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아틀란티스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1)

Que sais 2020. 11. 7.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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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잃어버린) 문명>

사라진 문명이란 말은 지금껏 쌓아 놓은 문명이 갑자기 소멸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문명'이란 단어를 놓고 인류학, 고고학,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인간들이 고도의 생산력을 배경으로 만든 생활양식이라고 말한다. , 인간들은 무의미하게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지혜와 노력을 가해 살아가는 문명이라는 양식을 만들어 가는데 이는 인간만이 가진 특권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문명이 사라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일반적으로 전쟁이나 질병, 기후의 변화, 식량의 결핍 등으로 기존에 유지되던 생활 모두가 생명력을 잃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경우 적어도 문명은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살아있던 대지는 남아있고 그들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

 

가장 단적인 예가 사하라 사막이다. 사하라 사막의 기후가 바뀌어 현재는 불모의 사막지대이지만 불과 몇 천년 전 만해도 고도의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은 바위그림 등이 증명한다. 그런데 만일 거대한 섬이나 대륙이 바다 속으로 잠긴다면 거기에 꽃피었던 문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도 단 하루 밤 사이에 사라진다면‧‧‧. 이런 극적인 사건이 언젠가 지구 역사상에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대륙이 완전히 사라졌다면 그 대륙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더 나아가 속물적인 근성으로 말하여 그들이 갖고 있었을 보물들은 어디에 있을까. 만약에 내가 그 보물들을 발견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로 이런 공상들을 수없이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사라진 문명'이란 단어 자체에 인간들이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아틀란티스 대륙'이란 말은 항상 우리들의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처음으로 언급한 이후 아틀란티스 대륙에 대한 논쟁은 꾸준히 이어져 내려왔다. 수많은 저자들이 아틀란티스 대륙의 위치를 놓고 다양한 주장을 펼쳤다. 이렇게 발간된 책만 해도 무려 5,000권이 넘었다. 아틀란티스 대륙을 대서양이나 지중해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이 대부분이지만 태평양 한가운데 있다는 설명도 있었고 심지어는 독일과 영국이 아틀란티스 대륙이라는 설까지 등장했다. 구 소련 학자 베렌진바크 부근의 카스피 해에 아틀란티스가 있었으며 수도의 건자재 일부가 발견되었다고도 발표했다. 더구나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가 아틀란티스 대륙이므로 자신들이야말로 아틀란티스 인들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민족도 20개가 넘었다.

 

가장 친숙한 아틀란티스의 이미지는 쥴 베르느1869년에 발표한 소설 해저의 2만리에서 잘 나타난다. 소설의 주인공 피에르 아로낙스는 노틸러스 호의 네모 선장의 안내를 받아 바다 밑을 탐사한다. 네모 선장은 아로낙스에게 두꺼운 해조류의 숲에 뒤덮인 웅장한 건물의 폐허와 줄지어선 돌기둥들을 보여준다. 아로낙스는 선사시대에 존재했던 발달된 문명의 유적을 보고 흥분하는데 그 유적은 사라진 대륙이 있다는 곳으로 알려진 대서양의 해저에 있었다.

아틀란티스의 전설이 어떤 특별한 마력을 지녔길래 플라톤으로부터 현대까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사람들의 상상력을 그토록 사로잡는 것일까. 과학적인 증거는 고사하고 설득력있는 설명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물 속에 사라졌다는 대륙의 존재를 믿고 싶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틀란티스는 지구 역사상에 실제로 존재하였던 대륙인가 혹은 플라톤이 철학적 대화를 풀어나가기 위하여 만든 가상의 대륙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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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란티스 대륙의 시작>

아틀란티스 대륙은 기원전 335년경 플라톤이 쓴 '대화편' 티아미오스크리티아스라는 철학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플라톤이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시인인 솔론(Solon, 기원전 615535)의 기록을 인용한 것이다. 솔론 역시 이집트의 사제 손치스에게 들은 이야기를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플라톤

티아미오스는 플라톤이 제시한 이상 사회의 모습과 합치되는 우주관을 펼치는 저서이고 크리티아스그에 따른 이상 사회의 모습을 실제로 제시해 보이려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플라톤소크라테스의 이상국가를 설명하면서 아틀란티스 대륙을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다. 플라톤은 자기 가문의 할아버지로 그리스 법의 아버지로 알려지는 솔론이 이집트의 사이스를 방문했을 때 손치스 사제세계의 종말과 고대 문명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는데 솔론이 그에 대한 저술을 하려 했으나 끝마치지 못하여 그의 전언만 가문 대대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즉 솔론보다 150년 뒤에 태어난 플라톤이 이를 기록한다는 뜻이다.

플라톤이 전하는 솔론의 이야기는 아테네인들은 과거의 역사에 대한 기억이 전무하다는 손치스 사제의 비판으로 시작된다. 사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오래된 기록'이 이집트에 존재하며, 이런 '고귀한' 기록은 자신들의 신전에 보관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사제는 세계는 여러 시기 동안 여러가지 방법으로 종말을 맞은 바가 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불과 물로 인한 멸망인데 가장 훌륭한 문명인 아틀란티스물로 멸망했다는 것이다.

 

‘9000(기원전 9570) , 헤라클레스의 기둥(Pillars of Heracles,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 기둥은 지금의 지브롤터 해협 동쪽 끝에 솟아 있는 두 개의 바위를 말한다) 뒤편에 큰 섬이 있었고 이 섬을 아틀란티스 대륙이라고 불렀다. 이 섬을 지배한 나라는 리비아(아프리카)와 아시아를 합친 것보다 크고 거기에는 항해자들이 다른 섬으로 가는 해로가 있었다. 그 섬으로부터 시작해 진정 바다라고 부를 만한 대양을 육지가 둘러싸고 있는데,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그 해역은 입구가 좁은 그야말로 하나의 ()에 불과하다. 그러나 다른 바다, 그것은 진정한 대양으로 그 대양을 둘러싼 땅은 대륙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모든 면에서 완전한 이상국가라 할 만한 이 강력한 고대국가는 당신의 나라 그리스와 우리나라 이집트 해협의 아프리카 부분 리비아, 그리고 중서부 이탈리아인 티레니아 지역도 점령하였다. 당신의 나라에서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지도자가 나타나 그리스 전체를 총괄하는 동맹군을 만들었지만, 서로간의 이해가 엇갈려 모두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당신의 나라만 홀로 싸워 이긴 다음 승리의 기념비를 세웠다.

 

아틀란티스의 침몰

그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후에 엄청난 지진과 해일이 일어나 하룻밤과 낮 사이에 당신 나라의 전사가 모두 땅 속에 묻혔고 아틀란티스 대륙도 바다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사라진 섬과 유적들은 아직 수면 바로 아래에 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항해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침몰한 섬이 남긴 많은 이토(泥土, 진흙)가 항해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리티아스에서 플라톤은 아틀란티스와 아테네의 관계를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아주 오랜 옛날 신이 대지를 갈랐다. 그리스로 온 아테나 여신은 아테네인의 강력한 도시국가를 건설했고, 아틀란티스에서 국가를 건설한 포세이돈은 섬에 거주하고 있던 클레이토와의 사이에 10명의 아들을 낳았다. 이후 아틀란티스는 포세이돈의 큰아들 아틀란트(아틀라스)가 통치했고, 그 섬과 대양도 그 이름을 따라 아틀란티스라고 불렸다. 나머지 아들들은 모두 섬의 각지를 다스렸으며 최고통치자의 소집 명령이 내리면 부름에 응해 회의를 했다.

섬에서는 어떤 도시, 어떤 땅에서 생산된 것이든 모두 구할 수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섬에서 생산되었지만 일부는 국외로부터 들어왔다. 특히 그곳에는 오리칼크(무지개 빛을 띠고 있었다는 전설적인 보석)가 많았고, 코끼리를 비롯해 여러 종류의 동물이 있었다. 그뿐 아니라 향료의 원료가 되는 다양한 종류의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직경 22킬로미터의 원형으로 이뤄진 섬의 수도 중앙에는 포세이돈과 클레이토가 살았던 800미터 길이의 아크로폴리스가 있었다. 포세이돈과 클레이토에게 바쳐진 그 성스러운 곳에서는 항상 온수와 냉수가 나오는 목욕탕이 있었다. 또한 포세이돈에게만 봉헌된 신전도 있었는데, 그곳은 신전 전체가 금오리칼크로 덮여 있었다. 신전 내부에 있던 금으로 된 원주들은 6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를 타는 신을 상징한다.

 

아틀란티스 내부배치도

아틀란티스 섬의 중심부는 폭 360미터의 환상운하(環狀運河)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주위를 폭 360미터쯤 되는 육환대(陸環帶)가 둘러쌌으며, 다시 그 둘레는 폭 360미터의 수로가 에워싸고 있었다. 이 수로는 또 한 번 폭 540미터의 육환대에 둘러싸이고 마지막으로 대형 선박이 드나들 수 있는 같은 폭의 수로가 이 땅을 에워쌌다. 그리고 (dock)에 가득한 3단 노가 설치된 군선은 언제든 출동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도시를 둘러싼 여러 겹의 성벽은 주민과 해안에 정박하고 있는 상선 그리고 전함들을 보호해 주었다.

아크로폴리스 주위에는 물이 채워진 같은 모양의 이 세 개, 흙이 채워진 통이 두 개 있었는데 이것은 터널과 우물이 연결되는 통로에 놓여 있었다. 이 통들은 신전, 정원, 체육관, 기숙사, 경마장에도 있었다.

군대는 전시에 구역별로 징집이 행해졌고 한 구역의 인구는 6만 명에 달했다. 육군은 중전차 1만 대, 경전차 6만 대, 병사 100만 명이며 해군은 수병 24만 명이라는 대군이었다. 각 구역의 지휘관은 전쟁에 대비해 전차 한 대 비용의 6분의 1을 부담할 의무가 있었다. 또한 지휘관은 말 두 마리와 기병 두 명, 좌석이 없는 경전차 한 대, 작은 방패를 들고 전차를 따르는 보병 한 명, 경전차에 타서 말을 몰 전차병 한 명을 조달할 의무가 있었다. 여기에다 중무장병, 사격수, 투석기 조종병, 투석병, 소규모 전투를 수행할 투창병 셋, 그리고 1,200척의 함선에 태울 선원 넷도 조달해야 했다. 이들은 왕도(王都) 직속의 병사로 다른 아홉 왕국에도 각각 군대가 있었다.

아틀란티스의 통치자10명으로 이들은 56년마다 포세이돈 신전에 모여 법을 위반한 자들을 재판하였다. 이때 최종선고를 내리기 전에 신전에 있는 소를 금속 도구는 전혀 사용하지 않고 매듭과 몽둥이만으로 죽여 제물로 바쳤다.

아틀란티스 사람들은 지금의 아테네인과 유사한 수준의 높은 도덕성과 정치 이념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욕심이 지나쳐 제우스신은 이들을 징계하기로 결심하였다.’

 

여기서 플라톤의 아틀란티스 대륙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중단되고 만다.

 

<슐리만의 트로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아가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아틀란티스의 실존 가능성에 대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일부 아틀란티스 신봉자는 아틀란티스를 찾는 데 열중했지만 그들도 그 대륙의 존재 여부를 확신했던 것은 아니다. 대개는 플라톤이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시킨 상상의 대륙(이상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에 발을 내딛으면서 아틀란티스 대륙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환상이 더욱 넓게 퍼져나갔다. 더욱이 많은 사람이 새롭게 가시권으로 들어온 서쪽의 거대한 대륙이 아틀란티스 대륙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또한 서인도 제도나 아조레스 제도, 카나리아 군도, 그밖에 대서양에 흩어져 있는 섬들을 오리칼크와 원형들의 섬, 항구, 운하로 가득 찬 사라진 대륙의 잔재로 보기도 했다.

1553, 프란시스코 로페스(Francisco Lopez)신대륙은 아틀란티스로 재명명(再命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는 고대의 아메리카 원주민이 분명 유럽 및 아프리카 사람들과 활발한 무역을 했을 것이고, 이집트인이 이러한 사실을 목격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약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이 수준 높은 문명인도 아니었고 유럽이나 아프리카와 교역할 만큼 항해술을 갖추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1619세기의 이론가들은 성서와 문헌, 신화, 아마추어 고고학적 지식 등을 총동원해 대서양은 물론 스웨덴, 북해, 지중해, 심지어 사하라사막이 아틀란티스라고 주장했다. 특히 1871년에 독일의 거부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 트로이 유적, 1901년에 아서 에반스(Arthur Evans)가 크레타 섬에서 미노아 문명을 발견하면서 아틀란티스 대륙에 대한 열기는 더욱 강해졌다.

 

트로이에서 발견된 ㅡ로이의 보물

슐리만의 트로이 발굴은 한 편의 드라마처럼 감동적이다.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기록된 내용이 사실이라고 확신한 슐리만은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트로이 유적 발굴에 몰두했다. 학자들은 그가 고고학적 전문지식을 갖추지 않은 채 단지 호머의 서사시만 믿고 주먹구구식으로 발굴에 나선다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더욱이 슐리만이 무모하게 트로이라고 단정한 히살리크(터키어로 성채라는 뜻) 언덕은 학자들이 보기에 전혀 엉뚱한 장소였다. 학자들은 바닷가에서 세 시간 정도 떨어진 부나르바시 마을 근처를 트로이로 추정하고 있었다.

슐리만이 히살리크를 트로이라고 단정한 이유는 그곳에 새로운 트로이라는 뜻의 노붐 일리움이라는 도시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곳에서 발견된 도기 파편들은 그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입증했다.

당시에는 발굴에 대한 모든 자금을 발굴 책임자가 부담한 뒤 그 일에 관계된 정부와 발굴 유물을 분배하는 것이 관례였던 터라, 발굴 위치를 잘못 선정하는 것은 도박보다 더 위험한 투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결과를 놓고 보자면 조롱을 받아야 할 사람은 슐리만이 아니었다. 널리 알려진 트로이의 왕인 프리암(Priam)의 보물이 들어 있는 상자를 열자 팔찌, 브로치, 목걸이, 접시, 단추 등 금으로 만든 보물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프리암의 보물을 착용한 슐리만의 부인

슐리만은 그곳에서 무려 8,700점이나 되는 보물을 얻었고 16,000개의 순금 조각으로 된 금관도 발견했다. 이로써 호머의 이야기는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트로이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한 것임이 입증되었다. 미노아 문명의 황소 숭상도 전설로 알려져 있었지만, 에반스가 크레타 섬에서 찬란한 색채의 벽화 및 미로를 발견함으로써 그 역시 실존 문명이었음이 밝혀졌다.

이처럼 고대 신화로만 인식되던 전설들이 실제로 모습을 드러내자 아틀란티스 대륙도 실존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그리스의 미카엘 공은 이렇게 말했다.

 

'호머를 믿었던 사람들의 결정적 승리는 비록 늦긴 했지만 호머의 명예 회복과 아틀란티스의 실존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생각할 여지를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아틀란티스 대륙은 트로이 전설과 큰 차이점이 있다. 아틀란티스 대륙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플라톤최초로 언급한 것이다. 더욱이 이 대륙에 대해서는 플라톤이 살아있을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다.

무엇보다 플라톤에 앞선 연대기 작가와 역사가 등이 아틀란티스나 이와 유사한 이름에 대해 기록한 것이 전혀 없다. 󰡔역사󰡕를 저술한 헤로도토스(Herodotos)도 아틀란티스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고대 아테네의 군사적, 정치적 갈등을 묘사하고 있는 투키디데스(Thukydides)는 아틀란티스의 존재를 부정하는 발언했다. 특히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와 당시 유명한 지리학자이자 역사학자였던 스트라본(Strabōn)은 플라톤의 이야기가 모두 상상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기원전 4세기의 이소크라테스도 아틀란티스의 실체를 부정했다.

반면 플라톤과 플라톤의 증조부인 크리티아스는 아틀란티스의 이야기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거듭 주장했고, 후대의 많은 로마인이 아틀란티스 대륙을 역사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지리학자 포세이도니우스는 자신의 저서 󰡔지리(地理)󰡕에서 아틀란티스의 실존을 기록했고, 로마의 역사학자 프린느도 서기 77년에 발간된 󰡔자연 역사󰡕에서 플라톤이 기술한 아틀란티스 대륙이 대서양 부근에서 사라졌다고 썼다.

 

또한 그리스의 크라스톨은 이집트의 사이스 신전에서 아틀란티스에 관련된 기록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5세기의 철학자 프로클루스(Proclus)는 로마의 지리작가 마루셀루스(Marcellus)의 필사본 내용을 들어 아틀란티스 전설이 여행자들에 의해 수집되었으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아카데미에서 아틀란티스의 진위에 대해 오랫동안 활발한 토론이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이집트의 중왕조시대(기원전 20001750)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소련의 레닌그라드에 있는 파피루스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어느 날 파라오의 광산으로 향하던 배가 큰 파도를 만나 자초되고 말았다. 그들 중 한 이집트 선원이 나무판자에 매달려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는 어느 낯선 섬으로 떠밀려갔는데, 그곳에는 한 마리의 황금용이 살고 있었다. 용은 그를 자신의 거처로 데려갔다. 용에 따르면 지난날 그 섬에는 75마리의 용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멀리 나갔다 돌아와 보니 하늘에서 별이 떨어져 용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고 했다. 이어 용은 미래를 예언했다. ‘당신은 이집트의 배가 와서 구해 줄 것이다. 하지만 이 섬은 바다에 잠길 운명이므로 당신은 두 번 다시 이 섬을 볼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