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홀트 메스너 등장>
설인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산소없이 히말라야의 8,000m가 넘는 14개 모든 봉우리를 처음으로 등반한 등산가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로부터 나왔다. 그는 1986년 마지막 봉우리 로체를 정복한 후 기자들에게 말했다.
‘산을 오르던 중에 나는 전설적인 예티를 보았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보았는지는 십 년이 지나야 밝히겠다.’
예티의 전설에 매력을 느낀 메스너는 자신이 직접 예티의 전설을 찾겠다고 작정한 후 5년 동안 히말라야 각 곳을 직접 방문하여 조사한 후 약속대로 1998년 『예티, Yeti』라는 책을 발간했다. 그의 이야기는 상당히 구체적이다.
티베트 신화에서 설인에 대한 이야기는 대략 1000년 전의 히말라야 은자로 알려져 있는 요기 밀라레빠의 시에 처음으로 등장한다고 적었다. 그 뒤 아시아의 산악 지대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털북숭이 야수를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15세기에 유럽의 용병이었던 한 몽골 출신의 남자였다. 그는 히말라야산맥의 외딴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이 야수를 원숭이 비슷한 곰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적었다.
이 야수는 힌두쿠시산맥과 캄 사이에 사는 원주민들에게는 숲 속의 신으로 숭배되었는데 이 존재는 경건한 인간들의 눈에만 나타난다고 했다. 그래서 이들은 사냥을 떠나기에 앞서 이 야수에게 제사를 지내고 제물을 바쳤다고 했다.
네팔에서는 ‘설인’이라 부르는 동물들을 ‘체모’라고 부른다고도 적었다. 그는 1991년 독일의 ZDF-TV방송사의 지원하에 드디어 라마사원에서 ‘붉은 털의 예티’라고 불려지는 박제를 보았다. 유해의 손과 발에는 아직 뼈가 붙어 있었고 머리에는 위 부분만 빼고 길고 검은 털이 축 늘어져 있었다고 설명했다.
순간적으로 밖에 보지 못했지만 승려들은 400년 전에 마법의 힘으로 악마를 물리친 후 그 시체를 갖다 논 것이라고 했지만 머리털을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붙여 놓았다고 말했다. 손가락과 발가락도 작은 나무토막을 집어넣어 실로 꿰매 놓은 것 같았다고 말했다. 메스너는 자기에게 보여 준 예티의 유골은 공예품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티베트에서 신봉되고 있는 예티의 유물이라는 것은 예티의 전설을 보다 더 생생하게 간직하거나 아니면 그에 상응하는 귀신을 쫓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는 라마승들이 샤머니즘적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예티의 신화를 지키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는 이유는 대중의 의식 속에 인간과 반대되는 존재를 상징적으로 심어주기 위해서일지 모른다고 추측했다.
그는 예티란 결코 합리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세계의 산물이 아니라 오로지 히말라야 하늘 아래에서만 생겨날 수 있고 그곳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존재라고 설명했다. 거대한 희귀 동물의 변형으로서, 아니면 단순한 상상적 존재로서 말이다.
맥빠진 그의 결론에 대해 그는 보다 많은 자료를 제시했다. 1939년에 나치의 ‘티베트 비밀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쉐퍼 교수의 글이다. 1991년 메스너는 쉐퍼 교수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1933년~1935년 영국의 산악인 프랑크 스미스와 에릭 시프턴이 예티의 발자국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그 사진들을 〈런던일러스트레이티드뉴스〉와 프랑스의 〈파리 마치〉지에 공개했습니다. 당시 그것은 대단한 반응을 불러 일으키고 급기야 에베레스트 탐험에 나서는 산악인들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하는 단체와 언론사까지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나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젠켄베르크 자연연구학회에서 예티에 관한 책을 출간해서 그들의 속임수를 낱낱이 폭로했습니다. 그들이 상상하는 설인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예티란 티베트곰과 다르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와 함께 나는 예전에 찍은 티베트곰의 사진과 가죽들을 증거로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출간된 이후 1938년 스미스와 시프턴은 나에게 예티에 관한 자료를 제발 영국 언론에는 공개하지 말아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비밀이 폭로되는 날에는 언론으로부터 에베레스트 탐험에 대한 비용을 한 푼도 지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쉐퍼 교수는 나치 친위대(SS)의 ‘선조유산 프로젝트(Ahnenerbe)'에 참가했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류학자다. 그 외에도 그는 동물학, 식물학, 농업 그리고 인종학에까지 손을 댔고, 티베트에 관한 한 전문가였다. 선조유산 프로젝트란 히틀러의 나치가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게르만족의 위대한 뿌리를 찾는 프로젝트로 아틀란티스인이 게르만족의 선조라는 가설에서 출발했다. 그는 자신이 예티에 대해 확고한 결론을 갖고 있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1934년 스촨성(四川省)의 군사령관이었던 류상 장군이 나에게 예티의 비밀을 밝혀 줄 것과, 긴 털을 가진 ‘설인’ 한 쌍을 잡아다가 자신의 동물원에 기증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1935년에 나는 양쯔강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는 티베트 내륙 산간 지역에서 수많은 예티를 잡았습니다. 거대한 티베트곰(학명으로 우르수스 아르크투스)의 형상이었지요.’
메스너는 쉐퍼 교수에게 보다 정확한 내용을 알려달라고 했는데 쉐퍼교수가 1992년 7월에 사망하기 직전에 그 회신을 받았다.
“티베트인들은 예티를 ‘드레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중국의 서부 지방에서는 ‘미기오’라고 부르고 황하 유역에서는 ‘베숭(하얀곰)’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원래 베숭이나 팬더곰이 살지 않는 지역인데도 말입니다.”
메스너는 1997년 쉐퍼가 지적한 티베트 고원지대로 가서 직접 예티 즉 ‘하얀 머리’를 확인했다. 체모라 불리는 티베트곰은 검은색부터 밝은 색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대개 혼자 다니는 야행성이다. 종종 두 발로 뛰기도 하는데 허리를 꼿꼿이 펴고 뛰는 자세가 인간의 모습과 흡사하다. 땅바닥에서 뭔가를 파낼 때는 몸을 구부리기도 한다. 배설물의 경우도 잡아먹은 동물의 뼈가 잘게 부셔져 있는 것과 다람쥐와 같이 작은 동물의 털이 섞여 있는 것만 빼고는 인간의 것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체모 또는 예티는 머리가 좋았고 드러내기를 싫어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바위가 많은 산악 지대와 수목 한계선 바로 밑에 살았다. 한여름에는 대개 빙하지대 근처까지 올라가서 살곤 하는데, 다른 편 골짜기로 가기 위해 빙하지대를 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이 가끔 인간들과 접촉한다는 것이다.
결국 히말라야와 시베리아 그리고 남중국 숲 속에 사는 원시인으로 우리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설인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도처에 있는 체모 또는 드레모라 불리는 동물은 존재한다. 반면에 예티라는 이름은 히말라야에 사는 모든 괴물의 총칭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필요한 것이면 무엇이든 만들어낸다. 그것이 원시인이든 야생인간이든 초인이든 말이다. 이렇게 희망 사항으로 생각하고 상상했던 것이 신화가 되고 전설이 된다.
그러나 예티 이야기가 만들어진 방식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예티는 단순히 인간의 상상으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자연에서 나왔고 그것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 계속 전해지면서 전설적인 존재로 변해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핵심적인 사실에 온갖 형태의 전설적인 내용들이 덧붙여졌고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각각의 이야기꾼들에 의해 과장되고 미화되었다는 것이다.
<과학이 찾은 설인>
예티에 대한 여러 가지 정황에도 불구하고 학자들간에 약간의 빌미가 있는 것은 지구의 오지에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한 원인이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가설 자체를 많은 학자들이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알려진 히말라야에 있는 설인이 티베트 곰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네안데르탈인이 설인일지 모른다는 가설이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수만 년 전에 살았던 인류의 조상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자들은 예티, 알마, 설인이 네안데르탈인이라는 주장에 펄쩍 뛴다.
네안데르탈인들이 비록 4만 여 년 전에 멸종되었다고는 하지만 근면한데다가 여러 가지 도구를 만들었으며 모피를 손질할 줄도 알았고 집도 지었으며 불도 사용할 줄 알았다. 물론 환경이 악화되면 모든 것이 퇴화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리 열악한 조건이라 해도 생존의 기본인 의복 즉 모피를 입는 방법은 물론 가장 중요한 불을 만드는 법까지 잊어버릴 수는 없다는 견해이다.
여하튼 설인에 대한 관심이 세계인들의 화두가 되자 드디어 과학이 손을 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코디미가 시작된다.
2004년 벨기에 브뤼셀자유대의 밀린코비치는 유명한 ‘예티’ 즉 설인의 염기서열을 분석해 그 결과를 발표했다. 예티는 키가 2미터가 넘고 온몸이 털로 뒤덮인 설인으로 히말라야 산맥의 고지대에서 발자국 또는 목격담이 전해지지만 확실한 증거가 제시된 것은 아니다.
밀린코비치 교수는 목격자가 예티의 발자국이라고 주장하는 장소에서 발견된 예티의 털을 입수했다. 그는 DNA 분석을 통해 털의 염기서열과 인간, 침팬지, 고릴라, 코뿔소, 당나귀, 말 등 여러 동물의 염기서열을 비교했다.
DNA 염기서열을 얻으면 가까운 종류로 추측되는 종들의 염기서열과 직접 비교하여 가장 비슷한 염기서열 정보를 검색할 수 있다. 한마디로 DNA의 주인공이 진화론 상 어느 가지에 속하는지 판별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예티가 털가죽으로 뒤덮여 있어 포유류에 해당할 것이라 생각했고, 원숭이를 닮은 얼굴에 두 발로 걸으니 인간, 침팬지, 고릴라 같은 영장류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예티의 염기서열을 비교한 결과 허무하게도 말과 유사했다. 사실 진화의 가지 즉 생명의 나무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두 개의 말의 가지와 만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밀린코비치 교수는 유머감각이 그야말로 탁월하다. 그는 말에서 예티가 진화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발표에 많은 학자들이 깜짝 놀랐는데 그는 말이 속하는 발굽이 있는 포유동물인 유제류와 영장류 사이에 강한 형태적 수렴진화가 이뤄진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는 호랑이와 원숭이가 교배하여 새끼를 낳았다는 설명과 다름없는데 그가 발표한 날짜는 바로 만우절이다. 한마디로 예티의 염기서열이 말 또는 적어도 말과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는 뜻으로 예티가 인간과 유사하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알려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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