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아틀란티스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2)

Que sais 2020. 11. 7.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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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문명은 아틀란티스로부터 시작>

슐리만의 트로이 발견과 에반스의 크레타 문명 발굴로 아틀란티스 대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을 때, 미국의 정치인 이그나티스 도넬리(Ignatius Donnelly, 18311901)가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스물여덟 살에 미네소타 주의 부지사로 당선될 만큼 정치적 역량이 있던 도넬리는 이후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의회에 소장된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특히 그는 '위대한 암호'라는 책에서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 저술한 것이라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도넬리의 아틀란티스

하지만 세상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저서 '노아의 홍수 이전의 아틀란티스 대륙'(1882)과 '신들의 황혼, 불과 돌의 시대'(1883)가 지금까지 50회 이상 재판(再版)됐을 만큼 베스트셀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틀란티스가 심한 지진과 홍수로 하룻밤과 낮 사이에 없어졌다'는 플라톤의 이야기를 뒷받침하기 위해 전 세계에 흩어진 전설을 수집 및 정리해 아틀란티스에 관한 13가지의 명제를 발표했다. 여기서는 일본의 초고대사 연구가 고이즈미 겐다로(小泉源太浪)의 설명을 인용하기로 한다.

 

옛날에 지중해 저편 대서양에 큰 섬이 있었다. 고대인은 그 섬을 아틀란티스라고 불렀다.

플라톤이 묘사한 이 섬은 오랫동안 우화로 취급되었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미개 상태의 인류가 최초로 문명을 일으킨 곳은 아틀란티스다.

세월이 흘러 아틀란티스는 많은 인구를 거느린 강국이 되었다. 인구가 많아지자 그들이 각지로 퍼져 멕시코 만, 미시시피강, 아마존 강, 남미 태평양, 지중해, 유럽, 아프리카 서안, 발트 해, 흑 해, 카스피 해 등의 주변에 문명국가를 건설했다.

아틀란티스인은 대홍수 이전에 국가를 세웠다. 에덴동산, 헤스페리데스의 나라, 엘리시온의 들판, 알키누스의 나라, 올림푸스 등 전설상의 낙원은 먼 옛날 인류가 행복을 누리던 시절에 세워진 국가 중 일부에 대한 기억이다.

고대 그리스인, 페니키아인, 인도인, 스칸디나비아인이 숭배하던 신과 여신아틀란티스의 왕이나 영웅들의 이름이다. 신화 속에서 이들 신과 여신이 한 일은 역사적 사건을 상징적으로 전한다.

이집트나 페루의 태양 숭배 신화는 아틀란티스에서 기원한다.

아틀란티스인이 건설한 가장 오래된 식민지는 이집트로 추정된다. 이집트 문명은 아틀란티스 섬의 문명을 그대로 답습했다.

유럽의 청동기시대 기물은 아틀란티스에서 유래했다. 아틀란티스인은 최초의 철기 제조자이다.

유럽 알파벳의 기본이 된 페니키아의 알파벳은 아틀란티스의 알파벳에서 유래한다. 이 알파벳은 중앙아메리카의 마야인에게도 전해졌다.

아리아계, 즉 인도 유럽어족, 셈어족, 투란계(우랄알타이어족)의 발상지도 아틀란티스.

자연의 큰 변동으로 아틀란티스 섬 전체와 함께 주민들도 수장되었다.

배나 뗏목에 의지해 재앙을 피한 극히 일부 사람이 아틀란티스의 상황을 동과 서에 알렸다. 이 이야기가 구세계와 신세계(동반구와 서반구) 각 지역의 대홍수 전설로 전해져 온다.

 

도넬리의 주장은 한마디로 아틀란티스는 인류 문명의 근원이며 모든 고대 문명은 아틀란티스로부터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아틀란티스 대륙이 대서양 한가운데에 존재했다고 설파하는 그는 그 증거로 각 대륙에 퍼져 있는 피라미드, 미라의 보존 기술, 태양력 등을 예시했다. 특히 전 세계에 고루 분포된 대홍수의 전설에 주목한 그는 홍수 전설이 세계인에게 각인된 이유는 아틀란티스가 멸망할 당시의 기억이 범세계적으로 전파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도넬리

특이한 점은 그가 흥미로운 생태계의 수수께끼를 증거로 제시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길고 험난한 여행을 한 뒤 사르가소 해에서 산란을 하는 뱀장어의 번식 습관아틀란티스 대륙의 강에서 지낸 과거의 경험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도넬리는 아틀란티스 제국의 국민을 세 인종으로 구분하고 있다.

첫째, 가장 개화된 인종으로 체격이 작은 적갈색 피부의 종족이다. 오늘날의 중앙아메리카나 인디언, 베르베르족, 이집트인과 다소 비슷하다. 둘째, 셈족의 후손으로 황색인 혹은 우랄알타이어족일 가능성이 크다. 셋째, 체격이 크고 피부가 흰 인종으로 오늘날의 그리스인이나 스칸디나비아인 혹은 켈트족과 비슷하다.

이들 세 인종은 한때 지배권을 차지하려 다투기도 했지만 곧 서로 협조해 세련된 청동기 문화를 창조했다. 도넬리는 대재난이 덮칠 무렵, 이들이 철기시대에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여러 시대를 거쳐 아틀란티스는 인구가 많은 강력한 나라가 되었다. 이들은 멕시코 만, 미시시피 강, 아마존 강 유역, 남아메리카의 태평양 연안 지역, 지중해, 유럽의 서부지역 및 아프리카 등으로 퍼져나가 문명을 꽃피웠다.’

 

신생 독립국가인 미국아틀란티스의 식민지였다는 도넬리의 주장이 미국인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는 가장 오래된 아틀란티스의 식민지는 이집트로 추정되며 이집트 문명은 아틀란티스에서 번성했던 문명의 복제판으로 보인다고 했다. 다음의 글은 그가 얼마나 아틀란티스 대륙의 존재를 확신하는지 잘 보여준다.

 

오늘날 과학적 조사는 문지방을 넘어 거대한 진보의 물결 위를 걷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백 년 뒤에 세계의 유수한 박물관은 모두 아틀란티스로부터 전파된 보석과 조각, 무기 같은 유물을 전시하게 될 것이며, 세계의 도서관은 아틀란티스의 비문을 해석한 기록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도넬리의 주장은 미국 전역을 아틀란티스 열기 속으로 몰아넣었고, 심지어 뉴올리언스에서는 아틀란티스를 주제로 한 사육제(Mardi Gras)가 기획되기도 했다(1883). 특히 그는 방대한 자료를 이용해 인류 문명의 근원이 된 대륙의 모습을 복원하려 했지만, 플라톤의 이야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일반인이 수긍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내용을 많이 첨가해 신뢰를 잃기도 했다.

스코틀랜드의 신화학자 루이스 스펜스(Lewis Spence)는 도넬리의 가정에 좀 더 과학적인 근거를 첨가해 아틀란티스의 존재를 주장했다. 그는 󰡔아틀란티스 대륙의 문제점󰡕이라는 저서를 통해 북대서양의 가장 큰 부분이던 광대한 대지의 지형적 증거를 찾아냈다고 발표했다. 그 대지는 두 개의 다른 섬으로 분열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서쪽에 위치한 서인도 제도이고 나머지가 지브롤터 해협, 스페인 반도 옆에 존재했을 아틀란티스 대륙이라는 것이다. 이는 아틀란티스 문명서인도 제도의 마야 문명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펜스는 도넬리와 달리 아틀란티스가 여러 차례의 자연재해를 만나면서 멸망했다고 주장했다. 그 재앙 중 첫 번째는 25,000년 전에 발생했는데 그곳은 초기 유럽인이 거주하던 곳으로, 이는 곧 아틀란티스인은 유럽 석기시대의 크로마뇽인이라는 얘기다.

벌리츠의 아틀란티스의 미스터리

아틀란티스 대륙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면서 마침내 UFO 신드롬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찰스 H. 햅굿(Charles Habgood), 랜드 플렘-아스(Rand Flem-Ath) 부부, 그레이엄 핸콕(Graham Hancock)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찰스 벌리츠(Charles Berlitz)가 아틀란티스 대륙과 버뮤다 삼각지대의 수수께끼를 절묘하게 버무려 󰡔아틀란티스의 미스터리󰡕, 󰡔잃어버린 세계의 미스터리󰡕, 󰡔버뮤다 삼각지대󰡕 등의 베스트셀러를 출간하면서 아틀란티스가 실존했다는 것이 기정사실처럼 굳어져 갔다.

벌리츠는 재능 있는 이야기꾼이다.

그는 우선 이스탄불에서 발견된 터키의 해군 제독 피리 레이스(Piri Reis)의 남극지도를 들어 초고대문명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희미하게 존재했다는 근거로 삼았다. 이 지도에는 현재 얼음 밑에 묻혀 있는 수천 미터의 남극 대륙 해안선이나 오지의 지형들이 그려져 있다. 그는 이 지도가 아틀란티스인의 작품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적고 있고, 과거에도 전기가 사용되었으며 확대용 렌즈, 톱니바퀴가 있는 태엽장치는 물론 기원전에 이미 화약 등을 사용했다는 분명한 증거가 발견되었다며 미세하나마 첨단지식이 세계 각지에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과거에 기록된 지식은 현재 그 1/10도 남아 있지 않으며, 그 이유는 광신적인 종교인들이 무자비하게 파괴하거나 첨삭 및 왜곡했기 때문이라고 몰아세웠다. 나아가 아틀란티스 후예들이 남긴 거석문화 유물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피리레이스 제독의 지도

그는 이집트가 아틀란티스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훨씬 앞선 문명을 도입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집트의 후예들이 영국의 스톤헨지와 아메리카 대륙의 마야 및 잉카 문명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과, 이스터 섬의 석상이나 나스카 문양이 거석문화에 포함된다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스펜스와 마찬가지로 아틀란티스가 하룻밤과 낮 사이에 사라졌다는 플라톤의 말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12,000년 전에 최후의 빙하가 급격히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는(120160미터) 바람에 대륙 연안의 평지와 섬들이 물 속에 잠겼고, 이때 대홍수 이전에 존재했던 초고대문명이 사라졌다고 했다. 또한 그는 예언가 에드거 케이시(Edgar Cayce)가 예언했던 비미니(Bimini, 바하마 군도) 에서 사라진 건축 구조물들이 갑자기 발견된 사실을 들어 이들 지역이야말로 아틀란티스 대륙의 일부라고 말했다.

 

<아틀란티스는 기자들의 먹잇감>

아틀란티스 대륙에 관해서는 말도 많고 탈도 많다. 19121020일 미국의 일간지 <뉴욕아메리칸>에 놀라운 기사가 발표되었다. 기사 제목은 나는 어떻게 아틀란티스를 발견했는가?로 여기에서 하인리히 슐리만의 손자 파울 슐리만이었다. 기사 내용은 매우 충격적이다.

 

내 할아버지 하인리히 슐리만은 1890년 나폴리에서 사망했는데, 사망하기 며칠 전 한 친구에게 봉인된 봉투 하나를 건네 주었다. 그 봉투에는 슐리만 집안사람으로 서류 내용에 언급된 연구사업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맹세하는 사람만 개봉할 수 있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맹세를 한 후 신비의 봉투를 열었다. 또한 할아버지는 사망하기 1시간 전에 떨리는 손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봉인된 봉투에 대한 부언(附言). 부엉이 머리가 달린 호리병을 깨뜨린 후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조사하라. 그것은 아틀란티스와 관계가 있다. 사이스 신전의 동쪽과 샤쿤의 묘를 발굴하라. 그곳에서 내 이론의 정당성을 알게 될 것이다.’‘

 

러시아와 독일, 동양에서 수년간 공부한 파울1900년 비밀의 봉투를 개봉했다. 봉투 속에는 슐리만의 글이 들어 있었다.

 

나는 아틀란티스가 아메리카와 서아프리카 및 유럽 사이의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인류에게 공통된 문화의 요람지였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봉투 속에는 트로이 유적에서 발굴한 부엉이 머리가 달린 호리병이 있었고, 거기에는 페니키아의 상형문자로 아틀란티스 왕 크로노스로부터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또한 트로이와 남미의 티아우아나코(Tiahuanaco: 남아메리카 볼리비아의 수도 수크레에 있는 선사시대 도시의 폐허)에서 출토된 항아리가 서로 유사한 것으로 볼 때 틀림없이 아틀란티스가 그 유래지일 것이라는 서류도 동봉되어 있었다. 호리병을 깨뜨린 파울은 그 속에서 사각형으로 된 은색 금속판을 발견했다. 알 수 없는 문자와 페니키아 문자가 새겨진 금속판에는 투명한 벽의 신전으로부터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파울은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사이스 유적지를 조사해 호리병 속에서 나온 것과 똑같은 금속판을 발견했고, 멕시코와 페루에서도 동일한 금속판을 발견했다. 그뿐 아니라 마야의 사본과 티베트의 라사에 있는 사원의 문서에서 수수께끼의 (Mu) 대륙 즉 태평양 중부에 있다고 알려지던 상상의 대륙에 대한 기록도 발견했다.

슐리만의 손자 파울이 발표했다는 것만으로도 기사의 진위는 의심받지 않았고 아틀란티스 대륙에 대한 관심은 폭발했다. 이 기사는 고전적 추리물의 요소는 물론 고대문명에 대한 신비적 요소까지 갖춰 더욱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파울이 주장한 봉투와 그밖에 다른 유물은 공개되지 않았고, 본인마저 행방불명이 되면서 결국 진상이 밝혀졌다. 그것은 한 신문기자가 만들어낸 픽션이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히틀러의 나치친위대게슈타포가 아틀란티스 대륙을 발견하기 위해 대규모 탐사대를 조직해 아틀란티스 대륙 프로젝트를 수행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아틀란티스로 알려진 북유럽, 중앙아메리카, 베네수엘라 등으로 탐사대를 파견했다. 그 목적은 아리안족인 독일인이 전 세계에서 가장 능력과 자질이 있다는 생각에 우수한 민족의 선조로 아틀란티스인이 걸맞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은 초고대문명을 지녔다고 알려진 아틀란티스인의 유적을 찾으면, 그들의 초인적인 능력과 정신을 독일인에게 불어넣음으로써 세계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히말라야에 살고 있다는 전설적인 설인(雪人)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티베트에 산악팀을 파견하기도 했다. 설인의 선조는 네안데르탈인이고 이들이 아틀란티스인이 되었으며 이어 아리안으로 계보가 이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설인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았던 유럽에서는 설인을 찾기 위한 히말라야 탐험에 수많은 독지가가 자금을 지원했다. 영국의 힐러리 경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것도 사실은 설인을 찾는 데 힘쓰겠다고 해서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영국은 물론 독일의 삐뚤어진 목표도 성사되지 않았지만 전 세계로 파견된 독일의 탐사대는 과학 분야, 특히 고고학 분야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다.

 

티베트에서 7년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티베트에서 7Seven years in Tibet은 당시 독일에서 아틀란티스 대륙을 찾아 나선 탐험대원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의 이야기다. 산악인이자 작가, 인권운동가였던 하러는 실존 인물로 독일의 탐험대 일원으로 히말라야를 등반하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영국군에 체포되었다. 이후 포로수용소를 탈출한 그는 티베트에 7년간 머물며 열세 살에 종교지도자가 된 달라이 라마와 우정을 쌓았다.

그런데 새롭게 중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한 모택동은 총칼을 앞세워 티베트를 점령했다. 이때 100만 명의 티베트인이 죽었고 6,000여 곳의 사원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영화는 하러가 목격한 티베트 점령 당시의 정황을 묘사하고 있고, 역사의 산증인이던 그는 2006년에 사망했다. 그리고 1959년에 인도로 피신한 달라이 라마는 아직도 고향인 티베트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