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아틀란티스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8)

Que sais 2020. 11. 8.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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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격하는 과학자>

고고학, 천문학, 지질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증거를 끌어낸 핸콕과 플렘-아스 부부의 가설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특히 이들은 이집트인이 뛰어난 항해술을 통해 남극까지 항해했을 거라는 개연성까지 부여했다. 하지만 정통 학자들은 이들의 주장에 즉각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남극 문명이 남긴 유적의 건설 연대가 12000을 상회한다면 왜 그들의 후손이 세웠다는 이집트 문명이 기원전 3000 정도밖에 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적어도 이들을 연결하려면 이러한 공백기를 말끔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플렘-아스 부부는 아틀란티스인이 각지로 퍼져나가는 데 나름대로 시간이 걸렸고, 각 지역의 특성에 따라 변형된 문명이 발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아틀란티스 대륙의 후예들이 곧바로 이집트에 도착하지 못해 그 중간단계에서 아틀란티스의 거석 문명을 진행시켰고, 비로소 이집트에 도착해 여러 가지 여건을 바탕으로 아틀란티스 문명을 활짝 꽃피웠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한계는 아틀란티스가 멸망했다는 기원전 12000년에도 이집트인은 계속 나일 강 계곡에 거주했다는 점이다. 남극 대륙이 아틀란티스 대륙이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집트가 아틀란티스의 식민지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제1왕조가 시작되기 직전인 기원전 3400년경 이전에는 도시와 신전, 피라미드, 오벨리스크, 조각상 등 이집트가 자랑하는 문명의 흔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존 앤서니 웨스트시간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분명히 지적했다.

내가 볼 때 이와 관련된 커다란 문제는 전승 과정이다. 이집트 왕조의 문명개화기 사이에 존재하는 수천 년에 지식을 전수한 정확한 방법이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이는 풀기가 쉽지 않은 문제이다.”

핸콕이 제시한 견해는 남극 대륙의 지식이 수백 세대(적어도 300세대)에 걸쳐 신화와 전설로 구전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 결국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플렘-아스 부부와 핸콕의 설명은 여러 고대문명의 기원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 셈이다.

문제는 햅굿이다. 그는 피리 레이스의 지도에 남극 대륙의 존재가 암시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커다란 가설을 세웠다. 레이스의 지도가 신대륙을 놀랄 만큼 정확히 묘사하고 있으며, 특히 남미 대륙에 대한 묘사는 어느 유럽인도 탐험해 본 적 없던 지역을 묘사한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또한 남아메리카 하단 부분부터 남극 대륙이 있는 약 3,000킬로미터가 생략되었는데, 이는 두 대륙 사이에 존재하는 해상통로를 피리 레이스가 의도적으로 생략했다고 설명했다.

바로 이 주장이 논쟁의 실마리였다. 햅굿의 생략설에 핸콕은 레이스의 지도를 연결해 남극을 복원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레이스의 지도를 면밀하게 분석한 학자들은 핸콕과 전혀 다른 결론을 내렸다. 레이스의 지도는 부정확할 뿐 아니라 대부분 추측으로 묘사됐으며, 특히 남미 대륙의 해안가와 북미 대륙의 연안을 직접 보지 않고 그린 부분이 많다고 주장했다. 똑같은 지도를 분석한 결론이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지도에 관한 한 최고 권위자인 그레고리 매킨토시(Gregory Mclntosh)는 역사적인 자료를 검토해 볼 때 레이스의 지도1516세기 유럽의 지도제작 기법을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해안지역은 그 지역을 탐험한 사람들이 직접 보고 제작한 것이며, 추측으로 그렸다는 부분은 잠깐 들렀거나 지나치면서 기록했을 수도 있고 상상으로 그렸을 수도 있다고 했다. 당시의 지도제작자가 모르는 지역을 백지상태로 남겨둔 채 지도를 그린 것이 아니라, 확인되지 않은 부분은 상상력을 동원해 채워 넣었다는 설명이다. , 레이스추측으로 그려 넣은 부분을 남극과 연계한다는 것은 비상식적이라는 얘기다.

핸콕에 대한 과학자들의 공격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보다 구체적인 자료로 핸콕의 주장이 원천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우선 레이스가 지도를 만든 연도가 1513년이라면 1492년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발을 들여놓은 지 20년이나 지난 시점이라 수많은 탐험가가 아메리카 대륙 연안을 철저히 조사한 후라는 것이다. 당시 탐험에 참가한 유럽인은 자신들이 발견한 사실을 정확히 기록했는데, 놀라운 것은 피리 레이스의 지도에 브라질의 내부 모습과 콜럼버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분명 콜럼버스라는 제노바 출신의 한 무신론자가 이 땅에 왔던 것 같다. 경위는 다음과 같다. 콜럼버스는 책을 하나 입수했고 그 책을 통해 서쪽 바다(대서양) 끝에 해안선과 많은 섬이 있으며 그곳에는 각종 귀금속과 보물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글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콜럼버스 이전에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정보를 적은 책이 있었고, 콜럼버스가 그 책을 근거로 자신의 후원자들에게 탐험대 파견을 설득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레이스의 지도에는 포르투갈인이 원주민들로부터 화살 공격을 받았는데, 그들이 나체였다는 글이 적혀 있다. 남극 대륙 해안으로 가정한 부분 옆에는 머리털이 하얀 괴물들’, ‘뿔이 여섯 개 달린 황소’, ‘커다란 뱀들과 무더운 날씨에 대한 포르투갈인의 보고를 적고 있다. 레이스는 포르투갈인의 괴물에 대한 기록을 포르투갈의 불신자들이 자기네 지도에 기록했다고 적었다.

그렇다면 피리 레이스를 고대지도로 인정할 만한 근거가 없지 않은가? 핸콕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핸콕이 레이스의 지도로 남극설을 주장할 때 이미 콜럼버스가 기록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거론하지 않고 알렉산드로스 시대의 기록만 있는 것처럼 주장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핸콕은 학자의 양심을 저버리고 남극설을 거짓으로 포장한 것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항구에 복원된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

충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레이스 지도의 재구성을 통해 빙하에 묻힌 남극 대륙의 형태와 유사하다는 주장에 반론이 제기되었다. 최근의 과학 탐사에서 얼음을 들어내면 빙하 아래에 있는 남극 대륙의 실체가 현재의 지형과 많이 달라진다는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남극 대륙은 수백만 톤의 빙하층에 짓눌려 수백 킬로미터나 침강되어 있지만, 그것을 수정하면 해안선이 크게 달라진다는 얘기다.

빙하층을 제거할 경우 남극 대륙의 형태가 현저히 변모된다면, 피리 레이스나 오른테우스 피니우스의 지도에서 보여주는 해안선의 모습이 현재 얼음 속에 보이는 남극 대륙과 일치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결론적으로 피리 레이스나 오른테우스 피니우스의 지도에 묘사된 해안의 섬들은 동토층을 제거하면 사라지므로 서로 일치하는 부분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과학자들은 연이어 보다 강력한 펀치를 날렸다. 아틀란티스가 남극 대륙이라는 지금까지의 설명은 남극 대륙기원전 13000년 이전에 빙하에 덮여 있었지만, 그 뒤 점진적으로 빙하가 줄었다는 것이 전제조건이다. 그런데 최근에 빙하도 강처럼 미세한 토양층을 퇴적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남극 대륙이 지질학적으로 최근 역사에서 빙하가 없는 시대를 거쳤다는 추정을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여러 층의 빙하에서 발견된 자료에 따르면 남극 대륙이 최소한 10만 년 이상 빙하에 덮여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과학의 발전을 통해 알게 된 진실은 이집트인이 남극까지 항해했더라도 얼음에 덮이지 않은 남극 대륙을 직접 보았다는 대전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며, 이로써 남극 대륙에 초고대문명이 존재했다는 지금까지의 가설은 원천적으로 성립하지 않게 된다.

 

<플라톤의 짜깁기로 태어난 아틀란티스>

아틀란티스 대륙 신봉자들의 집요한 추적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자, 또 다시 플라톤의 이야기철학적 창작물이라는 견해가 학자들의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캠프는 󰡔잃어버린 대륙󰡕이라는 저서에서 플라톤의 이야기를 분석하며 플라톤의 이야기는 정치적역사적과학적 가공의 산물이다. 즉 고대 그리스 시대의 SF물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 조지 오웰 󰡔1984󰡕처럼, 플라톤이 당시의 아테네 사회를 비난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사건들과 멸망에 대한 전설 등을 조합해 아틀란티스라는 그럴싸한 가상의 나라를 만든 선전이라는 주장이다.

플라톤은 평생 아테네의 해군을 상당히 비난했다. 아테네의 군대가 중장보병에서 해군 중심으로 바퀴었는데 문제는 노잡이. 당시 해군의 갤리선의 노잡이는 매우 힘든 작업이므로 이들 노잡이를 충당하기 위해 무산자(無産者)들을 동원해야 했고, 이 무산자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얻으면서 민주주의 체제로 이동하고 있었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그런데 플라톤은 이런 민주주의를 겨냥해 '아테네가 '악덕'에 차 있다'고 비난할 정도로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해군을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런 배경 속에서 설명되는 아틀란티스 전설이 담긴 플라톤의 크리티아스민주주의 정서를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크리티아스라는 제목은 플라톤의 5촌 당숙인 '크리티아스'의 이름을 딴 것인데,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말기에 스파르타와 결탁해 30인 참주가 되어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해군을 해체하며 무산자들을 탄압하다가 그 반발로 일어난 민주주의 혁명에 죽은 독재자였다. 이런 사람의 이름을 따 제목을 지었다는 자체가 의심받을 만하다는 것이다.

여하튼 크리티아스 이후 민주주의를 회복한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맞서기 위해 해군을 재건하려고 한다. 당시 부유층 1,200명을 모아 갤리선 함대를 구축하는 경비를 부담시키려고 했는데, 아틀란티스의 함대도 딱 1,200척이다.

그런데 플라톤이 태어나던 무렵 아틀란테라는 이름의 섬이 지진과 해일두 동강이 난 사건도 있었다. 스파르타 함대의 전멸과는 별개로 아틀란테라는 섬이 아틀란티스가 물에 잠겨 사라졌다는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주장도 있다.

여하튼 아틀란티스 이야기는 플라톤이 지어낸 허구이고, 아틸란티스에 관한 특정 설명은 플라톤 개인의 반민주주의 성향을 시사하거나, 플라톤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짜깁기하여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물론 이 주장에 반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플라톤이 반민주주의 선동에 진짜 목적을 두었다면 기존의 신화를 변형시키거나, 단순한 전설에 대한 기록보다는 당대에 인기를 끌었던 시나 희곡으로 각색하는 편이 훨씬 유용하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아틀란티스 이야기를 역사적 진실이라고 주장하면서 굳이 자기 집안의 솔론과 크리티아스의 이름을 걸고 사실이라 강변했다. 집안을 걸고 사실이라고 말하는데는 최소한의 그 무엇이 즉 진실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플라톤은 이런 종류의 거짓말을 친 전력이 없다. 심지어 플라톤은 그런 식으로 허구를 창작해내는 행위 자체를 '진실을 속이는 거짓'이라고 비난하며 혐오했고, 그 연장선에서 아예 '시인 추방론'을 주장했을 정도다. 당대에 그런 플라톤이 내로남불에 가까운 행위로 아틀란티스를 설명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더구나 '아틀란티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도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 너머 거대 국가'에 대한 전설은 상당히 알려진 이야기이므로 고고학자들도 이 부분에 관한 한 부정 일변도는 아니다.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면 그런 전설이 계속 퍼져나올 가능성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아틀란티스 함대1,200척이라는 숫자의 공통점은 있지만 솔론이 전해 들었다는 '오래 전 융성했던 헤라클레스의 기둥 너머의 어느 세력'에 대한 전승 이야기 자체는 거짓이 아닐 수 있다는 설명이다.

 

<계속 발견되는 아틀란티스>

아틀란티스라는 말이 워낙 매력적이므로 세계인들이 도전하는데 그 내막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실제로 아틀란티스가 존재했고 그 유적지를 찾는다면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속된 말로 그들이 갖고 있던 유물 중 몇 개만 찾더라도 엄청난 환가성이 있음은 물론이다. 100년 전에 침몰한 타이타닉호에서 발견한 수많은 유물들이 엄청난 가격으로 팔린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여하튼 19737, 미국 캘리포니아에 본부를 둔 <고대지중해연구회> 잃어버린 대륙 촬영에 성공, 아틀란티스 실재?란 제목으로 바다 속에서 아틀란티스 문명의 유적을 찾아냈다고 발표하자 전 세계의 언론매체가 들썩거렸다. 그들은 스페인 대서양 연안의 카디스 만 해저에서 인공도로, 대원주, 나선형 장식 돌 등을 발견해 수중촬영에 성공했다고 했다.

이 기사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한 것은 카디스 만은 플라톤이 말하는 헤라클레스 기둥의 앞부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전 세계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지만 그 증거물인 수중 사진은 끝내 발표되지 않았다. 나중에 기자들이 판매부수를 올리고자 근거 없는 가십거리를 만들어냈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20046월에 또다시 놀라운 발표가 있었다. 카디스 만 부근의 늪지대를 촬영한 위성사진에서 전설 속의 섬 아틀란티스로 보이는 지상 구조물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독일 부퍼탈 대학의 라이너 쿠에네 (Rainer Kuehne) 박사는 플라톤이 지상낙원으로 묘사한 아틀란티스 섬은 사실 기원전 800년에서 500년 사이에 홍수로 휩쓸려간 카디스 부근 늪지대 마리스마 데 이노호스(Marisma de Hinojos) 일대라는 것이다.

 

스페인 카디스만의 인공위성 사진

그가 보여준 인공위성 사진은 두 개의 진흙으로 이루어진 직사각형의 구조와 한때 이를 둘러싼 것으로 보이는 동심원구조의 일부를 보여준다. 특히 이것이 플라톤이 묘사한 아틀란티스인의 은의 신전 그리고 금의 신전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이 두 유적의 면적은 대략 925제곱미터이며 플라톤이 말한 대로 동그란 원 모양의 구조물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원래 이 위성사진은 고대사 연구가인 독일학자 베르너 비크볼트가 처음 목격한 것으로 그는 그리스인이 이 유적을 섬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해안선을 나타내는 이집트어를 섬으로 오해해서 생긴 것이라며 아틀란티스는 오늘날 스페인 남부와 연결된 대륙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 증거로 비크볼트는 아틀란티스는 커다란 산맥이 연결된 지형이었고 그 산맥의 일부가 스페인의 시에라모레나 산맥과 시에라네바다 산맥까지 연결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플라톤이 아틀란티스의 주산물로 구리를 꼽았는데 오늘날 시에라모레나에서도 엄청난 양의 구리가 산출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공위성 사진에 잡힌 두 개의 신전에 대해 영국 에딘버러 대학의 토니 윌킨슨 박사는 신중하게 이야기한다.

 

이러한 해석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존재한다. 이 이미지에서 무엇인가 볼 수 있고 이 이미지를 가지고 여러 가지 다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몇 가지 논리의 비약이 있다. 지상에서 우리가 본 것에 근거하여 필요한 것은 연대측정이다. 이 구조가 흥미롭지만 연대측정으로 확인되지 않으면 그저 그렇게 생긴 지형형태일 뿐이다.’

 

그의 말은 쿠에네 박사에 강타를 날린 셈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유적은 기원전 800500년 사이에 건설된 것으로, 적어도 1만 년 전에 사라진 아틀란티스 대륙과는 차이가 많기 때문이다.

 

쿠에네 박사는 인공위성 사진과 연계될 수 있는 보완사항으로 지브랄타 해협 즉 헤라클레스의 기둥에 위치한 진흙으로 이루어진 사주(shoal)인 스파텔 섬 (Spartel)을 아틀란티스로 지목했다. 공교롭게도 이들 지역은 11,000년 전에 바다로 가라앉았다. 플라톤은 아틀란티스에 평원이 있다고 적었는데 쿠에네 박사는 이 평원이 현재 스페인의 남부 해안선을 따라 세빌리아까지 펼쳐진 평원으로 생각하면 딱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플라톤이 묘사한 높은 산맥은 세에라 모레나(Sierra Morena)와 시에라 네바다(Sierra Nevada)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플라톤은 아틀란티스에서 동과 다른 광물이 풍부하다고 적고 있는데 모레나에서 풍부하게 산출된다. 쿠에네 박사는 플라톤이 기술한 아틀란티스와 다른 동부 지중해의 전쟁은 기원전 12세기에 바닷사람들이라고 알려진 신비스런 침략자에 의한 이집트와 사이프러스 그리고 레반트(Levant)에 대한 공격과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는 아틀란티스 사람들과 바닷사람들이 사실은 동일한 사람들이었음이 분명하다고 말했지만 이를 증명할 결정적인 방법이 묘연하다는 점이다. 이를 확인하려면 발굴이 앞서야하는데 인공위성 이미지에 나타난 구조는 스페인의 도나나 국립공원(Donana)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