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아틀란티스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6)

Que sais 2020. 11. 7. 17:42

youtu.be/N02JdJgenFM

 <버뮤다에서의 실종은 아틀란티스인의 작품>

아틀란티스 신봉자들에게 케이시의 예언이 매력적으로 다가간 이유는 그동안 많은 학자가 아틀란티스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주장했던 질문을 말끔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틀란티스 대륙12,000년 전에 초고대문명을 이룩했다면 그들 문명의 잔재가 어딘가에 남아 있어야 한다.

거석문화를 아틀란티스 후예들이 만들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지 못한 이유는 현대인이 보기에 거석 문명이 낙후된 기술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원자폭탄을 만들 만한 능력이 있었다는 아틀란티스인이 석기시대로 퇴보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논리가 대두될 수도 있다.

첫째, 문명의 퇴행이 이루어졌다. 재난을 피해 신천지로 이동한 아틀란티스인이 새로운 땅에서 자신들의 기술을 발휘하지 못하고 현지 환경에 동화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최첨단 기술과 지식이 있을지라도 새로운 땅에서 그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원자재를 확보할 수 없다면, 결국 석기시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철로 기계를 만들어야 하는데 철광이 없다면 어찌할 것인가.

둘째, 아틀란티스인이 고의로 지식을 파괴했다. 에드거 케이시의 예언에 따르면 아틀란티스에 닥친 비극은 핵폭탄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과학의 폐해를 물씬 맛본 아틀란티스인이 첨단지식과 비인간적인 기술을 모두 폐기했다는 것이다.

셋째, 지식 전수가 단절되었다. 아틀란티스의 첨단기술이 소수의 집단에게 독점되고 있었는데, 이들에게 피치 못할 재난이 닥쳤고, 그탓에 기술이 이전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넷째, 아틀란티스인이 아직도 버뮤다 삼각지대 안에서 첨단기술을 확보하고 살아있다. 이들 지역에서 일어나는 실종사건은 사실 아틀란티스인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연구하기 위해 불규칙적으로 버뮤다 삼각지대를 통과하는 사람들을 납치한다는 주장이다.

다소 믿기 힘든 이런 가설은 에드거 케이시가 아틀란티스인이 수정 에너지를 이용해 타임머신을 활용했다는 말에서 더욱 증폭되었다. 더욱이 당시에 불꽃처럼 타오르던 UFO 신드롬과 결합해 에드거 케이시의 예언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일부 신비주의자는 한 술 더 떠 UFO는 아직 살아있는 아틀란티스 후예들이 지상에 잠깐 나올 때 타고 다니는 비행체라고 주장했다.

 

아틀란티스 ,  잃어버린 제국

그중에서도 압권은 케이시가 사망하고 23년이 지난 뒤 그가 예언한 비미니 지역의 유적이 나타났다고 알려졌을 때의 반응이다. 케이시의 예언이 사실로 받아들여지면서 아틀란티스인과 버뮤다 삼각지대는 더욱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미스터리 중의 미스터리로 다시 태어났다. 케이시가 말했던 아틀란티스의 수정궁에 대한 관심은 2001년 개봉된 디즈니월드의 만화영화 <아틀란티스, 잃어버린 제국 Atlantis, The lost Empire>에서 주요 소재로 등장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우주 어디엔가 외계인이 살고 있다는 UFO 신드롬과 맞물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동경심과 환상, 기대감을 소재로 삼은 좋은 예이다.

 

<아틀란티스의 전설은 계속된다>

추측은 난무했지만 과학자들이 비미니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결과를 계속 발표하면서 버뮤다 삼각지대의 아틀란티스 설도 서서히 잠잠해졌다. 특히 1980, 미국 지질조사국의 유진 신은 대형 건축물처럼 보인다는 문제의 암석들을 연구해 아틀란티스 신봉자들에게 결정적인 펀치를 먹였다.

 

'비미니 해안의 해수면 5미터 밑에 있는 석회암 구조물은 자연적으로 생긴 비치록의 모든 특징을 지니고 있다. 만약 비미니 로드가 인공물일 경우 여러 암석 덩어리의 성분 및 구조와 결이 서로 같지 않아야 하는데, 여러 가지 검사 결과 암석들의 구조는 서로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누군가가 돌을 잘라 배치했다면 일부러 돌덩이들의 절단면을 똑바로 통일할 이유가 없다. 퇴적물의 적층(積層) 형성을 보면 이것은 인위적으로 깔아놓은 돌이 아니다.'

 

아틀란티스 추종자들을 환호하게 했던 비미니의 석조 구조물은 석회석 기반암이 바다 속에서 빠르게 암석화되면서 만들어진 자연 조형물이었다. 밀물이나 썰물 같은 조수의 작용에 의해 규칙적인 간격으로 바위에 침식작용이 일어남으로써 서로 일정한 각도로 모양이 이루어진 것이다.

 

비미니 해저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유사한 암반의 풍화작용을 찾아볼 수 있다. 화산암(火山岩) 암맥이나 용암(熔岩), 용결응회암(熔結凝灰岩) 등에서 생기는 절리(joint)가 그것이다. 절리는 암석의 틈새기나 파단면(破斷面)으로 일그러짐(변위)이 없거나 또는 거의 일그러짐이 인정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절리는 쪼개지는 방향에 따라 판상절리(板狀節理, Sheeting)주상절리(柱狀節理, Pillar-shaped)로 나뉘는데, 주상절리는 단면의 모양이 육각형이나 삼각형의 장주상(長柱狀, 긴 기둥 모양)을 이루는 절리를 말한다. 제주도 해안, 한탄강 등에 기둥 모양의 주상절리가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유명한 정방폭포와 천지연폭포도 이런 지형으로 형성되었다.

유신 신이 암석에 포함된 조개껍데기를 방사성 탄소연대측정법으로 조사한 결과는 아틀란티스 신봉자들을 더욱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는 비미니 로드가 대략 2,200년 전에 형성된 구조물이며 그 오차범위는 150년 전후라고 못 박았다.

마이애미 대학 탄소연대측정연구소의 제리 J. 스팁은 일곱 개의 암심(巖心: 시추기로 구멍을 뚫을 때 나온 둥근기둥 모양의 돌) 자료를 조사해 비미니 해저의 비치록이 형성된 연대를 알아냈다. 그가 얻은 수치는 2745년 전부터 3510년 전까지 다양했는데 이 역시 11500년과는 큰 차이가 있어 사실상 비미니의 아틀란티스 대륙설은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존 스틸과 함께 측정에 참가한 징크 박사는 비미니 로드가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에 반박하면서 돌이 자연적으로 형성되긴 했지만 사람의 손으로 놓여졌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자연적으로 생성된 큰 돌을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옮겼다는 얘기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대략 12000년 전에 최후의 빙하가 급속히 녹았을 때 얼마나 해수면이 높아질 수 있느냐로 귀결된다. 학자들은 이 질문에서 아틀란티스 신봉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들은 당시에 해수면이 120160미터나 상승했는데, 그 정도면 아틀란티스의 후보지로 알려진 비미니 지역의 상당 부분을 바다 속으로 침몰시킬 수 있다고 했다.

 

연대별 수몰지도를 보면 12400년 전 비미니 근처에는 한때 세 개의 섬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는 초승달 모양의 섬으로 지금의 그랜드바하마 섬, 그레이트아바코 섬, 리틀아바코 섬 근처이다. 두 번째는 현재의 엘테라 섬의 타르펌 만을 메우고 있으며 남쪽 땅은 쿠바에까지 이른다. 세 번째는 플로리다 반도 방향인 북서쪽에 있었는데, 지금의 안드로스 섬과 그레이트바하마 퇴적층의 대부분이 이 섬의 영역이었다. 6,900년 전의 모습을 묘사한 수몰지도에는 세 개의 주요 섬 연안이 감소되어 있지만 전체 모양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4,800년 전의 수몰지도에서는 모든 섬이 사라졌다.

 

오늘날 아틀란티스 대륙이라고 주장하는 지역의 1/3 이상이 아조레스 제도(경우에 따라서는 마데이라 제도 및 카나리아 제도 부근의 해저 고원 일대를 위치로 설정한다)를 거명하는 이유도 이런 수몰 역사 때문이다. 더욱이 이 지역은 플라톤이 아틀란티스의 위치라고 기록한 곳과 대체로 일치한다. 해수면이 높아지기 전인 12,000년 전에는 해면 위에 올라와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설명이다.

 

아조레스 제도

어쨌든 아틀란티스 대륙의 비미니설은 아직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아틀란티스 신봉자들은 여전히 비미니 지역에 인간이 만든 다른 고대문명 유적이 반드시 존재할 거라고 믿는다.

2001514, 로이터통신은 수심 700미터가 넘는 쿠바 서해안 근해에 도시 하나가 통째로 수몰되어 있다고 보도했다. 도시를 발견한 사람들은 쿠바 정부로부터 독점적인 허가를 받아 침몰선을 수색하고 있던 인양 작업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수심이 700미터나 되는 곳에 도시가 있다는 것은 해수면의 상승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구적 규모의 해수면 상승기에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는 추정이 가능하므로 아틀란티스 신봉자들은 그 소식을 즉각 반겼다. 안타깝게도 이들 유적은 아직까지 단 한 장의 사진도 제시하지 못한 탓에 학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침몰선 인양팀은 소나(sonar, 수중청음기)로 지형을 조사하다가 인공 구조물 같은 형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수몰된 도시 유물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그런데 인양팀의 자료에 대해 조언을 부탁받은 사우스플로리다 대학의 알 하인 박사는 애매한 답변을 내놓았다.

나는 아직도 이것이다라고 확신할 수가 없다. 그것은 실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해저의 음향지구물리(音響地球物理)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다소 맥 빠지는 조언이지만 지하 유물에 대한 보도는 계속되었다. 2001713, 미국의 ABC뉴스는 다음과 같은 과학 이야기를 방영했다.

최근에 해저를 탐사한 학자들이 대서양 해저(대서양 중앙 해령)를 따라 9,920킬로미터에 걸쳐 길게 뻗어 있는 화산성 단층 해령 옆에서 거의 18층 높이에 달하는 석탑들을 발견했다. 장대한 높이의 석조물 20여 개가 대서양 대산괴(大山塊)라는 해저의 산에 위치한 것을 보고 그들은 이곳을 플라톤이 언급한 잃어버린 도시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외에 의문의 유적이 놓여 있다는 바다는 대서양의 심연이 아니라 비교적 수심이 얕은 북아메리카 대륙붕에 있다. 과학자들이 아조레스 제도를 둘러싼 가까운 해저 평원을 조사한 결과, 이 지역이 수몰된 땅이라는 것이 드러났고 그 평원은 전체가 120270미터 깊이에 놓여 있었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후부터 해수면이 조금씩 상승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문명의 유적이 바다 속에 수장됐다면 아직 인간이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듀크 대학의 브루스 히젠(Bruce Heezen) 교수푸에르토리코 해구를 조사하던 중 상당히 깊은 곳에서 산호초를 확인하고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산호초는 수심 15미터 이상에서는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로 판단하건대 우리가 조사한 지역은 한때 해수면에 가까웠음이 틀림없다. 현재 상태로 보아 육지가 23마일 함몰했거나 해수면이 지금보다 23마일 낮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직도 비미니 지역 등 대서양의 일부가 아틀란티스 대륙이라는 설명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꽤 많다. 이들은 언젠가 아틀란티스 대륙이 우리 앞에 나타날 거라고 믿고 있다.

 

<남극이 아틀란티스다>

아틀란티스에 대한 에드거 케이시의 예언이 빗나가자 아틀란티스 대륙은 결정적인 위기를 맞는 듯했다. 더 이상 아틀란티스의 존재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29년 터키 이스탄불의 토카피 박물관에서 발견된 지도 한 장(1513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이 아틀란티스 대륙에 대한 불씨를 살렸다.

지도의 제작자는 터키의 해군제독 피리 레이스였다. 그는 이 지도의 여백에 20여 개의 고지도8장의 마파문디스를 이용했다고 기록했는데, 마파문디스알렉산드로스 시대에 제작된 세계지도를 말한다. 따라서 지도에 사용한 척도의 단위는 당시 페니키아와 카르타고인이 사용하던 것과 거의 유사하다. 피리 레이스는 자신감에 가득 차 금세기에 이 정도의 지도를 소유한 자는 한 사람도 없다라고 적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참조한 고지도에는 문명의 여명기보다 더 오랜 시대로부터 전해진 세계지리에 관한 지식이 담겨 있었을 거라 추정할 수 있다.

그가 만든 지도는 현대인에게 다소 난삽해 보일 수도 있다. 고대 해군이 사용하던 지도를 조각조각 붙여 만든 탓에 척도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지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지식 없이 만드는 바람에 방향이 잘못된 것도 있다. 이 지도는 근본적으로 오늘날의 모로코에서 코트디부아르에 이르는 북아프리카의 일부와 남미 전체를 나타낸 대서양의 지도. 그런데 대서양과 그 주위를 감싸는 남북미 대륙, 유럽의 일부, 아프리카 서부 등은 육지 자체의 모양이 실제 지형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아마존은 지도에 두 번이나 나왔으며 대륙의 서쪽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머지 지형은 매우 정확히 그려져 있다. 아마존 입구에 있는 거대한 마라조 섬1543년에 발견되고 16세기 말에 지도로 그려졌음에도, 1513에 제작된 이 지도에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피리 레이스 시대에는 알려지지도 않았던 안데스 산맥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고, 이 지역의 전형적인 동물인 라마의 그림도 등장한다. 당시 유럽인이 그 동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피리 레이스 제독의 지도(1)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을 그린 부분은 더욱 정확하다. 무엇보다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위도와 경도0.5도 이내에서 실제의 위치와 일치한다는 점이다. 지도상의 세로선(경도)은 동서방향의 거리를 알려주므로 매우 중요하다. 위도는 별을 통해 비교적 간단하게 알 수 있지만 경도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도구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크로노미터(천문, 항해용의 정밀시계)가 발명된 것은 피리 레이스 시대로부터 200 이상이나 지난 뒤의 일이었다. 1500년대 초에는 경도가 알려지지 않았고 탓에 당시의 지도는 대부분 대륙 동서방향의 오차가 매우 컸다. 당대에 제작된 최신 지도를 사용한 콜럼버스가 목적지까지 1,000마일이나 남아 있었음에도 카나리아 제도아시아라고 착각했던 것은 정확한 경도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피리 레이스의 지도는 남아메리카의 대서양 해안선을 매우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흥미롭게도 브라질 남쪽의 해안선이 연장되어 아프리카 쪽으로 뻗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알링턴 멜로리는 이 지도를 연구해 지도의 중심점이 카이로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한 현대적인 투사법으로 이 지도를 재작성한 미국 뉴햄프셔 킨 주립대학의 햅굿 교수는 남미 대륙 남쪽에 길게 뻗은 해안선은 웨델 해에서 퀸모드랜드에 걸친 남극 대륙의 해안선을 그린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이제까지 알려진 문명보다 훨씬 이전에 진보된 다른 문명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고대의 항해자들은 극에서 극으로 여행을 했다. 믿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여러 가지 자료를 조사해 본 결과, 고대의 어떤 사람은 남극 해변이 아직 얼음으로 뒤덮이지 않은 시기에 그곳을 탐사한 것이 틀림없다. 그들이 항해에 이용한 도구는 고대에서 중세를 거쳐 18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사용했던 그 어떤 도구보다 뛰어났다.'

 

미국 정찰기술대의 해럴드 Z. 올메이어 중령도 피리 레이스의 지도에 대해 비슷한 평가를 하고 있다.

 

지도 아래쪽에 그려진 해안선은 1949년에 스웨덴. 영국, 노르웨이의 합동남극조사대가 지진탐사를 통해 발표한 남극의 해안선과 놀랄 만큼 일치한다. 이것은 해안선이 얼음으로 덮이기 전에 지도에 기록되었음을 시사한다. 이 지역의 빙괴 두께가 1마일에 달하기 때문이다. 지도에 실린 데이터는 1513년 당시의 지리적 지식수준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정교하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남극 대륙의 존재가 이 지도의 작성일자보다 거의 300년이나 지난 1818년에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남극 부근에 거대한 대륙을 그려 넣은 고대 지도도 종종 발견되었지만, 이는 오랜 공상의 산물로 정확성이 떨어졌다.

그뿐 아니라 피리 레이스보다 18년이 지난 1531년에 그린 오른테우스 피니우스의 지도는 피리 레이스의 지도보다 남극 부분이 더욱 정확하게 나타나 있다. 남극의 상세한 해안선뿐 아니라 산맥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강까지 그려져 있는 것이다. 내륙부가 공백인 것은 아마도 그 지도를 그릴 당시에도 이미 얼음에 덮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남극의 얼음 밑에 있는 산맥과 섬을 그린 것인데 그런 사실은 1958에야 알려진 것이다.

피리 레이스 지도보다 200년이나 앞선 1339년에 제작된 둘세르트 항해 안내서는 지도 제작자가 골웨이에서 러시아 돈 바신 강까지의 지역을 정확히 알고 그렸음을 보여준다. 동시대의 다른 항해 안내서에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여러 섬이 에게 해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 섬들은 오래 전에 바다 속에 가라앉았음이 틀림없다. 한 지도에는 남부 영국의 섬이 정확히 그려져 있지만 스코틀랜드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빙하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피리 레이스 시대나 그 이전의 지도 제작기술은 매우 단순했다. 그저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원본을 베끼고 짜깁기하는 정도였다. 지리상의 발견 시대는 보통 1492콜럼버스의 신대륙 도착을 출발점으로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륙의 전체적인 형태는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 각 지형의 정확도는 큰 오차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 지도는 남극이 얼음으로 덮이기 전에 그려졌거나 아니면 지진파 탐사로 1마일이나 되는 만년설 아래의 지질을 탐사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력을 갖고 있던 문명이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