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아틀란티스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11)

Que sais 2020. 11. 8.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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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합적인 미노아의 멸망>

학자들은 이들 사건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천재지변이 미노아 문명의 단초가 되었다는 시나리오는 테라섬의 화산 폭발 외에도 계속되는 크레타의 강력한 지진이 더욱 큰 치명타를 날렸다고 주장한다. 즉 여러 번의 천재지변에 의해 크레타의 지배력이 약해졌을 때 아카이아 인들이 크레타를 침입하여 점령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1450년 경 크레타에서 강력한 지진이 일어났다는 증거가 있다.

크레타의 신전 유적에서 사제와 인신 공희의 대상자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었다. 한 어린아이는 희생되기 직전으로 생각될 정도로 묶여 있었는데 사제는 건물의 파편으로 머리를 맞아 사망했다. 이는 사람을 신에게 바치기 위해 의식을 치루는 도중에 강력한 지진이 일어나 집전하던 사제가 현장에서 즉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하튼 미노아 문명은 자연재해와 외부의 공격으로 멸망했는데 이런 사실들이 종합적으로 연계되어 아틀란티스 전설의 시작이 되었다는 것이 현대 과학으로 보는 아틸란티스의 진상이다.

그런데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은 화산이 폭발한 후 기원전 1375년까지도 멸망하지 않았으므로 미노아 문명의 멸망을 화산 폭발과 직접적으로 연관시킬 수는 없다는 지적이다. 크레타 섬은 화산 폭발이 아니라 지진의 여파로 파괴되었다.

일부 학자는 산토리 섬의 화산 폭발 직전에 크레타에 지진이 일어나 전 도시가 불타올랐고 당시 많은 건물이 목재로 지어져 화재로 거의 모든 도시가 파괴되었음이 발굴로 확인했다.

플라톤이 묘사한 지진은 바로 이 사건을 뜻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크레타 섬이 바다 속으로 수몰되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다. 어쨌든 화산 폭발이 크레타 문명을 곧바로 멸망시켰는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찬란했던 문명이 갑자기 멸망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자이 크레타의 멸망과 화산 폭발을 연계시키길 주저하는 이유는 아크로리티에서 인골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폼페이나 헤라클레움은 테라의 화산 폭발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소규모였음에도 300여 구의 인골이 발견되었다. 플라톤의 설명처럼 하룻밤과 낮 사이에 멸망했다면 많은 희생자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미노타우루스의 원산지 크레타>

당대의 최강인 크레타 즉 미노아문명을 많은 경쟁자들이 눈독을 들였는데 그것은 크레타가 당대 최강의 위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크레타는 세계 발굴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명과 연계된다. 트로이를 발견한 슐레이만과 수많은 발굴에 참여한 아서 에반스.

크레타는 아틀란티스와 직결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므로 보다 설명한다.

원래 크레타는 아틀란티스 전설을 포함하여 과거부터 유럽인들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는데 그것은 호메로스가 크레타에 대해 일리아드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기 때문이다.

 

포도줏빛 바다의 한가운데 떠 있는 섬, 물에 둘러싸인 크레타섬은 아름답고 비옥하다. 크레타섬 주민들은 매우 많으며 도시는 90개나 있다. 그곳에서는 아카이아족, 용감한 크라타섬 원주민, 키도니아족, 도리아족과 고귀한 펠라스기족의 세 부족들 등 온갖 종족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 그 섬의 도시들 중에는 위대한 제우스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고, 미노스가 9년 주기로 다스린 대도시 크노소스가 있다.’

 

호메로스가 적은 90개의 도시를 크레타섬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처럼 매력 있게 들리는 것은 없었다. 문제는 당시에 크레타섬의 정정이 매우 불안하다는 점이다. 당시 크레타섬은 1669년부터 오스만 제국이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오스만 정부로부터 발굴 허가를 받는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도 지루한 일이었다.

트로이를 발굴한 슐레이만이 악착같이 크레타섬의 발굴권을 취득하려고 했으나 오스만 정부의 견제와 땅주인들의 욕심에 부딪쳐 결국 포기하자 프랑스의 주뱅과 영국의 에반스가 경합을 벌렸고 결국 아서 에반스가 1899년 주뱅을 제치고 발굴권을 확보했다. 이것은 크레타섬의 정황이 다소 바뀌었기 때문으로 1898년 오스만제국의 점령이 끝나고 크레타섬이 열강들이 분할 통치했다. 마침 후에 그리스 왕이 되는 게오르그 2가 임기 4년의 위원장이 되었는데 그가 개인적으로 프랑스보다는 영국 고고학자들 선호한데다가 에반스가 개인적으로 크레타가 터키에 대항할 때 반군들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영국인 아서 에반스는 크레타의 크노소스 왕궁을 발견함으로써 트로이를 발견한 슐레이만에 버금가는 업적을 이룬 사람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에반스는 부친인 죤 에반스 경이 저명한 선사학자요 고고학 수집가이므로 고고학에 남보다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초창기에 저널리스트와 정치계에 입문했지만 집안의 배경으로 1884년에 옥스퍼드 대학의 박물관 중에 하나인 애슈몰 박물관 관장으로 임명되자 고고학에 심취한다.

1889년 이상한 상형문자들이 크레타섬에서 발견된다는 이야기를 듣자 곧바로 크레타섬으로 달려가 현장에서 크레타섬의 중요성을 간파한 후 결국 발굴권을 확보한 것이다. 크레타 섬에 도착하여 섬을 철저히 조사하던 에반스는 슐레이만이 미노스 왕궁터일지 모른다고 추정하고 발굴하려다 실패한 장소를 확인했다.

 

크노소스의 복원도

그곳은 헤라클레온시에서 남쪽으로 약 6킬로미터 떨어진 곳인데 다소 직감을 갖고 발굴에 착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 일어난 일은 고고학사상 가장 유명한 업적 중에 하나가 되었다.

19003, 첫 삽을 뜬지 몇 주일 만에 거대한 건물 자취가 발견되었고 몇 해가 지나자 5.5에이커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큰 궁궐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반스는 자신이 발견한 장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정했다.

 

궁궐은 슐레이만이 미케네와 티린스에서 발굴한 성들과 같은 시대의 것이다. 그런데 크레타에서 발견되는 성이 훨씬 규모가 크고 장엄한 것으로 볼 때 크레타가 에게해의 중심지였고 미케네나 티린스는 크레타의 종속 도시이다.’

 

왕궁은 수백 개의 방들이 있었는데 어찌나 복잡한지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가는데 길을 잃기 다반사였다. 미로(迷路)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구조였는데 유명한 미노스 왕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지중해 에게해에는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하여 40여 개 섬으로 이루어진 크레타 왕국이 있었다. 올림포스의 주신(主神) 제우스가 세계를 방랑하다가 페니키아 왕의 딸인 에우로페의 아름다움에 반했다. 제우스는 하얀 소로 변해 그녀를 등에 태우고 자기가 태어난 크레타 섬으로 데려갔다(그때 에우로페가 소를 타고 다닌 곳을 그녀의 이름 Europe에서 따서 유럽이라고 부른다). 제우스와 에우로페 사이에서 세 아들이 태어났는데, 첫째인 미노스크레타의 왕이 되었다.

 

 

크노소스의 미로(라비린토스)

미노스 왕은 아들 안드레게오스를 아테네에서 열리는 운동 경기에 내보냈다. 안드레게오스가 그리스 사람들을 물리치고 월계관을 독차지하자 화가 난 아테네 왕 아이게우스가 그를 죽였다. 미노스 왕은 함대를 보내 아테네를 굴복시키고, 9년마다 일곱 청년일곱 처녀를 바치라고 요구했다.

미노스 왕은 이 젊은이들을 라비린토스 궁전(미로)에 보내,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로 하여금 잡아먹게 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산 미노스 왕비 파시하이는 머리는 소이고 몸은 사람인 괴물을 낳자, 미노스 왕은 회랑과 방을 복잡하게 배치해 한번 들어가면 빠져 나올 수 없는 미궁(迷宮)을 짓고 괴물을 가두어 두었던 것이다.

또 다시 크레타로 청년과 처녀들을 보내야 하는 해가 돌아오자,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가 미궁의 괴물을 죽이고 젊은이들을 구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검은 돛을 단 배를 타고 아테네를 떠나면서, 괴물을 죽이고 살아 돌아오게 되면 검은 돛을 흰 돛으로 바꾸어 달기로 왕과 약속했다.

 

미노타우루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은 대개 잘 생긴 청년이고 여자에게 약하다. 크레타 왕국의 아름다운 공주 아리아드네를 본 테세우스는 곧 사랑에 빠졌다. 공주도 왕자에게 한눈에 반했다. 공주는 미궁을 지은 다이달로스를 찾아가, 미로(迷路)를 헤치고 나올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사정했다. 공주는 그에게 들은 대로 몰래 칼과 털실뭉치를 테세우스에게 건넸다.

공주가 털실의 한쪽 끝을 잡은 채 미궁 입구에서 기다리고, 왕자는 실을 풀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괴물과 싸워서 이겼다. 그는 털실을 되감으면서 미궁을 빠져 나오자 공주를 데리고 아테네로 달아났다. 그러나 흥분한 나머지 검은 돛흰 돛으로 바꾸는 것을 깜박 잊었다. 아테네 왕은 수평선에 모습을 드러낸 배가 검은 돛을 단 것을 보자 절벽에서 몸을 던지고 말았다.’

 

미궁(迷宮)’으로 널리 알려진 미노스 왕의 라비린토스 궁전에 얽힌 이 비극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크레타 왕국이나 미궁이 실제 있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단지 미궁이라는 것이 누군가가 꾸며낸 이야기에 세월이 흐르면서 그럴듯하게 극적인 요소가 덧붙은 전설이라고 알려졌는데 에반스가 그 증거를 찾아낸 것이다.

에반스는 크레타 문명의 중심지였던 크레타 왕국의 수도 크노소스에서 미노스왕의 왕궁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 뒤를 이어 속속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되었는데 학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의문이 생겼다.

크노소스 궁전에서 방어벽이나 요새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에반스는 크레타에는 방어 시설이 없었으며 국방 문제는 해군이 해결했다고 추정했다. 막강한 해군 함대가 바다에 포진하면서 외적이 아예 크레타에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에반스는 25년 동안이나 발굴 현장을 지휘했다. 크노소스의 발굴에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었지만 에반스는 영국 정부로부터 아무런 원조를 받지 않고 전적으로 개인 자산을 투자했다. 1907년에서야 에반스는 기부금을 모금하기 시작했지만 에반스가 유복한 집안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크레타섬의 발굴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에반스는 발굴에 대한 집념도 강했지만 다른 고고학자들보다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이점을 잘 이용한 면도 있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1909년에는 훈장을 받았으며 1911년에는 작위를 수여받았다. 1921년에서 1935년 사이에 4권에 달하는 크노소스와 미노스 왕궁이란 책을 발간했는데 크노소스에 대해서는 1900년 발굴을 시작할 때부터의 모든 과정을 적었으므로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1941년 사망하기 직전까지도 에반스는 고고학에 심취했는데 죽기 바로 3일전에 그는 옥스퍼드 주변에서 새로운 로마 시대의 길을 발견하기도 했다.

 

에반스경

에반스는 유물을 조사하면서 자신이 발견한 것이 모두 같은 시대의 것이 아님도 알았다. 도자기와 그림의 양식이 달랐고 벽돌도 연대에 있어 차이가 났다. 에반스는 크레타의 역사를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었고 미궁을 건설하며 에게해를 주름잡았던 미노스왕 시대가 크레타의 전성기임을 밝혔다. 그것은 무려 기원전 1600년경이나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크레타는 갑자기 멸망했고 역사상에 전설만 남긴 채 사라져 버렸다. 에반스는 크노소스 궁이 두 번 허물어졌고 매 번 다시 세웠으나 세 번째의 타격에는 더 이상 재기하지 못하고 멸망했다고 추정했다. 그 원인으로 화산 폭발을 제시했다.

에반스가 왕의 옥좌가 있는 방을 발굴하자 미처 하던 일을 마치지도 못하고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은 사람의 잔해를 발견했다. 방에는 기름 그릇이 거꾸로 엎어져 있었다. 갑작스런 재난을 만나자 그 방에 들어왔던 사람이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최후를 맞은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