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원에서 등장한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는 처형될 때인 1918년 당시 17세였다. 그런데 1920년 2월 17일 저녁, 나이 20세 정도의 여자가 베를린의 란드베르 운하에서 투신자살을 기도한다. 러시아 억양의 독일어를 썼던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을 살해할 우려가 있다며 신원을 밝히지 않았다. 경찰은 여자를 ‘프로이라인 운베칸트’ 즉 ‘미지의 여인’이라고 불렀다.
특히 그녀의 몸에는 많은 외상이 있었다. 귀 뒤쪽에 총알이 지나간 찰과상으로 보이는 흉터가 있고 발에는 러시아식 총검에 찔린 듯 별 모양의 흉터가 있었다. 그 밖에도 몸 전체에 상당수 흉터가 있었고 가슴과 팔에도 심한 흉터가 있었다.
병원에 수용된 다음에도 그녀는 6주일 동안 말문을 열지 않았다. 더구나 음식조차 먹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억지로 먹여야 했다. 결국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계속 침묵을 지키면서 특히 외국인과의 접촉을 경계했다. 의사는 총검에 의한 타박상을 입은 충격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그녀는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매너로 보건대 상당한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정신병원에서 보낸 지 2년이 지난 1922년 가을, 그녀는 클라라 포이테르트라는 여자와 한 방을 쓰고 있었다. 포이테르트는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러시아에서 재단사로 일했던 여자였다.
어느 날 포이테르트는 간호원이 넣어 준 잡지를 보고 있었는데, 러시아의 공주 네 명에 관한 기사였다. 사진 한 장은 공산군에 포로가 됐을 때 찍은 네 명의 공주들이었고, 다른 한 장은 아나스타샤 공주의 사진이었다. 기사의 내용은 아나스타샤 공주가 학살 현장에서 극적으로 빠져 나와 파리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 기사였다. 포이테르트는 잡지의 사진과 신원불명의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외쳤다.
“나는 당신이 누군지 알아.”
그녀는 포이테르트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말했다.
“입 다물어요, 입.”
아나스타샤의 전설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황제의 차녀인 타티아나라고 확신한 포이테르트는 구(舊) 제정 러시아군의 기병 대장이었던 안드레이에프스키에게 알려 주었다. 타티아나는 살해될 당시에 21세였다. 안드레이에프스키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이 그녀를 방문했지만, 그때도 그녀는 자신의 신원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 황후를 곁에서 모시던 소피북스게드덴 남작부인이 방문하여 그녀를 보고 그녀가 타티아나 공주라고 보기에는 키가 작다고 말했다.
여하튼 그녀는 제정 러시아 당시 한 지역의 경찰국장이었던 클라이스트 남작(baron Kleist)이 주선하여 그의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녀에게 안전을 보장한다고 하자 그곳에서 그녀는 1922년 6월 드디어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자신은 니콜라이 2세의 막내딸인 아나스타샤 공주라고 했던 것이다.
“어떻게 학살 현장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까?”
그녀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나도 총알을 맞고 까무라쳤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자 2명과 여자 2명이 끄는 농부의 짐마차 속에 숨겨져 있었다. 2명의 남자는 챠이코프스키의 병사들로 이름이 차이코프스키 형제였다. 그들은 처형에는 참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들이 말한 바로는 자신은 죽은 것으로 간주되어 지하실 바닥에 방치되어 있었으며 그들이 시체를 지하실에서 끄집어내다가 아직 숨을 쉬고 있음을 발견했다. 형제는 나를 몰래 러시아 국외로 빼돌리기로 결심했다.
진주목걸이와 드레스 속에 감추어 둔 에나멜 원석을 처분하여 얻은 돈으로 그들과 함께 간신히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 도착했다. 거기서 우리는 차이코프스키의 친척집에 살았다. 나는 볼셰비키가 무서워 숨어 있던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형제 중 한 사람과 결혼하여 아이도 하나 낳았다. 그러나 그 후 얼마 안가 남편은 노상에서 볼셰비키 첩자에게 탈주자임이 발각되어 암살당했다. 나는 실의와 절망에 빠졌고 아이는 양자로 누군가가 데리고 갔다. 남편의 동생인 세르게이 차이코프스키가 나를 베를린으로 데려가기로 했다. 베를린이라면 볼셰비키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생각했다. 여하튼 긴 여로 끝에 베를린에 도착했는데 세르게이는 행방을 감추어 버렸다. 나는 너무나 피곤하고 절망에 빠진 나머지 운하에 몸을 던져 자살하려고 했다.’
챠이코프스키 마담이 아나스타샤 공주라는 것은 그녀의 손에 있는 상처를 보고 황후의 시종이었던 볼코프가 확인해 주었다. “공주의 손에 상처가 나게 한 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제가 어느 날 공주의 손을 자동차 문에 찧게 했거든요.”
안네 프랑크가 쓴 일기의 진위를 판가름하여 유명해진 필적학자 민나 벡커는 공주인 아나스타샤와 챠이코프스키 부인의 필적을 100번 이상 비교한 다음 필적이 같다고 발표했다.
당대에 신원을 확인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귀를 조사하는 것이다. 귀의 세포는 아이 때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귀 테스트’는 당시 충분히 믿을만한 신분증명방법이었다. 놀라운 것은 두 사람의 귀가 17가지 면에서 일치한다는 독일 법의학자 민나 벡케의 분석결과가 발표되었다.
이 부분은 매우 논쟁의 여지가 있는데 추후의 조사 결과에는 신체적 특징으로도 차이가 난다는 증거가 제출되었다. 귀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아나스타샤 공주의 귀는 다소 감긴 형태로 위쪽은 다소 길쭉한데 챠이코프스키 부인의 경우 그런 특징이 전혀 없다는 것으로 차이코프스키 부인의 결정적인 신체특징이 부정된 것이다.
여하튼 유럽 왕가의 실세 중에서도 실세였던 러시아 황제의 딸인 아나스타샤 공주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유럽 왕가를 강타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나스타샤를 만나는 것은 한사코 거부했다. 그것은 커다란 이권이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니콜라이 2세는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골동품이나 보석 등 귀중품 대부분이 혁명 정부에 압수되었지만 그가 상당히 많은 금과 돈을 외국 은행에 예치했다고 알려졌다. 특히 니콜라이 2세가 1,000만 파운드나 되는 엄청난 돈을 영국의 은행에 예치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대로 1,000만 파운드의 돈이 예금되어 있었다면 그동안 이자가 늘어서 3,600만 파운드나 된다고 알려졌다. 만약에 아나스타샤가 황제의 막내딸이라는 것이 확인되면 그 돈은 모두 그녀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러시아를 탈출한 황제의 인척들은 어떠한 권리도 차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진짜 공주가 아니다>
그녀에 대한 확인 작업이 3년 동안 막후에서 이루어지다가 드디어 알렉산드리아 황후의 여동생 올가 여대공이 러시아 황실의 가정교사를 지낸 적이 있는 피에르 질리아르 부부를 파견하여 아나스타샤가 진짜인지 관찰하게 했다.
질리아르는 12년 동안 네 명의 공주들을 가르친 가정교사로서 아나스타샤를 어려서부터 돌봐왔던 사람이었다. 황제의 요청으로 질리아르 부부는 공산당에 포로가 된 다음에도 그들을 교육하였고 유배지인 시베리아와 토볼스크까지 동행하여 학살이 일어나기 6주일 전까지 그들과 함께 있었으므로 공주들의 세세한 면까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질리아르는 아나스타샤라고 칭하는 여자를 만나 본 다음 그녀는 진짜 공주가 아니라 사기꾼이라고 말했고, 1926년 올가 여대공도 그녀가 진짜 아나스타샤는 아니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전기 작가인 앙드레 가스테로와 질리아르의 인터뷰 내용이 당시 상황을 잘 보여 준다. 인터뷰 당시 질리아르의 나이는 79세였다. 그는 자신을 아나스타샤 공주라고 칭한 여자를 환자라고 불렀다.
“아나스타샤 공주는 독어를 잘했습니까?”
“아니오. 그녀는 독일어를 한 마디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영어는 비교적 잘했지요.”
아나스타샤는 가족들과 러시아어는 물론 영어로 대화를 나눌 정도로 영어가 능숙했지만 독일어는 엉망이었다고 알려진다.
“불어는?”
“보통입니다.”
“공부는 잘했어요?”
“아닙니다. 그녀는 어느 분야나 처음에는 열성적으로 배웠으나 금방 열정이 식어 버렸습니다. 사실 황제의 막내딸은 공부에는 성의가 없었습니다.”
“성격은 어땠나요?”
“아나스타샤는 매우 단순하고 천진난만했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이 그녀는 어려서 매우 장난꾸러기였는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 어른스러워졌지요. 그녀의 얼굴에서 센티멘탈한 모습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왕궁에서 가장 활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포로가 되어서도 그랬습니까?”
“예. 토볼스크에 있을 때도 그녀의 성격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가능한 한 포로가 된 다른 사람들의 사기를 올려 주려고 했지요.”
“아나스타샤 공주라고 칭하는 챠이코프스키 부인을 어떻게 해서 만나게 되었습니까?”
“1925년 7월 달에 올가 여대공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여대공은 베를린으로 즉시 가서 아나스타샤라고 말하는 젊은 여자를 만나서 그녀가 정말로 아나스타샤 공주인지 확인해 달라고 했습니다.”
질리아르는 다음 날 안할트 역에 도착하여 곧바로 챠이코프스키 부인이 있는 곳으로 혼자 찾아갔다.
“그녀가 당신을 알아보던가요?”
“아니오.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당신은 어떤 언어로 말했습니까?”
“처음에는 아나스타샤 공주와 평소에 이야기하던 프랑스어로 말했는데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다음에는 러시아어, 영어로 말했는데도 알아듣지 못하더군요. 그녀는 독일어밖에 할 줄 몰랐습니다.”
“독일어도 아나스타샤 공주에게 가르쳤습니까?”
“예. 그러나 그녀가 배우기를 싫어했습니다.”
이것이 챠이코프스키 부인이 아나스타샤 공주가 아니라는 가장 큰 증거 중의 하나였다. 물론 건망증으로 세 가지 언어를 잊어버릴 수도 있다지만, 그럴 경우 그녀가 어떻게 네 번째 언어인 독일어로는 유창하게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관심 거리였다.
“외모는 공주와 닮지 않았던가요?”
“저는 매우 주의 깊게 환자를 살펴보았는데, 그녀는 아나스타샤 공주를 닮지 않았습니다. 환자의 코는 길고 강하게 생겼으며 입도 크고 입술이 두터웠습니다. 공주는 그 반대죠. 공주의 코는 짧고 입은 작으며 입술은 얇습니다. 더구나 목소리도 달랐습니다.”
“챠이코프스키 부인의 말대로 학살 현장에서 개머리판으로 맞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얼굴 형태가 바뀔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학살 현장에서 개머리판으로 맞았다는 환자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만약 개머리판으로 입술 부위를 맞아 형태가 변할 정도라면 적어도 몇 개의 이가 부셔졌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흔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황후의 방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기술하지 않았습니까?”
앙드레 가스테로의 이 질문에 질리아르는 웃었다.
“그것은 분명히 황후의 방이었습니다만, 파울 1세 황제의 황후인 마리아 훼오도로브나의 방으로 100년 동안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 방은 니콜라이 2세가 살았던 궁전이 아니라 짜르스코이에세로 궁전에 있습니다.”
“사모바르(러시아식 주전자)가 그녀의 방에 있었다는 내용도 정확하게 기술했습니다만…?”
“바로 그것도 환자가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그녀는 자신의 방에 사모바르가 있다고 했습니다만, 아나스타샤의 방에는 사모바르가 없었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니콜라이 2세의 궁전에는 러시아의 모든 집에 있는 사모바르가 한 개도 없었으니까요.”
질리아르가 그의 부인인 알렉산드라 테글레바와 함께 챠이코프스키 부인을 만났다. 질리아르 부인도 아나스타샤 공주의 유모였으므로 그녀를 잘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엉뚱한 소리를 했다는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아내를 아느냐고 물었지요.”
“뭐라고 대답하던가요?”
“아내를 한참 쳐다보더니 자기 아버지의 여자 동생이라고 하더군요. 글쎄 아내를 올가 여대공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테글레바는 그녀를 자기가 키우던 아나스타샤라고 확신했다. 챠이코프스키 부인이 자기한테 이마에 향수를 뿌려달라고 한 것을 말했다는 것이다. 이는 아나스타샤가 어렸을 때 테글레바의 애칭인 ‘슈라’에게서 꽃향기가 났으면 좋겠다고 졸랐다는 것이다.
여하튼 챠이코프스키 부인이 아나스타샤 공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제출된 몇 가지 증거는 다음과 같다.
우선 아나스타샤 공주가 자기의 이름을 네 명의 공주가 찍은 사진 위에 서명한 적이 있었다. 그 사진은 1925년에 러시아어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의 비극적인 운명’이라는 기사에 실렸는데, 1926년에 챠이코프스키 부인이 아나스타샤 공주의 서명을 신문지의 여백에 연습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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