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아틀란티스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7)

Que sais 2020. 11. 7.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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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대문명이 존재했다는 증거 1>

15,000년 전 남극 대륙은 얼음으로 덮인 황무지가 아니라 초목이 우거지고 다양한 동물이 살 수 있는 환경이었고 사람도 살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세계 최초의 초고대문명을 건설하는 것은 물론 토목과 천문학, 항해술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또한 이들은 지구 전역을 탐험하며 이집트, 아메리카, 유럽 등지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약 1만 년 전 대재앙이 일어나 남극 대륙에 있던 위대한 문명은 지금처럼 두꺼운 얼음과 눈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렇다고 남극 대륙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초고대문명이 멸망할 것을 예측해 사전에 각지로 분산되었다. 그들 중 가장 앞선 지식을 보유했던 후예들이 이집트에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건설했고, 볼리비아에서는 티아우아나코의 태양 신전을 건설했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아틀란티스인도 남극 대륙에 살던 때의 지식을 이용해 거석문화를 이뤘으며 자신들에게 닥친 재앙이 지속적으로 전수될 수 있도록 신화, 전설, 역법 속에 숨겨 놓았다.

이러한 가설은 공상과학이 아니라 영국의 언론인 출신 작가인 그레이엄 핸콕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신의 지문󰡕에서 진지하게 제시한 것이다. 핸콕은 위에서 설명한 몇 장의 지도를 토대로 이러한 가설을 설파했다. 이들 지도는 분명 남극 대륙을 그린 것으로 그곳이 빙하에 덮이기 전에 존재한 문명의 유산이 틀림없다는 주장이다.

 

그레이엄 핸콕

핸콕 가설의 진원지는 햅굿 교수로 거슬러 올라간다. 뛰어난 이론학자로 빙하의 생성 요인에 도전한 햅굿 교수는 지구의 공전궤도와 자전축의 방향이 점진적으로 변화해 기온 하락이 초래되었다는 기존의 정설이 빙하기의 종말에 따른 여러 가지 격변을 말끔히 설명할 수 없음을 발견했다. 그는 남극이 빙하기로 들어간 이유는 양 극점의 무게가 주기적으로 지구에 불균형을 초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양 극점 위의 얼음이 임계질량에 도달하면 그 무게로 지구의 외피인 지각판이 균형에 도달할 때까지 미끄러지듯 이동한다고 주장했다. 지구의 자전축은 고정되고 대륙이 얹혀 있는 지각판만 양 극점으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남극과 북극은 지구에서 가장 추운 지점에 머물게 되며, 그는 유럽이 약 3,600킬로미터 북쪽으로 이동해 북극권에 놓임으로써 얼음이 쌓이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햅굿은 이러한 이론을 1958지구의 지각판 이동이라는 논문으로 발표했다. 그는 세계의 여러 지역이 차례로 북극권과 남극권으로 진입함에 따라 얼음이 재분배되었고 아메리카 대륙은 점차 남쪽으로 이동했으며 빙하층은 1만 년 동안 모두 녹았다고 부연 설명했다. 또한 그는 이 과정에서 엄청난 규모의 지진과 홍수, 화산 폭발로 아메리카와 유라시아 대륙의 동식물군이 대부분 멸종했다고 추정했다. 시베리아가 북극권으로 이동해 매머드가 완전히 멸종된 것도 이 때문이며, 남반구에서는 아메리카의 빙하기 동안 대부분 온난했던 남극 대륙이 기원전 6000년 무렵 완전히 남극권으로 진입해 2000년이 지나자 얼음으로 뒤덮였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 우표

그의 지각판 이동이론은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주목을 받았고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당신의 논거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가설이 옳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과거의 주요한 지구 지각(地殼)이동이 짧은 시간 내에 반복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두 사람은 직접 만나 의견을 나누었고 아인슈타인햅굿의 책에 서문을 쓰기까지 했다.

어쨌든 피리 레이스가 현재 얼음 속에 갇혀 있는 남극 대륙의 지도를 그릴 수 있었던 근거를 좁혀서 생각하면 다음의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 제작자는 보통사람보다 특수한 능력을 지녔다. 직관적인 원시(遠視) 능력을 가진 사람이 세계지도를 그렸다.

아틀란티스인을 비롯해 전 세계에 거석 건조물을 만든 초고대문명의 사람들은 현대인이 짐작하는 것보다 더 멀리까지 항해할 수 있었으며, 뛰어난 천문 지식으로 정확한 지도를 그릴 수 있었다. 대체로 이 시기를 1만 년 전에서 12,000년 전으로 본다.

남극 대륙에 현대인이 알지 못하는 첨단문명이 있었는데 그들의 후예 중 누군가가 남극 대륙이 얼음으로 덮이기 전인 기원전 4000년경에 남극 대륙을 탐험해 지도를 제작했으며, 그것이 알렉산드로스 시대까지 여러 시대에 걸쳐 복사되어 내려왔다.

고대 혹은 알렉산드로스 시대에 불가사의한 지식이 알려졌다. 그 지식은 고대 항해나 천체에 관한 지식으로 어쩌면 지구 밖 생물로부터 얻었을지도 모른다.

이 가설 중에서 어느 것도 증명하기 어렵지만, 네 번째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지구상에 살아있던 인간이 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 번째의 특수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제작했다는 설은 다소 황당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의외로 이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다.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의 예를 들어보자. 진실의 예언에 관한 그의 저서 󰡔제세기(諸世紀)󰡕는 약 1,000개의 사행시로 되어 있다. 그중에는 여느 예언적인 주술처럼 내용이 애매해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귀중한 진리로 여겨질 수 있는 내용도 있다. 이러한 노스트라다무스의 책이 시대에 따라 항상 재해석되는 것은 그가 천리안을 갖고 미래를 엿보았다는 것을 사람들이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특수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마치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지구 전체를 살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한 평가는 독자에게 맡긴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맥락을 같이한다. 특히 세 번째는 핸콕이 보다 자세하게 정리하고 있는데 그의 설명은 두 번째 주장, 아틀란티스 대륙을 남극 대륙으로 바꿔 설명한 것이다. 어쨌든 누군가가 기원전 4000년경 남극이 얼음으로 뒤덮이기 전에 남극 대륙을 탐험해 지도를 작성했을지 모른다는 가설은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고 그들이 누구냐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초고대문명이 존재했다는 증거 2>

햅굿극지 변동가설은 대륙이동설이 지질학계의 정설로 떠오르면서 학계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린란드에서 발견된 열대 야자수의 화석 잔해 등 햅굿이 지각판 이동의 증거로 제시한 것 중 대다수는 지각판 전체가 한꺼번에 이동한 것이 아니라 대륙이 이동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햅굿도 자신이 처음에 제시한 메커니즘이 틀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양극의 위치 변화 원인이 지각층의 더 깊은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수정했다. 그럼에도 당초 이론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햅굿의 이론이 점점 지질학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시 반전이 일어났다. 1970년대 말, 캐나다의 랜드와 로즈 플렘-아스 부부햅굿의 이론을 보다 발전시킨 것이다.

이들은 이집트인이 아틀란티스 대륙을 그린 지도가 있는데 이 지도는 17세기 중반에 독일 출신의 학자 아타나시우스 키르허(Athanasius Kircher)가 플라톤의 진술을 토대로 그린 것과 같다고 했다. 또한 이 지도에는 빙하에 덮이지 않은 남극 대륙이 보이며 얼음 속에 묻힌 남극 대륙의 크기와 형태가 유사하다는 것을 곧바로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키르허의 지도

그런데 이 지도에는 아틀란티스 대륙이 현재의 아프리카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 사이에 그려져 있다. 그탓에 이 지도는 키르허가 공상으로 그린 것이라는 지적을 받았고 별다른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플렘-아스 부부는 지도를 거꾸로 돌리면 아틀란티스 대륙이 그려진 부분이야말로 정확하게 남극 대륙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남극 대륙이 아틀란티스 대륙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이집트의 사제 손치스솔론에게 했던 말을 근거로 하고 있다. 손치스는 아틀란티스가 대서양에서 멀리 떨어진 미지의 세계 밖에 있다고 말했다.

 

리비아 즉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합친 것보다 크고 거기에는 항해자들이 다른 섬으로 가는 해로가 있었다. 그 섬으로부터 시작해 진정 바다라고 부를 만한 대양을 육지가 둘러싸고 있었는데,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그 해역은 입구가 좁은 그야말로 하나의 만()에 불과하다. 그러나 다른 바다, 그것은 진정한 대양으로 그 대양을 둘러싼 땅은 대륙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솔론 시대의 그리스인은 세상을 광활한 대양 한가운데 떠 있는 하나의 섬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세계관 아래 문명은 유럽, 리비아(아프리카), 아시아의 단위로 나뉘어졌다. 그리스인은 세계 북쪽 끝부분에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놓여 있다고 설명했고 그 의미를 두 가지로 해석했다. 하나는 지브롤터 해협이라는 특정의 위치를 말하며, 다른 하나는 세상의 끝(extremity of the known world)이라는 의미다. 솔론의 이야기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그리스 세계의 끝을 의미하고, 그 끝의 밖에 있는 것은 누구도 밟을 수 없는 곳으로 금지된 통로에 해당한다.

 

서양 법의 수호신 솔론

플렘-아스 부부는 헤라클레스의 기둥 밖에 있는 대서양의 의미가 솔론이 이야기했을 때와 달리 매우 축소되었다고 주장했다. 고대 그리스인은 대서양이란 말을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거대한 바다라는 뜻으로 사용했는데,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대서양의 의미가 축소돼 현재처럼 대서양과 태평양으로 나뉘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대서양을 섬 세계를 완전히 둘러싼 물의 일부분으로 정의했으므로 대서양은 오늘날의 대서양이 아니라 세계양(World Ocean)으로 불러야 한다는 얘기다. 바다가 세계양으로 통일되었다는 사실은 남극 대륙을 중심으로 한 미 해군의 지도에 현재의 대서양, 태평양, 인도양이 한 바다에 포함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플렘-아스 부부는 남극 대륙을 중앙으로 보고 지금의 지구를 설명하면 잘 부합된다고 강조했다. 우선 남극 대륙은 1,200만 제곱킬로미터로 북아프리카(리비아)와 중동(아시아)을 합친 면적에 근접한다. 아틀란티스 대륙이 존재한다는 그들의 가설은 사장되어 가던 아틀란티스 대륙에 그야말로 구세주나 마찬가지였다.

 

<남극에서 출발한 신의 지문>

아틀란티스가 초고대문명이 존재한 대륙이라면 적어도 그 땅의 한쪽 길이가 수천 킬로미터는 되어야 하고, 여러 개의 산맥과 큰 강이 있어야 한다. 또한 1만 년 전이라는 제한조건도 충족시켜야 한다. 그런데 대륙이동설이 확고한 지질학의 이론으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대륙 규모의 땅덩이가 사라진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 말은 아틀란티스 대륙의 침몰이라는 사실 자체가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플렘-아스 부부가 입김을 불어넣어 불씨를 살린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 누구보다 열렬히 관심을 보인 사람이 바로 핸콕이다. 핸콕은 󰡔신의 지문󰡕에서 남극 대륙이야말로 사라진 대륙이며 그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문을 세계 각지에 산재한 고고학 유적지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핸콕의 주장에도 결정적인 걸림돌이 존재한다. 핸콕의 동료인 존 앤소니 웨스트(John Anthony West)는 남극 대륙이 아틀란티스이며 이곳에 초고대문명이 존재했을지라도 지도가 그려지려면 두 가지 가정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남극 대륙이 얼음에 덮이지 않았던 시기, 즉 적어도 6,000년 전에 지도가 작성되고 사람이 남극 대륙에 살고 있어야 한다.

고도의 해양 문명이 여러 지역에 존재해야 한다.

햅굿은 지각이동은 지구의 넓은 지역을 일시적으로 사람이 거주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기 때문에 사람 및 동물의 이동성에 제한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1977해리스햅굿의 이론에 더해 수렵과 수집을 생계유지 수단으로 하던 사람들이 이동이 제한되자 한군데에 정착해 농경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추정했다. 더구나 이러한 제한성으로 일부 지역에 거주하면서 인구가 증가하자 자연적으로 계절에 맞춰 개선된 개혁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특정한 식물 및 동물의 선택적 재배와 사육으로 발전하고 진정한 식량 생산 체계로 옮겨갔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12,000년 전에 수메리아, 이집트, 인도, 미노아, 중국 등은 열대지방이었지만 차츰 온대지방으로 변하면서 문명권이 생겼다고 주장한다. 각 문명권이 시작된 연대가 다른 것은 기후 변화가 급격히 이루어져도 사람들이 새로운 기후로 이동하는 속도는 완만하기 때문이다. , 급격한 기후 변화와 그 변화 속도에 못 미치는 인류의 이동속도가 각 지역에서의 문명 발달의 시간 차이를 빚어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아틀란티스의 생존자들이 고대 이집트 문명을 건설하는 것은 물론 후술하는 거석 문명, 즉 영국의 스톤헨지, 프랑스의 카르낙(Karnak), 마야와 잉카, 이스터 섬, 페루의 나스카(Nazca) 등이 상당한 단절을 보이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틀란티스 후예들이 전 세계로 퍼져나갈 때 각자에게 닥친 제한적 요소가 달라 새로운 정착지에서 생활하는 여건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아틀란티스의 후손으로 홍수의 전설이나 거석 문명처럼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지식은 모두 같다는 것이다.

 

스톤헨지

그러면 고대의 지도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어쨌든 약 6,000년 전은 고온기로 이 시기의 기온은 현재보다 높았고 남극 대륙 대부분이 온대지역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당시에 남극까지 항해할 수 있는 배와 항해술이 있어야 한다. 기원전 6,000년 전남극까지 항해할 능력이 있는 문명이 지구상에 있었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핸콕플렘-아스 부부에게 매우 고무적인 증거가 발견되었다. 고대인이 빙하로 덮인 남극 지도를 그릴 수 있는 가능성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19919, 미국과 이집트의 고고학자들은 최소한 5,000년 전에 제작된 이집트 파라오의 함대가 나일 강에서 거의 13킬로미터 떨어진 내륙 아비도스에서 발견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이것은 모두 12척의 목선으로 길이가 1522미터나 되었다.

배의 길이가 22미터에 이른다는 것은 고대문명에 대한 매우 중요한 발견이다. 중세 시대에 유럽인을 공포에 떨게 한 바이킹의 롱십(Long ship, 긴 배)의 경우 배의 길이가 24미터, 폭이 5미터였다. 바이킹은 이 배에 40여 명의 전사와 말 2필을 싣고 전 세계를 항해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첫 발견자가 바이킹이었다는 공인된 사실로 미뤄볼 때, 이집트에서 발견된 크기의 배라면 전 세계 어떤 지역이라도 얼마든지 장기간 항해가 가능했을 것이다.

파라오의 함대는 기원전 27002600년경에 이집트를 통치한 제2왕조 카세켐위(Kasekhemwy)의 장례 신전에서 발굴된 것으로 제1왕조의 제르(Djer, 기원전 3100년 경)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도 남극이 얼음으로 뒤덮여 있지 않았다는 기원전 4000년과는 적어도 1,000년의 차이가 난다. 이 간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고고학자들이 명쾌한 대답을 준비하고 있다. 먼저 아비도스의 파라오 함대는 먼 바다의 악천후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고도의 기술로 건조되었으며 그 모습도 매우 우아하다. 이는 고대 이집트의 배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항해기술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세련된 배의 설계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대형 배를 건조하려면 오랜 세월의 발전 과정이 필요하다. 나일 강 유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벽화에 유선형의 대형 배가 물 위를 달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아비도스의 함대보다 1,500년이나 더 오래된 6,500년 전의 일이다.

결국 이집트인은 현대인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항해술로 남극까지 항해했으며, 자신들이 본 지역을 지도로 그렸고 그것이 알렉산드로스 시대까지 전승되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만약 정말로 아틀란티스가 남극에 있었다면 그동안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에 관한 모든 의문점을 잠재울 만한 파괴력을 가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