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2세의 퇴위와 재판 대기〉
러시아가 계속 독일에 패배하자 로마노프 왕조로서는 더 이상 독일과 싸워 승산이 없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전쟁에서 계속 패배하면서 러시아의 민심이 흉흉해질 때 1917년 2월 23일 ‘2월 혁명’이 시작되었다. 원래 2월 23일은 ‘국제여성의날’인데 페트로그라드의 여성들이 ‘빵을 달라’, ‘우리 아이가 굶주린다’를 외치며 거리 행진을 했다.
여기에 공장에서 나온 노동자들이 합세하여 사태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위대의 주장도 ‘빵을 달라’에서 점점 ‘차리즘 타도’, ‘전쟁 중지’, ‘평화와 자유’로 확대되었다.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려 했지만 반대로 사병들은 혁명의 편으로 돌아섰다. 시위가 일어난 지 9일 만에 니콜라이 2세는 퇴위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로마노프 왕조가 예상보다 일찍 마감하게 된 데에는 황태자 알렉세이의 혈우병과도 관련이 있다.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자 군부 장성들은 황제가 퇴위하는 것이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건의했고 니콜라이 2세는 아들 알렉세이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했다. 니콜라이는 의사들을 불러들여 마지막으로 아들의 병을 고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의사들이 단호하게 자신들의 의학 실력으로는 혈우병을 고칠 수 없다고 하자 부득이 황제의 동생인 미하일 대공에게 황제직을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미하일 대공은 한 때 러시아에서 추방당한 전력이 있어 성난 민중들에게 전혀 인기가 없었다. 자신의 인기가 너무나도 없다는 것을 파악한 미하일 대공이 황제가 되기를 거절하자 결국 니콜라이 2세는 후임을 정하지 못하고 퇴위하는 것이다.
황제위에서 퇴위한 니콜라이 2세는 ‘권력이 주는 부담감에서 해방되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아이들과 퍼즐놀이를 즐기거나 정원에서 눈을 치우는 등 전원생활을 즐겼다. 하인들과 함께 채소농장에서 약 500포기의 배추를 심었고 장작을 쪼개면서 겨울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 평온하게 보이는 니콜라이 2세 가족의 생활은 황후가 반혁명분자의 우두머리라고 낙인이 찍혀져 철저한 통제를 받아야 했다. 식사시간과 차 마시는 시간에도 장교가 입회했고 오로지 러시아말로 이야기해야 했다.
1917년 7월, 임시정부의 수반인 알렉산더 케렌스키는 러시아 각 도시에서 소요 사태가 심각하게 발전했다는 보고를 받자 황제의 가족들을 극단적인 혁명군들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아래 비밀리에 시베리아에 있는 토볼스크로 유배결정을 내렸다.
당시에 니콜라이 2세는 외국으로 망명할 수 있었지만 그는 망명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황후 역시 망명을 반대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러시아 안에서 다음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러시아를 떠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외국으로 떠난다는 것은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는 러시아가 다시 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신하들의 러시아를 탈출 계획을 저지시켰다. 대신 진정으로 종교에 귀의하여 평온하게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1917년 10월 혁명군의 주도자인 레닌이 권력을 장악하자 황제 가족은 비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한다. 임시정부 수반인 케렌스키는 볼셰비키 혁명군에게 체포되었고 황제는 법정에 세우기 위해 우랄산맥의 남쪽에 위치한 예카테린부르크로 옮겨졌다. 그때가 1918년 4월이다.
그들 가족들은 소비에트의 지방정부로 넘겨졌고, 가방 이외에는 아무 것도 휴대할 수 없었다. 황후와 딸들은 마지막 순간에 사용하기 위해 8킬로그램 정도의 값비싼 보석을 코르셋에 넣고 바늘로 꿰매었다.
그들은 니콜라이 이파트예프 소유의 2층집으로 옮겨졌다. 그 집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쳐 있었고 창문은 희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곳에 유폐되어 있는 동안 황제 가족들은 하루에 2시간 정도만 정원을 거닐 수 있었다.
황태자 니콜라이는 고질적인 혈우병으로 침대에 항상 누워있었다.
6월 황제 일가의 감시책임자인 야코프 유로프스키에가 황후가 갖고 있는 모든 보석을 내놓으라고 다그쳤다. 자신들에게 점점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황제일가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될 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니콜라이 2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고 루이제 바그너 루스는 적었다.
‘2, 3일 전에 우리는 연달아 2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에는 누군가가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러나 그 날은 이미 지나갔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다림과 초조만이 우리를 괴롭혔다.’
1918년 7월 16일 황후의 마지막 일기장에 쓰여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니키와 카드놀이를 하면서 우리는 아모스와 아우디오 선지자의 책을 읽고 있었다. 10시에 침대로 갔으며 현재 15도이다.’
<황제일가의 처형>
공산당 혁명에 의해 니콜라이 2세는 폐위되고 황제 일가족은 왕궁에 포로로 갇히게 되는데 그들이 억류되어 있는 동안 러시아는 반혁명파인 백러시아 군과 공산당과의 내전이 심화되고 있었다. 특히 반 볼쉐비키의 깃발을 내세운 골챤크 제독은 시베리아에서 해방된 체코군 포로들로 백러시아군을 조직하여 니콜라이2세 황제 일가를 구출하기 위해 에카테린부르크로 진격했다.
초기의 전황이 백러시아 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황제 일가가 곧바로 구출될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전황이 급속도로 나빠지자 모스크바 중앙집행위원회는 황제가 구출된다면 공산주의 혁명에 중대한 타격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에카테린부르크 소비에트에 ‘로마노프 황제 일가를 총살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문제의 날 새벽 3시, 모스코바 중앙당으로부터 파견된 유태계의 유로프스키가 황제 일가에게 말했다.
“황제를 지지하는 반혁명파인 백러시아군이 근처에 도달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송할 테니 옷을 입고 1층에서 대기하시오.”
1918년 7월 17일 새벽 3시, 모스코바 중앙당으로부터 파견된 유태계의 유로프스키가 황제 일가에게 말했다. 그가 대기하라고 말한 1층의 방은 황제가 머물기에는 지나치게 초라하고 조그마했다. 열세 살 난 황태자는 선천성 혈우병으로 가벼운 상처에도 목숨을 잃기 쉬웠으므로 황제에게 의지하여 걸어야 했다. 그곳에 모인 사람은 황제 일가를 제외하고 의사 보드킨과 요리사, 하인 2명을 포함하여 모두 11명이었다.
“황후와 황태자를 위해 의자를 갖다 주게.”
대기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황제가 이렇게 요청했다. 의자를 갖다 준 뒤 얼마 되지 않아서 유로프스키가 10여 명의 군인들을 데리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황제에게 말했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네 부하가 너를 구출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제 너는 총살이다.”
“지금 뭐랬지?”
“이거다.”
유로프스키는 곧바로 황제의 가슴을 권총으로 쏘았다. 유로프스키는 당일 날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황제를 조준한 후 그 자리에서 죽였다. 동료들은 황후와 그녀의 딸들에게 총을 발사했다. 보석을 넣어 꿰맨 코르셋을 입은 여인들은 마치 갑옷으로 무장한 것 같았다. 총알은 그들의 갑옷을 뚫지 못했다. 군인들은 완전히 이성을 잃었고 다시 총알을 난사했다. 총성이 멈추었지만 딸들과 알렉산드라와 알렉세이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나는 그들을 완전히 죽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부하들이 여자들을 총검으로 찔러 죽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살아있는 그녀들의 머리를 향해 총을 쏘았다.’
황제는 쓰러졌고 이어서 다른 가족들도 그 자리에서 모두 사살되었다.
총격으로 죽지 않은 사람은 총검에 찔려 죽었다고 알려졌지만 워낙 작은 방이었기 때문에 권총으로 그들을 사살했다. 당시에 병사들은 모두 85개에서 90개의 탄창을 갖고 있었는데 이 당시에 발사된 총탄은 50여 발이었다. 그것은 작은 방에서 일시에 집중사격하자 총의 연기가 작은 방을 꽉 채워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자 무차별 사격을 중지하고 방을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처형된 11명의 시체를 트럭에 싣고 인근의 코프티아키 숲에 있는 광산으로 갔다. 그들은 시체의 옷을 모두 벗기고 90킬로그램의 황산을 붓고 200리터의 석유로 시체들을 불태웠으며 남은 재와 불에 타지 않은 보석들을 광산의 갱 속에 버렸다는 것이 잘 알려진 니콜리아 2세의 처형에 관한 내용이다.
그리고 며칠 후 에카테린부르크는 백러시아군에게 함락된다.
곧바로 황제 일가의 살해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고 그 조사 결과는 니콜라이 소콜로프의 저서 「러시아 황제 일가 암살의 사법 조사」라는 보고서로 발표되었다.
이때부터 니콜라이 2세 일가에 대한 전설은 시작된다.
우선 광산의 갱 안에 시체를 넣고 나서 왜 황산으로 처리했는가 하는 문제다. 살아있는 황제 일가는 반혁명의 중심이 될 수 있지만, 죽은 후에는 사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백러시아군의 사기를 꺾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더구나 11구의 시체를 처리하려면 많은 분량의 황산이 필요하므로 죽은 사람들을 그렇게 처리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지적이다.
소콜로프는 황제 일가가 처형된 지 이틀 후인 7월 18일에 볼세비키의 공식적인 포고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제는 처형되었으나 그의 아내와 아들은 안전한 장소로 옮겼다.”
다시 이틀 후인 7월 20일에도 다음과 같은 발표가 있었다고 했다.
“마을은 백러시아군에게 점령되었지만 황제는 해방되지 않았다. 황제가 이미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황제 일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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