의 성립 연대를 크게 올리는 데 기여한 것으로 빗살무늬토기(즐문토기)와 고인돌, 청동기다. 빗살무늬토기는 청동기시대의 유물은 아니지만 한국의 고대사를 다룰 때는 반드시 나오므로 간략하게 설명한다.
1925년 대홍수로 한강 하류에 위치한 서울 암사동에서 처음 나온 ‘빗살무늬토기’는 이후 60여 곳에서 발견되었다. 연구결과 이 토기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유물의 주류를 이루므로 이 시대를 ‘빗살무늬시대’라고도 한다.
빗살무늬토기의 무늬에는 머리를 빗는 빗살모양의 새기개(빗살)를 이용하여 토기의 성형(成形)이 마르기 전에 표면을 점점이 찍는 ‘빗점무늬’와 선을 긋는 ‘빗살무늬’가 모두 포함된다. 그런데 빗살무늬토기의 기원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멀리 스칸디나비아를 포함하는 북유럽으로부터 시베리아를 거쳐 북위 55도의 환북극 지대를 따라 한반도에 들어왔다는 시베리아기원설이고 둘째는 발해(옹진반도와 산둥반도를 감싸 안은 황해 북쪽의 바다)연안 기원설(광역의 동이족 또는 고조선 영역)로 이를 동이족기원설이라 부른다. 시베리아기원설부터 설명해 보자.
빗살무늬토기가 1920년대에 북유럽의 핀란드와 스웨덴․북부독일․폴란드 등지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발굴되자 핀란드의 고고학자 아일리오(J. Ailio)는 이에 독일어로 ‘캄케라믹(kammkeramik, 빗살무늬토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후 이런 투기가 북유럽뿐만 아니라 주로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한 북위 55도 이북 지역에서도 발굴되어 이 지역을 일명 ‘환북극(環北極, Circumpolar) 문화’로 묶었다.
시베리아기원설은 한국의 정사라고 볼 수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를 기본으로 한다.
한국의 신석기시대는 일반적으로 한반도의 강원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에서 출토된 기원전 6000년경으로 추정한다. 오산리에서 16군데의 움집자리 수혈주거지와 함께 토기와 석기들이 발견되었다. 모두 6개 층으로 그 중 5층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지름 6미터의 둥근 움집자리 6개 터와 함께 집안에서 70x70센티미터의 네모꼴 화덕자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토기에는 좁은 밑바닥에 비해 몸통이 넓은 바리모양토기(발형토기(鉢形土器)가 대부분이다. 석기도 매우 발전했다. 낚시몸돌, 네모꼴돌칼, 흑요석 돌날 등도 나왔다. 출토된 것만으로 보면 오산리 사람들은 고기잡이를 가장 큰 생계수단으로 삼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뼈를 갈아 만든 바늘을 묶어 쓰도록 고안된 낚시몸돌과 위층에서 나온 자갈돌 어망추에서 그런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이 지역은 연어 회귀로 유명한 남대천 인근이다.
한편 제주도 한경면 고산리 유적의 연대가 기원전 105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자 이때를 신석기의 상한선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세석기와 석핵이 나오는 후기구석기시대, 융기문 토기와 무경석촉이 나오는 신석기(I)기, 유경석촉이 나오는 신석기(II)기이다.
최몽룡 박사는 고산리의 층을 셋으로 나누기에는 너무 얇다는 지적도 있지만 세석기와 융기문 토기의 결합을 고려할 때 이 유적의 상한을 아무르강 중부 평원 북부의 범위에 있는 기원전 10000년 전후의 오시포프카 문화에 속하는 가샤 유적이나 바이칼호 근처의 우스트 카랭카 유적(기원전 7000년경), 일본의 복정(福井)동굴, 천복사(泉福寺) 동굴 유적과의 관련성도 충분히 있다고 말한다.
러시아 극동지구 아무르강 하류에 암각화로 유명한 사카치알리안 마을 주변에 집중되어 있는 가샤 유적에서 발견된 토기는 화씨 350도 정도(우리의 무문토기의 경우 573도 전후에서 구워짐)에서 구운 것으로 연대는 12960±120B.P.이다. 또한 남(南)바이칼의 세랑가강 등 지금부터 11000~12000년 전의 토기가 발견되고 있는 지역은 아무르 강 유역이다. 이 지역 주민들은 맘모스나 주변의 대형 동물이 사라지자 어류를 먹고 수혈움집에서 정착 생활을 하였다. 동시에 어류 등 식품의 저장을 위해 토기를 만들었다.
또한 아무르강 하류의 수추섬에서 주로 기원전 6~8000년에 속하는 마린스카야문화에 이어 기원전 4~2000년 초엽의 말르이쉐보 문화 등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들의 신석기문화는 한국의 함경북도 웅기 굴포리 서포항 2ㆍ3기 층과 같은 시기인데다 기형 및 문양에서 유사성이 보인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유럽에는 다뉴브 문화(I)라 불리는 LBK(Linear Band Keramik) 문화가 있다. 이 문화는 기원전 5000년대부터 유럽 중앙과 동부에서 황토지대에 화전민식농경이 진행되면서 서쪽으로 전파돼 나갔는데 이 문화와 동반된 토기의 문양이 우리의 빗살무늬토기와 유사하다.
학자들은 이들 토기의 형태를 근거로 하여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토기들의 조형을 LBK토기로 추정하고 이들이 스칸디나비아를 포함하는 북유럽으로부터 시베리아를 거쳐 북위 55도의 환북극 지대를 따라 한반도에 들어왔다고 주장한다.
김원룡 박사도 이 같은 견해에 동조하여 북유럽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토기는 핀란드ㆍ스웨덴ㆍ북독일ㆍ서북 러시아의 카렐리아 지방에서 흑해 북안의 오카, 볼가강 상류지방에 이르는 지역에서 뾰족밑 또는 둥근밑 반란형(半卵形) 토기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시베리아 흑룡강 상류 쉴카강 북안의 석회굴에서 나온 빗살무늬토기는 바이칼 지구를 비롯한 범시베리아 신석기문화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한강 유역의 첨저 토기와 함경도의 평저 토기도 원래는 한 뿌리로 알타이 지역을 포함하는 바이칼호 주변이 그 진원지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설명이다.
이를 정리하면 빗살무늬토기가 한반도 지역은 물론 만주, 시베리아, 유럽 등지에서도 발견됨을 감안할 때 신석기시대에 인류가 시베리아에서 몽고를 거쳐 만주 지방과 한반도에 퍼졌다고 설명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빗살무늬토기는 빗 모양의 무늬새기개을 이용하여 그릇의 겉면에 각종 기하학적 무늬를 새긴 것으로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를 대표한다. 이러한 기하학무늬는 원래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바이칼ㆍ몽골까지 퍼졌던 고대 시베리아인들과 관련된 것으로서 시베리아를 거쳐 한반도에 유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반면에 빗살무늬토기의 시베리아기원설에 대립되는 동이족 기원설은 빗살무늬토기의 분포가 결코 유동방향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부터 출발한다.
즉 이 토기의 분포를 유동방향으로 착각하면 빗살무늬토기가 서방에서 발원해 점차 동방으로 전파되었다는 이른바 ‘서양기원설’로 오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근래에 수집되고 있는 많은 고고학 발굴 성과를 기반으로 한다.
빗살무늬토기는 요동반도를 비롯하여 요녕성ㆍ하북성ㆍ산동반도 등 넓은 지역에서 발견된다. 중국의 자산ㆍ배리강 지역 문화에서는 이른바 ‘지(之)’자형 빗살무늬토기와 ‘인(人)’자형(어골문이라고도 하며 북한에서는 이깔잎무늬 혹은 전나무잎무늬라고 함) 빗살무늬토기가 나온다. 발해연안 북부 대릉하 유역의 홍륭와문화와 홍산문화권에서도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다. 요하 하류의 심양 신락문화와 소주산문화 지역에서도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다.
한반도에서는 압록강ㆍ대동강ㆍ재령강ㆍ한강 등 서해안 일대와 두만강 유역 및 동해안 그리고 남해안과 남해 도서지방 등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며 이들 토기의 시대 편년은 대체로 남과 북이 비슷하다.
특히 요동반도와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의 태토(胎土) 성분도 서로 비슷하다. 또한 초기 빗살무늬토기 유적에서는 세석기(細石器)나 타제석기가 마제석기와 함께 출토되고 있는 점도 주목 대상이다.
빗살무늬토기는 중국 내몽고 지역과 러시아 연해주에서도 잇달아 발굴됐다. 내몽고 지역 신석기 유적인 싱룽와(興隆窪) 유적 최하층에서 빗살무늬 토기들이 대거 쏟아졌는데 이것들은 기원전 6000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내몽고에서 발견된 토기가 주목받는 것은 빗살무늬 또는 사각형 안에 여러 겹의 빗금을 그어 넣은 기하학적 무늬를 갖고 있어 한반도 신석기 유적에서 출토되는 빗살무늬토기와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의 임효재 교수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한반도와 내몽고 지역에서 같은 토기가 나왔다는 것은 과거에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역이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중국에서 동이지역으로 부름).
러시아 연해주의 카마 신석기 유적에서 발견된 토기도 기원전 4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한반도의 첨저형(尖底型, 바닥이 뾰족한 모양) 빗살무늬토기와 유사하다.
주로 청천강 이남에서만 출토되던 첨저형 빗살무늬토기가 연해주에서도 나왔다는 것은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일대가 고대에 동일 문화권을 형성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증거다.
물론 중국의 허우와와 샤오주 지역 등 일부지역에서도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된 적은 있으나 제작연대가 한반도에서 출토된 것들보다 2000~3000년 늦은 기원전 3000~4000년이다. 학계에서는 한국의 신석기 문명이 일부 중국지역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선문대의 이형구 박사는 발해 연안에서 발견되는 빗살무늬토기의 연대를 보면 대략 기원전 6000년에서 5000년경인데 반해 동유럽이나 시베리아의 빗살무늬 연대는 대체로 기원전 5000에서 4000년경임에 주목하여 이들보다 한국의 빗살무늬토기가 무려 1000년 이상이나 앞섰다는데 주목했다. 또한 시베리아의 빗살무늬토기는 무늬 새기는 방법과 그릇의 모양이 다르다는 것도 지적했다.
정수일 박사는 빗살무늬토기의 중요성은 그것이 우리의 고대문화가 중국과는 무관하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입증해주는 데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의 도기는 채도(彩陶)에서 흑도(黑陶), 다시 백도(白陶)로 전승되어 우리의 토기와는 다른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이들 증거를 감안하여 이형구 박사는 우리나라에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사이에 공백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서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특히 북한의 서국대는 『조선의 신석기시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조선옛류형 사람들은 조선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아세아대륙 동쪽의 넓은 지역에 퍼져 살멸서 자기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환경과 조건에 맞게 자연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줄기찬 창조적 노동을 통하여 신석기시대의 문화를 창조하는 길에 들어섰다.’
이와 같은 고고학적 성과는 그동안 한반도 신석기와 청동기 문화가 시베리아에서 유래했다는 시베리아기원설이 아니라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역 일대를 묶는 발해만 연안에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 문화권이 형성됐음을 뒷받침한다는 주장이다.
참고로 한반도 지역의 빗살무늬토기 문화가 청동기시대에는 중국 동북지역 등에서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 문화로 발전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음을 덧붙여 둔다. 이는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 지역이야말로 한민족의 삶의 터전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정수일 교수는 한국의 빗살무늬토기가 무늬에서 북유럽이나 서부시베리아의 것과 차이가 있는 점을 들어 한국의 토기를 ‘빗살무늬토기’로 부르지 않고 ‘유문(有文)토기’나 ‘기하무늬토기’로 부르자는 주장이 있다고 적었다.
'어!그래?(한국불가사의) > 한민족과 중국인 차별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동이)과 중국(화이)(6) : 적석총 (0) | 2020.11.04 |
---|---|
한국(동이)과 중국(화이)(5) : 곰토템 (0) | 2020.11.04 |
한국(동이)과 중국(화이)(4) : 옥기 (0) | 2020.11.04 |
한국(동이)과 중국(화이)(3) : 빗살무늬토기(II) (0) | 2020.11.04 |
한국(동이)과 중국(화이)(1) : 유전자분석 (0) | 2020.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