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아틀란티스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10)

Que sais 2020. 11. 8.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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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이야기미노아 문명을 연결하는 데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크레타 섬플라톤이 묘사한 아틀란티스로 보기에는 크기가 너무 작고 연대도 지나치게 늦다. 또한 플라톤은 아틀란티스에 코끼리가 있다고 했는데 크레타 섬에는 코끼리가 살지 않는다.

 

크레타

마리나토스는 아틀란티스와 크레타의 연결고리로 기원전 15세기경(기원전 1477년으로 추정) 크레타에서 160킬로미터 북쪽에 위치한 산토리 섬(고대에는 테라 섬)에서 갑자기 거대한 화산이 폭발했다는 것에 주목했다. 테라 섬의 화산 폭발은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거론된다. 미국의 과학자 드라고슬라브 닌코비치18838월 인도네시아 크라카타우 섬의 화산 폭발과 산토리 섬의 경우를 비교 연구했다. 크라카타우 섬에서 화산이 폭발했을 때 섬이 조각나면서 가라앉았고 폭발은 약 4,800킬로미터 떨어진 오스트레일리아 동부 주민들의 귀에 들릴 정도였으며 폭발력은 100150메가톤이었다. 이는 미국의 네바다 사막에서 실험했던 초창기 핵폭탄의 69만 개를 동시에 터뜨릴 때 발생하는 폭발력과 같다.

 

산토리(테라) 섬

그런데 산토리 섬의 화산 폭발은 크라카타우 섬에 비해 4배나 큰 규모였다. 산토리 섬의 폭발로 200미터가 넘는 해일이 발생했을 거라고 추정되지만, 크라카타우 섬의 폭발에서는 해일의 높이가 35미터에 지나지 않았다. 크라카타우 섬의 폭발로 약 36,000명이 사망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산토리 섬의 폭발이 어느 정도의 피해를 가져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67, 마리나토스는 크레타 섬 인근을 철저하게 조사한 후 테라 섬의 화산 폭발미노아 문명의 중심지인 크레타 섬이 황폐화되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고 발표했다. 그는 산토리 섬의 남쪽에서 청동기 시대에 이미 몰락한 아크로티리라고대 함대의 정박소를 찾아냈다. 이후 1미터에 달하는 화산재에 덮인 마을도 발굴했는데 2, 3층짜리 주택, 창문, , 계단, 운하, 도로, 궁전 위치 등이 거의 원형 그대로 파묻혀 있었다. 이것이 바로 로마의 폼페이 유적에 버금가는 에게 해의 폼페이로 현재 1/3 정도가 발굴되었다. 학자들은 아크로티리가 크레타의 도시 중에서 가장 큰 곳으로 추정하며 발견된 지역은 아크로티리의 중심부다.

그런데 화산 폭발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은 오히려 크레타 섬이었다. 폭발에 의한 진동이 크레타의 건물들을 파괴하고 거리는 화재로 뒤덮였던 것이다. 더욱이 엄청난 해일이 북쪽의 여러 연안을 강타했고 지진도 일어났으며 크레타의 자랑인 먼 거리 항해용 선박들이 파괴되었다. 특히 크레타의 비옥한 땅 위에 두껍게 쌓인 화재는 상당 기간 농작물의 재배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크레타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모든 고고학자가 미노아 문명이 종말을 맞이한 가장 큰 이유로 산토리 섬의 화산 폭발을 들지는 않지만(또 다른 학설은 그리스인의 공격으로 멸망했다는 것이다), 화산 폭발이 몰락의 중요한 원인이라는 주장을 부인하진 않는다.

이집트인은 지중해의 작은 섬 하나가 바다 속에 침몰했고 그 여파로 그들이 잘 아는 강력한 크레타가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에반스의 추정에 따르면 크레타 최전성기의 수도 크노소스는 인구가 약 8만 명으로 당시 세계 최대 도시였고, 제우스신이 태어난 곳이다. 이에 따라 일부에서는 자연스럽게 크레타 출입이 단절되자 이보다 800년 후에 이집트를 방문한 솔론에게 이집트인이 크레타 섬을 아틀란티스 대륙이라는 이름으로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솔론은 크레타와 이집트인이 부르는 케프티오(Keftiou)가 동일한 지명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이집트인의 서쪽이라는 말도 당시 그리스인이 머나먼 서쪽이라고 뜻하던 지브롤터 해협의 서쪽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특히 과거에 아틀란티스가 헤라클레스의 기둥의 바깥쪽에 있는 큰 섬이라는 기술을 지브롤터 해협을 가리킨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장소, 즉 헤라클레스의 기둥으로 불리는 구역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 구역이 바로 고대 그리스의 미케네로 테라 섬은 그 미케네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플라톤은 아틀란티스를 가리켜 어디에서도 '대륙(ēpeiros)'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거대한 '(neos)'이라고만 표현했다. 그것을 '리비아와 아시아보다 크다'는 표현으로 설명되는데 이 역시 당시의 지리관에 근거한 것이므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륙에 필적할 만큼 크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여하튼 영국의 콜린 F. 맥도널 박사아틀란티스와 크레타세 가지 유사성이 있다고 말했다. 첫째는 막강한 해군을 거느리고 왕이 다스렸으며 둘째는 군국주의적 체제였고 셋째는 두 곳 모두 자연재해로 멸망했다는 것이다. 그는 테라 화산이 폭발했을 때 섬 주변 1020킬로미터는 배가 못 다녔을 것이라고 첨언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듯 그리스의 지진학자인 가라프소스(A.G. 갈라노풀로스(A.G. Galanopoulos))는 산토리 섬으로 둘러싸인 내부의 바다는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칼데라에 물이 고여서 된 것이고, 섬 안쪽의 절벽은 칼데라의 생성에 관계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1956년 산토리 섬의 안쪽 절벽의 최상부 백색층에서 탄 소나무 조각 등을 발견했는데 탄소연소측정에 의해 이 나무는 기원전 1400년경으로 확인되었는데 이 연대는 크노소스 궁전 붕괴의 연대와 일치한다.

또한 그는 1960년에 플라톤이 기록한 아틀란티스 대륙에 관한 19가지의 사실은 대부분 크레타 섬의 미노아 문명과 연관 지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도로시 비탈리아노는 그 19가지 중에서 6가지는 완전히 일치하고 8가지는 일치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이 말한 아틀란티스 대륙과 미노아 문명의 크레타는 믿기 어려울 만큼 많은 유사성을 띤다. 특히 미노아 문명은 플라톤이 언급했던 고도의 아틀란티스에 부합될 만큼 상당히 발전한 문명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산토리 섬의 원형상의 지형도 플라톤이 기술한 아틀란티스 옛 왕도의 규모나 모형과 합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플라톤은 아틀란티스에 흰색과 검은색, 붉은색 돌이 많다고 했는데 산토리 섬에서는 이런 색의 돌이 흔하며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이 있다는 설명과도 일치한다.

산토리 섬은 아직도 화산활동이 활발해 노천 온천이 많이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크레타 섬에는 활화산이 없다는 점이다. 산토리 섬은 크레타 섬에서 가장 가까운 활화산으로 실제로 1950년에도 분화했으며 1956년에는 지진이 일어나기도 했다. 크레타 섬 남쪽에는 동서로 펼쳐진 길이 6,000여 미터의 깊은 해역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해구이며 북상한 아프리카판의 선단부(先端部)가 이곳에서 지구 내부로 잠입하여 북상을 계속한다. 잠입한 아프리카 판의 온도가 상승하여 그 일부가 녹아 용암이 되고 이것이 더욱 상승하여 지표의 활화산을 만든다. 에게해를 포함한 지중해의 지진이나 화산활동은 이와 같은 지각 운동에 의해 일어나는데 산토리 섬의 분화가 그것이다.

또한 󰡔티아미오스󰡕에서 플라톤은 여행자들이 사라진 대륙 후면에서 출발해 대륙 전면에 위치한 다른 섬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기술했는데, 이집트인의 관점에서 이 말은 크레타와 사이클라드 군도, 그리고 그리스 대륙 사이를 말한 것이 된다.

돈 파스트라스 역시 지중해 해저아틀란티스 유적이 있으며 산토리 섬의 화산 폭발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입증하기 위해 20여 년에 걸쳐 지중해에 관해 많은 자료를 조사했다. 그가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플라톤이 말한 헤라클레스 기둥은 지브롤터가 아니라 그리스 본토에서 본 산토리 섬이라는 것이다. 헤라클레스 기둥은 컵 모양을 뜻하므로 이런 지형을 굳이 대서양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그는 어부들이 종종 지중해 바다 밑에서 고대 문명의 흔적을 발견한다며 그리스 정부에 아틀란티스라 여겨지는 바다 밑을 탐험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고 신청했다. 그리스 정부는 학계에서 인정하는 학설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직까지 발굴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그는 그리스 정부가 2의 슐리만이 탄생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아틀란티스 대륙은 분명 지중해 속에 있습니다. 저를 슐리만처럼 무모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슐리만이 되는 걸 주저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틀란티스를 발견한다면 트로이를 발견한 슐리만보다 더욱 위대한 고고학적 업적을 쌓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틀란티스 문명이 미노아 문명을 의미한다는 가설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1977년에 피힐러와 시링크라는 두 독일 과학자는 화산의 분출물을 세심하게 조사해 산토리 섬의 폭발은 크레타가 멸망한 1450년보다 훨씬 오래되었으며 화산은 기원전 1477년이 아니라 1650년 또는 1628년 경에 폭발했다고 주장했다.

이 폭발이 문제가 된 것은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은 화산이 폭발한 후 기원전 1450년까지도 멸망하지 않았으므로 미노아 문명의 멸망을 화산폭발과 직접적으로 관련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황소 숭배는 고대 지중해 세계 전역에서 적어도 기원전 6,000년 이후부터 행해졌으며 희생으로 바치는 짐승들을 잡을 때 희생물에 손상을 입힐 수 있는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풍습 역시 일반적이라고 지적했다. 몸에 흠집이 없는 짐승들만을 신들에게 바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자들의 집념은 놀랍다. 만약 화산 폭발로 미노아 문명에 치명타를 입혔다면 그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플로이드 맥코이 박사는 우선 화산 폭발 규모가 어느 정도로 큰 것인가를 분석했다.

미국의 과학자 드라고슬라브 닌코비치산토리 섬의 화산 규모를 추측해 눈길을 끌었다. 18838월 인도네시아 크라카타우 섬의 화산 폭발과 산토리 섬의 경우를 비교한 연구였다. 크라카타우 섬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섬을 조각내면서 가라앉았고 폭발은 약 4,8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동부 주민들의 귀에 들릴 정도로 엄청난 규모로 폭발력은 100150메가톤이었다. 이는 미국의 네바다 사막에서 실험했던 초창기 핵폭탄의 69만 개를 동시에 터뜨릴 때 발생하는 폭발력과 같다.

 

 

산토리 섬의 화산 폭발은 크라카타우 섬의 경우에 비해서도 10배나 큰 규모였다. 산토리 섬의 폭발로 지름 13킬로미터 깊이 2밀로미터의 분화구가 생겼으며 해일의 높이는 200미터가 넘었고 50여 킬로미터 인근을 강타했다. 이는 크라카타우 섬의 화산의 경우 해일의 높이가 35미터에 지나지 않는 것을 보아도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도 크라카타우 섬의 폭발로 약 36,000명이 사망자를 냈다는 점을 생각하면 산토리 섬의 폭발에 의한 여파를 짐작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폭발이 전지구적인 여파를 갖고 왔다는 점이다. 이 당시 이집트의 사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4일간 옆에 있는 사람도 보이지 않고 낮과 밤이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흐렸다.’

 

중국의 경우 하나라 걸왕 29으로 추정하는데 오곡이 시드는 등 농사가 엉망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하나라()에 의해 멸망하는데 그 연유를 산토리섬의 폭발로 농사가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남극의 빙하에서도 이 당시 폭발의 흔적을 찾아냈다. 기원전 1628년부터 7년간 빙하에 재가 내렸다는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7이나 재가 내렸다는 것은 7년이나 전 세계적으로 농사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경우 5,000년의 수령이 된 브리스톤 나무에서도 폭발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 당시의 나이테에 의하면 나무의 성장이 비정상적임을 보여준다. 학자들은 유럽에서 역사상 지금까지 일어난 화산 폭발 중 가장 큰 세기로 추정한다.

안드리센 박사는 화산 폭발과 미노아 문명의 멸망을 연계시키면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크레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던 팔라이카스트로에서 갑자기 건물의 반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당시 이 도시는 5,000명이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도시 전체가 사라진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당시 3번째로 큰 도시인 말리아인에서도 똑같은 재난이 일어났다.

헨드릭 브루인 박사는 이와 같은 거대한 재난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 추적했다. 우선 화산이 폭발하고 몇 일간 밤낮이 구별되지 않았다고 해도 이런 갑작스런 재난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헨드릭 박사는 퇴적층에서 유공층은 물론 산호말류도 발견했다. 이들은 바다에서만 발견되는 생물이다. 또한 퇴적층에서 자갈과 함께 있는 토기도 발견했다. 이는 바다로부터 거대한 힘이 몰려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상상할 수 없는 해일이 밀어닥쳤다는 뜻인데 시노라키스 박사는 시뮬레이션으로 당시의 해일쓰나미가 해수면보다 31.36미터 높이에 이른다고 밝혔고 이당시 해일은 시속 1632킬로미터 정도로 추정했다.

더욱 피해가 심했던 것은 쓰나미가 거의 3040분 간격으로 연속적으로 이들 도시를 강타했기 때문이다. 시노라키스 박사는 이 경우 처음 해일의 피해에서 높은 고지로 올라갔던 사람이 부상자나 피해를 파악하기 위해 내려왔다가 이들 역시 희생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2004인도네시아 아체 주 해안을 강타한 쓰나미로 80퍼센트에 달하는 해안 인구가 사망했는데 시노라키스는 산토리 화산의 폭발의 여파도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마디로 크레타 섬 해안의 함선들은 물론 도시 인구의 80퍼센트 정도가 피해를 보았을 것이라는 뜻으로 이것이 미노아 문명의 멸망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거대한 쓰나미는 미노아인들의 사기를 완전히 저하시켰다. 미노아인들은 지중해에서 강력한 함대를 갖고 있는데다 신들이 자신들을 보호한다고 믿었으므로 해안에 성벽도 건설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재난이 일어났는데 이는 신들이 자신들에게 등을 돌렸다는 뜻으로 인식했다. 그들은 이런 대 재앙을 신들의 저주로 생각한 것이다.

물론 크레타 섬의 제1도시인 크노소스는 이 재난으로 피해를 보지 않았다. 크노소스는 내륙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산이 폭발한 후 거의 200년이 지나 미노아 문명이 멸망한 이유는 따로 있어야 했다. 학자들은 멸망 요인으로 내부의 봉기 또는 외부 침략자를 꼽았는데 근래는 후자를 꼽는다.

우선 크노소스에서 방화의 흔적이 있는데다 크노소스 인근에 있는 체냐에서 대규모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미노아식 매장이 아니라 집단 매장이었다. 또한 크노소스에서 그리스인들이 당대에 사용하던 긴 칼도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당대에 지중해에는 미노아 문명미케네 문명(그리스 아카이아)이 강력한 함대를 갖고 있었는데 테라 화산의 폭발은 미케네 문명그리스 문명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그러므로 지중해를 주름잡던 미노아가 갑작스럽게 쇠퇴하자 이를 파악한 그리스인들이 크레타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는 설명이다.

 

크노소스궁 내부

매우 중요한 정황을 알려주는 유물도 발견되었다. 크노소스의 도로에서 어린아이 시체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는데 이는 미노아인들이 인육을 먹은 흔적으로 간주한다. 학자들은 이 사실이 그리스 신화의 미노타우루스 즉 미로의 전설을 만들었다고 추정한다. 그리스 미케아 문명은 크레타에서 인육 먹는 것을 크게 비난했는데 갑자기 해군력이 보이지 않자 충분한 준비를 한 후 크레타를 공격했다는 것이다.

 

반인반수 미노타우루스

물론 미노타우루스 전설은 그리스인들이 크레타를 공격하기 위한 명분으로 만들었을 개연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즉 미노아인들이 미노타우루스에게 제물을 바치는 자체인육을 먹는다는 것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당대 티그리스 반도 펠로폰네소스의 아카이아 인들은 종교, , 예술을 크레타에서 배웠지만, 무기에서는 크레타 인보다 우월하므로 크레타는 반드시 점령해야할 매력있는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