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그래?(한국불가사의)/한민족과 중국인 차별성

한국(동이)과 중국(화이)(4) : 옥기

Que sais 2020. 11. 4. 22:50

https://youtu.be/LD6urxLUd54

youtu.be/p1RjQPGp5Sk

3. 옥기

홍산 문화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은 다양하고 정교한 옥기.

의 특징은 강인하고 광택이 잘 나며 은은하고 부드러운 반투명성을 띄는데 이는 섬세한 섬유상 결정들이 치밀한 구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부분이 깨어지더라도 계속해서 깨지지 않는다. 이는 섬유의 길이를 따라 결합된 규소와 산소의 사슬평행하게 쪼개지므로 설혹 한 곳이 깨지더라도 다음 사슬이 갈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참고적으로 영어로 ‘jade'라고 부르는 것은 옛날 사람들이 으로 신장의 결석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스페인어로 콩팟을 뜻하는 hyada'에서 유래했다.

은 신석기에 해당하는 홍산 유적에서 거의 전부 발견된다. 그런데 이들 무덤에서 발견되는 은 상당한 의미를 품고 매장된 것이다. 옥기가 발견되지 않고 도기만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는 등급이 낮은 사람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옥기((玉龍. 돼지나 곰), 돼지-, 물고기, 거북이, 매미, 부엉이 같은 다양한 토템, 그리고 옥벽(玉壁)옥환(玉環)구름무늬장식(勾云纹佩飾) 등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이중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인 것은 옥룡(玉龍)과 결상이식(옥귀거리)이다. 옥룡에 대해 먼저 설명한다.

 

 이는 매우 딱딱하고 묵직하여, 장봉상 이를 폐철이라 생각하고, 집으로 가져갔다. 당시 예닐곱 살의 어린아이였던 그의 동생 장봉량(張鳳良) 형이 갖고 온 갈고리와 같은 물건에 줄을 묶어 끌고 다니며 또래 친구들과 마을에서 놀았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자 갈고리 광택 나타 그제 장봉상그것이 커다란 옥기임을 알고 옹우특기문화관으로 찾아가 신고했다. 문화관의 직원 왕지부(王志富)신고 규정에 따라 이 물건을 받고 단돈 30을 지불했으나 별다른 생각 없이 창고에 방치했다.

1984 옹우특기문화관 책임자 가홍은(贾鸿恩) 우하량 지역에서 5000년을 상회하는 옥기계속 발견된다는 소식을 듣고 1971 접수된 옥기 떠올렸다. 그는 창고에 방치된 옥기가 매우 진귀한 문물일수도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곧바로 북경의 유명한 고고학자 소병기(蘇秉琦)에게 감정을 부탁했다. 이것이 중국에서 최초로 발견용의 시원으로 대는 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곧바로 중화제일옥조룡(中華第一玉雕龍)으로 명명되었다.

중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이 옥조룡(玉猪龍으로도 적음)묵록색을 띄며 길이 26센티미터, 무게는 1킬로그램으로 완벽한 형태를 갖고 있었다. 추후에 굽어진 형태가 마치 영어 문자 C와 같아 C형 옥저룡(玉猪龍)이라고도 불. 이를 옥저룡이라고 부르는 것은 옥으로 만든 돼지용이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대형 옥룡 하나의 원료의 조각으로 입술부분은 앞으로 튀어나오고 약간 위로 굽었으며, 입은 닫았고 눈은 돌출되어 마름쇠형 띈다. 용체의 횡단면 타원형 띄고 용의 등부에는 단공 있으며 부조(浮雕) 전조(淺雕)수법 운용이 섬세하고, 통체를 다듬어 빛나고 매끄럽다.

옥저룡(玉猪龍)이란 이름은 중국의 손수도 박사가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가 옥저룡이 원시용이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용의 모습의 원형으로는 도마뱀, , 악어, , , 등 많은 동물을 거론한다. 그런데 옥저룡을 원시용으로 보는 것은 용의 원형이 돼지라는 것을 뜻한다. 특히 예기에는 종묘에 제사를 지내는 것에는 돼지의 목덜미 털로 한다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돼지를 중국인들이 중요시하는 용의 기원으로 보는 것이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보아도 용을 돼지로 보는 견해는 매우 많은 지지를 받았다. 당시에 이미 농경사회로 들어섰으므로 적어도 돼지를 사육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은 타당하게 여겨졌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돼지가 중요시된 것은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주역에는 용은 구름이다또는 용은 물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용이 물과 동일시되었는데 물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물 즉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제사지낼 때 제물로 돼지를 사용했다고 추측한다. 이런 점은 우하량 지역의 동산에서 발견된 한 무더기의 돼지 뼈로도 증명된다.

고대인들이 돼지기우제 지낼 때 사용했는데, 물이나 용이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을 볼 때 돼지 또한 물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결국 용과 돼지는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는 논리이다.

손보기의 용에 대한 견해가 큰 주목을 받은 것은 오늘날에 보이는 것처럼 용은 후대로 갈수록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그 원시적인 형태가 홍산문화에서 발원되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현재 중화오천년역사(中華五千年歷史)를 주장할 때도 용의 탄생을 홍산문화와 연계시키고 있다. 즉 요서지방의 홍산문화 유적에서 이와 비슷한 기물 또는 문양이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자연스럽게 용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중국인들이 옥룡을 중요시하는 것은 옥룡홍산인들이 숭배하던 신의 형상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인들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치는 홍산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중국인들은 홍산인이 중국에서 최초로 용을 신령으로 숭배한 민족이며 이후 용이 신격화되어 중원지역으로 전파되어 현재 중국인들이 용을 생활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홍산문화 다양한 옥룡

그러나 이와 같이 홍산의 용중국 용의 시조로 확정되기까지에는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1987하남성(河南省) 복양시(濮陽市) 서수파(西水坡) 앙소문화유적지 1호 묘에서 놀라운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흰색의 조개껍질로 정성스럽게 형상을 만들어 놓은 원용문으로 된 용형상물로 이를 방소룡(蚌塑龍)이라고도 부른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용은 힘차게 앞으로 기어가는 느낌을 준다. 특히 무덤 주인좌측에는 용의 형상이 있고 우측에는 호랑이 형상이 있어서 보다 큰 주목을 받았다. 그것은 음양오행론과 풍수지리에 입각한 좌청룡, 우백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학근은 이 발굴을 근거로 사신도(四神圖)의 기원서수파에서 기원한다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탄소연대측정에 의해 적봉시 옹우특기(翁牛特旗) 삼성타라촌(三星他拉村)의 홍산 문화유적보다 빠른 기원전 4460±135년으로 확인되자 중화제일의 자리가 바뀌었다. 그러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를 천하제일으로 부르기도 한다. 복양시에서는 재빨리 천하제일 발굴을 기념하여 중국 용의 고향이라는 중화(中華龍鄕)'이란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서수파에서 용의 형상물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홍산문화에서 발견된 용이 중국이 자랑하는 용의 시원이라고 주장하는 데 문제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일부 학자들은 용의 시원을 북방지역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남성 등 중남부지역에서 찾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도 잠시 1994년에 또 다시 놀라운 용 형상물사해문화에서 발견되었다. 사해문화는 요령성 서부 의무려산 동쪽의 부신(阜新) 몽고족 자치현에서 발달된 문화로 흥륭와에서 세계 최초의 옥 귀걸이가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제일옥이 발견된 지역이며 역시 흥륭와에서 중화제일촌이 발견되기 전까지 요하제일촌으로 불리던 집단 주거지가 발견된 곳이다.

사해유적지에서 발견된 용형상물을 석소룡(石塑龍)이라고 부르는데 길이가 19.7미터, 넓이가 12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한다. 그런데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석소룡이 서수파에서 발견된 중화제일용보다 무려 1200년이나 앞선 기원전 5,6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중화제일용(옹우특기박물관)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학자들은 서수파의 것이 중원의 앙소문화에서 발견되었음을 우대하여 서수파의 방소룡중화제일룡으로 계속 고집했다. 그러나 사해유적에서 발견된 빗살무늬 토기 위에 부조로 장식된 용의 문양이 발견되자 결국 2004년 중국학자들은 사해유적에서 발굴된 용형상물을 중화제일룡으로 확정했다. 중화제일룡의 영예가 홍산문화 쪽으로 다시 돌려진 것이다.

 

<옥은 국가 성립의 증거>

홍산지역에서 발견되는 옥룡 옥저룡 대흑룡 대청룡 옥조룡 대홍룡 소청룡 황색포장룡(黃色包漿龍) 변색룡 이십여 종으로 구분된다. 다양한 형상의 패옥형 옥룡들도 발견되는데 이는 돼지가 아니라 곰으로 추정한다. 이들은 동그랗게 말린 몸체와 뭉툭한 주둥이를 갖고 있으며 갈기가 없고 아래위로 교차된 송곳니를 표현하고 있다. 커다란 눈과 가운데 뚫린 구멍이 인상적인 이 작은 은 일반적으로 시신의 가슴에 놓여있다.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옥기 가운데 동물의 머리를 양쪽 끝에 조각한 쌍수수삼공기(雙獸首三孔器)가 있는데 여기에 조각된 동물 머리도 곰으로 추정한다. 이들 다양한 옥들은 홍산문화의 특징으로 장식 또는 상징적이거나 제례적인 가치를 지녔던 것으로 추정한다.

조형이 간단하고 질박하며 옥을 갈아서 홈을 만들기도 했고 옥기가 숨겨지는 양문과 사면능선 만지면 느껴지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특히 쌍안천동단면성공법(雙眼穿洞單面成孔法) 공예의 독특한 특징이다.

이들은 대부분 돌무덤의 중앙에 있는 돌널무덤에서 출토된다. 시신의 각 부위에는 많은 옥기들이 발굴되는데 지배자의 돌널무덤에서는 옥기가 많이 발견된다. 우하량 제2지점 1호 돌무덤에서는 20점의 옥기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홍산문화 무덤 한 곳에서 나온 옥기 숫자 중에서 최다이다. 그는 짐승 얼굴 모양의 옥패(玉牌), 옥거북이, 옥베개 등으로 치장했다. 이는 피장자의 신분에 따라 부장품에 차별이 있다는 것으로 당시에 이미 신분이 나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옥이 특별한 용도를 갖고 부장되었다는 것은 신비의 왕국이 존재했다는 우하량에서 잘 보여준다. 실제로 우하량 유적 군에서 발굴을 끝낸 무덤은 모두 61기인데 그 가운데 부장 묘는 31, 이중 옥기만 넣은 묘는 26기에 이른다. 부장묘의 80% 이상이 유옥위장(唯玉爲葬, 옥으로만 장례)한 것으로 홍산 우하량의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우하량 제5지점 중심대묘에서 남성 1구의 인골과 7점의 옥기가 출토되었는데 양 귀에 옥벽(玉璧), 즉 둥근 옥이 양 귀 밑에 가지런히 놓여 있고, 가슴팍엔 구름형 옥장식이 놓여 있다. 또한 그 아래 말발굽형 옥기가 있으며, 오른팔엔 옥팔찌가 놓여 있다. 학자들은 양손에 옥거북이가 쥐어져 있는 것을 볼 때 이 무덤의 주인공을 무인(巫人)이라고 추정한다. 여기에서의 무인의 현대 개념의 무당이 아니라 신과 통하는 독점자로서 교주이면서도 왕과 같은 신분을 뜻한다.

우하량 유적 군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16지점의 중심대묘에도 성인 남성이 발견되었는데 이 묘의 주인공도 5지점 중심대묘와 마찬가지로()과 소통할 권리를 독점한 무인(巫人)으로 추정한다. 특히 이곳에서는 으로 만든 무인모습의 인형과 봉황이 발견되었다.

 

옥기 출토모습

홍산의 무인은 천지신에게 제사 지내는 특권을 갖고 천지를 관통하는 능력을 보이면서 하늘과 땅의 경지를 아는 지식인으로 추앙되었다. 즉 중앙 대형묘의 주인공은 신과 통하는 독점자로서 무인(巫人)이자 통치자제정일치 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이 당시 이미 집단의 수령이 출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자들은 옥기를 독점하고 제작하는 과정에서 신분계급이 생기고 전문화분업화가 이뤄졌으므로 하늘과 소통하는 독점자가 고국(故國)을 통치하였다는 이른바 제정일치 사회였다고 설명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하량에서 가장 많은 옥이 매장된 2지점 1호 돌무덤은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옥의 숫자도 많은 것은 물론 질적인 면에서도 다른 돌무덤에서 발견되는 옥과 다소 다르다. 곽대순옥거북이를 양손에 쥐고 있는 묘주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고인은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신과 통하는 권력임을 체현하고 있다. 고인이 묻힌 중심대묘는 중소형 무덤들의 호위를 받고 있으며, 거대한 방형 혹은 원형의 적석총으로 돼 있다. 옥거북이를 쥔 주인공인 일인독존(一人獨尊)의 위상을 나타내주고 있다.”

 

즉 이 무덤의 주인공은 신과 통하는 독점자로서 교주이면서, ()의 신분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소위 제정일치 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의 일편을 보여준다는 설명이다. 이것이 중국 고고학계에서 홍산 문화 시대에 이미 고국(古國), 즉 원시국가 단계에 돌입했다고 결론을 내린 이유이다.

 

중국 후대로 내려오면 옥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진다. 예로부터 중국은 옥을 숭상하는 나라예기(禮記)자고로 군자는 반드시 패옥을 찬다고 기록할 정도이다. 고대인들은 하늘 운행의 궤적에 있는 태양을 관찰하고 둥근 옥벽(玉璧)을 만들었다. 이것으로 하늘과 태양을 숭배했다. 또한 땅을 사각형으로 생각하고 옥종(玉琮·사각형 형태의 옥)을 만들어 땅에 제사를 지냈다. 중요한 것은 석기와 토기 같은 것들은 생활용품들이지만 옥기관념 형태의 창작물이었다는 점이다.

중국인들의 이러한 옥에 대한 신봉홍산문화로부터 유래된다는데 중요성이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생명은 하늘이 부여하는 것이며, 신령한 동물과 산수, 토지 등은 서로 영물처럼 치환된다고 보았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제기에 신비로운 문양과 부호, 상형문자 등을 깎아 넣었다. 부락마다 각종 동물 옥장식으로 제사에 쓰이는 신기(神器)와 그들이 숭배하는 토템을 만들어 그들 사회의 번성과 풍성한 수확을 바랐다. 이러한 전통은 홍산인들이 장례 부장품으로 물질문화를 배척하고 정신문화 범주에 속하는 옥만 부장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홍산인들이 정신문화를 중시하는 사유관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우하량 옥기 출토

우하량 돌무덤에서 보이는 무인(巫人)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나라 때 자전인 설문(說文)』에 다음과 같이 ()를 설명한다.

 

()자는 밑의 무()가 옥으로(가운데 입 3) 신과 소통한다(以玉通神)는 뜻이다.’

 

중국학자들은 ()는 인간과 신의 왕래자라고 해석한다. 인간의 대표이면서 신의 의지를 체현(體現)하는 사람을 무인이라고 인식하는데 은 무인이 신에게 헌납하는 예물이라는 점이다. 무인은 신과 소통을 통해 옥을 독점하고, 옥을 통해 스스로가 신적인 존재임을 만천하에 알린다. 결국 무인(巫人)과 하늘()과 옥()삼위일체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중국 고고학계에서 훙산문화 시대에 이미 고국(古國), 즉 원시국가 단계에 돌입했다고 결론을 내린 이유이다. 그러므로 중국 상고사에도 변화가 예견된다. 즉 중국 상고사에서 (·)석기청동기철기3단계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의 시대를 넣어 석기옥기청동기철기4단계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미 2000년 전부터 나왔다. 후한원강이 지었다는 월절서(越絶書·춘추전국시대 월국의 흥망을 기록한 책)에 따르면풍호자(風胡子)라는 사람이 초나라 왕에게 치국의 도를 이야기 하면서 옥기시대를 언급했다. 이형구 박사옥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했다.

 

옥기의 출현·제작은 엄청난 의미가 있다. 옥기를 독점하고 제작하는 과정에서 신분계급이 생기고, 전문화·분업화가 이뤄졌다. 하늘과 소통하는 독점자가 고국을 통치하는 이른바 제정일치 사회의 개막을 뜻한다. 그걸 동이족이 창조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