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마릴린 먼로

마릴린 먼로(2)

Que sais 2020. 11. 21.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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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기, : 할리우드 배우로 도약>

마릴린 먼로특별한 대우를 받고 등장한 스타들처럼 곧바로 스타가 된 것은 아니다.

누드 모델이라는 딱지 때문에 연기 면보다는 남들과 달랐던 육감적인 몸매가 눈에 띄므로 그녀는 데뷔 때부터 대사 몇 마디만 건네는 엑스트라 연기만 할애되었다.

이때 마릴린 먼로를 구원한 사람이 할리우드 에이전트였던 자니 하이드였다. 그는 마릴린 먼로보다 30이 많은 나이든 남성이었는데 금발 미녀마릴린 먼로에 푹 빠져 마릴린 먼로를 성심성의껏 도왔다. 자니의 도움으로 일개 단역 이었던 마릴린할리우드 스타들 못지않은 대접과 지원을 서서히 받기 시작했다.

<20세기폭스>사는 그녀에게  125로 계약을 맺은 후 스타 만들기 작업 들어갔다. 대중들이 금발을 좋아한다는 것을 간파한 할리우드는 마릴린 먼로이름을 바꾸고 머리색을 빨간색이 들어간 짙은 갈색에서 금발로 바꾸었다. ‘마릴린 19201930대의 브로드웨이 스타인 마릴린 밀러에서 따왔고 먼로는 그녀의 외할머니 이었다.

마릴린 밀러(1898~1936)

그의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은 마릴린 먼로1949러브 해피, 1950년에 존 휴스턴 감독의 스릴러물 정글 아스팔트, 이브의 모든 것에서 비교적 비중이 있는 배역을 맡았다.

그녀가 서서히 할리우드 배우로 성공하자 자니 하이드마릴린 먼로에게 정식 청혼을 하지만, 배우 활동을 지속하고 싶었던 그녀는 자니의 청혼을 거절한다. 그녀와 헤어지는 와중에도 자니먼로에게 매우 중요한 진심 어린 조언을 남긴다.

 

제작자, 감독들과 관계를 맺고 자는 건 좋지만, 절대 원치 않은 임신을 하면 안 된다.’

 

불행하게도 자니 하이드심장마비로 사망하는데 먼로가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1953나이아가라의 주연을 맡아 큰 인기를 얻게 되는데 20세기 폭스엉덩이를 흔들며 걸어가는 먼로 걸음걸이(Monroe Walk)를 선보이는 화려한 선전으로 그녀를 세계적인 섹스 심벌로 만들었다. 섹시한 걸음걸이를 위해 그녀는 오른쪽 구두 굽의 끝을 잘라 신었다고 한다.

먼로 걸음걸이(Monroe Walk)

그녀에 대해 영화사가 주목한 것은 그동안 할리우드를 주름잡던 여배우들과는 남달랐기 때문이다. 풍만한 몸매에 곱슬거리는 금발머리, 얼굴 어딘가 찍혀 있는 매력 점, 도톰하며 살짝 벌어진 입술, 어딘가 나른하고 멍한 듯 보이는 푸른 눈 등이 마릴린 먼로의 외모이지만 그 점이 바로 그녀의 장점이었다.

할리우드에서는 바로 그러한 그녀가 미국의 전형적인 미인의 상징이라고 치켜세웠다. 당시에 강한 남성상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백치미를 가진, 어딘가 둔하지만 순진해 보이고 보호해줘야 할 것 같은 매력적인 마릴린이야말로 시대에 적합한 캐릭터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먼로의 대명사라고도 볼 수 있는 약간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플과 약간은 졸린 듯이 보이는 시선에 환호한 것은 그녀의 표정이 많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방금 누군가와 환상적인 섹스를 나누었어요. 그리고 다음 상대는 당신이 될 수도 있어요.’

그녀야 말로 당대의 남자들이 확실히 상대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더구나 먼로는 관능미에다 어린 소녀의 천진무구함과 연약함을 결합시켰는데 여기에는 그녀가 어린 소녀의 목소리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한마디로 그녀를 본 어떤 남자라도 그녀의 든든한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서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마릴린은 배우로서 치명적인 난독증과 말더듬증을 앓았다. 대사를 잘 외우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은 건 난독증 때문이었다. 하지만 치열한 연습으로 이를 극복했고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악몽으로 인한 불면증은 그녀를 평생 괴롭혔다. 자궁내막증으로 생리통에 시달렸고 대장염도 앓았다. 하지만 마릴린은 신체적 결함에 굴복하지 않았다. 많은 미국인소련과의 냉전, 핵전쟁·공산주의 등에 대한 공포에 휩싸였을 때 코믹한 연기와 애교로 세상을 유쾌하게 달래줬다.

로이스 배너마릴린, 열정과 패러독스에서 엉덩이를 실룩대는 걸음걸이 등 마릴린의 과장된 몸짓은 당시 남성 지배문화가 강요한 여성성에 대한 조롱이었다고 주장했다.

여하튼 잘 나가던 그녀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그녀가 군수공장에 취직하여 한참 돈이 궁할 때 단 50달러를 받고 찍었던 누드 사진이 공개적으로 나돌아 발매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마릴린 먼로가 인기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녀의 누드 사진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사에서는 누드 사진을 찍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면 배우 생활 끝장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사실 그녀가 섹스 어필로 할리우드에서 자리 잡아가고 있었지만 누드 모델을 했다는 것은 당시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서 용납하기 힘든 일이었다.

마릴린 먼로에게 예상치 못한 위기의 순간이었지만, 이 위기를 정면돌파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당대에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던 주간지 <라이프>지를 찾아가 솔직하게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당시 전당포에 맡긴 차를 찾기 위해 50달러가 필요했는데, 그 정도의 돈도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고 눈물로 고백한 것이다.

<라이프>는 그녀의 솔직한 이야기에 매료되어 오히려 먼로에 대한 대대적인 특집호 내주었다. 평소 육감적 매력을 자랑하던 그녀였으므로 누드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는 면죄부를 받으면서 그녀를 스타덤에 올라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를 위협하던 영화사에서도 그녀의 인기가 치솟자 오히려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그녀의 줏가는 놀라울 만큼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는데 그녀가 누드 사진을 찍었다는 것에 눈독을 들인 청년이 나타났다. 바로 독특한 형태의 매거진을 창간하고 싶었던 청년 휴 해프너이다.

 

플레이보이 창간호

그는 마릴린 먼로의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그녀가 군수 공장 종업원 시절 촬영한 사진 판권500달러에 구입한 후 195312월에 창간한 <플레이보이>지에 문제의 누드 사진들을 이달의 연인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했다.

헤프너의 <플레이보이>지의 창간호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래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헤프너는 한 부에 50센트나 되는 창간호가 성공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잡지에 발행인의 이름과 발행 날짜를 고의적으로 넣지 않았다. 그런데 30,000는 팔려야 손익분기점을 넘어설 것이라고 예측되던 잡지가 무려 54,000나 팔리며 대성공을 거뒀다.

이 기사는 마릴린 먼로의 위상을 높여 준 것은 물론 미국 역사에서 매우 유명한 계기도 되었다. 그녀의 누드 사진이 미국 대중매체에 실린 최초의 컬러누드 사진이 되었고 이후 누드 사진이 공개적으로 출간되는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휴 헤프너(1926~2017)

휴헤프너는 그야말로 성공의 가도를 달린다. 이후 <플레이보이>지는 불과 3년 만에 50만부가 팔렸다. 1959에는 <에스콰이어>지를 뛰어넘어 매월 100만 부를 팔았다. 마릴린 먼로가 생계를 위해 찍은 50달러짜리 사진휴헤프너백만장자로 만들어 준 것이다. 학자들은 <플레이보이>지의 엄청난 성공은 헤프너마릴린이라는 모델을 창간호에 활용했기 때문으로 인식한다.

 

<제4: 조 디마지오와의 두 번째 결혼>

이후 마릴린 먼로는 거침이 없었다.

영화인들이라면 거의 모두 알고 있을 돌아오지 않는 강, 나이아가라,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등 화제작을 연달아 내놓으면서 미국의 섹스 심벌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절정기인 1954 1 14그녀는 두 번째 결혼 한다

당대의 야구 수퍼스타  디마지오(Joe DiMaggio)가 그녀의 남편이었는데 언론은 이들의 결혼을 세기의 커플이라고 떠들어댔다. 이들의 결혼은 정말로 주목받을 만 했다.

미국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타자 조 디마지오와 할리우드 빅스타로 발돋움한 마릴린 먼로가 결혼했기 때문이다.

조 디마지오194156경기 연속안타를 기록했으며 뉴욕 양키스10차례월드시리즈 우승을 안긴 선수였다. 2차 세계 대전에는 프로야구 선수로 참전하지 않을수도 있지만 직접 참전하는 등 남다른 애국심도 갖고 있어, 미국인에게는 만인의 영웅이자 당대 최고의 스타였다.

영화계와 스포츠계의 당대 최고 스타들의 결혼이란 점에서 둘의 결혼은 큰 화제가 되었는데 당시 디마지오39로 현역이 아니었다. 마릴린 먼로는 이보다 12살 어린 27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은퇴한 야구선수 남편과 한참 활발하게 활동하는 여배우 아내가 온전하게 나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시각이 많았다.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

참고적으로 메이저리그에서 앞으로도 영원히 깨지지 않을 기록으로 두 가지를 꼽는데 첫째조디마지오의 56게임 연속 안타이며, 둘째가 타이 콥의 타율 419. 아직 한국과 일본의 프로야구에서 4할 타율이 나오지 않았는데 타이콥4할 타율을 세 번이나 기록한 유일한 선수.

먼로디마지오와의 결혼을 기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는 야구 선수일 뿐만 아니라 만능 스포츠맨이다나보다  뼘은 키가 크다내가 머리 가르마를   조는 뒤에서 그것을    있다.’

 

그런데 이들은 1년도 채 못 되는 정확하게 274일 만에 이혼한다.

이혼 사유는 직업상의 갈등이지만 한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실 두 사람은 물과 기름과 같은 존재였다. 그것은 결혼식에서부터 드러났다. 미국 야구 역사상 아직도 깨지지 않는 56게임 연속 안타를 기록한 후 은퇴한 슈퍼스타인 디마지오결혼식을 조용하게 치루자며 결혼 신고를 위해 샌프란시스코 시청에 함께 도착했다.

문제는 타자기였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시청에는 타자기가 한 대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결혼 증명서를 발급받는데 시간이 걸리자 먼로는 자신과 계약한 <20세기 폭스>사에게 결혼 사실을 알려주었다.

<20세기폭스>사로서는 자신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결혼한다는 것에 놀랐지만 그들의 대처는 그야말로 재빨랐다. 마릴린 먼로시청에서 전화를 건 지 30분도 안 되어 수많은 관중들이 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관중들은 디마지오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먼로를 보러 온 것이다. 흥미있는 사실은 먼로가 자신의 나이가 28인데도 불구하고 25로 기록한 것이다.

허니문 후반에 두 사람은 일본으로 날아갔다. 본래 이것은 디마지오가 계획한 것으로 결혼하기 훨씬 전부터 야구계의 우상인 옛 친구 오들에게 일본 순회 여행에 동행하겠다고 약속했다. 디마지오는 친구와의 약속도 지키고 2년 전 도쿄에서 은퇴시합을 한 적도 있었으므로 일본의 야구시즌 개막을 위해 먼로와 함께 기꺼이 일본으로 여행지를 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