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마릴린 먼로

마릴린 먼로(3)

Que sais 2020. 11. 21.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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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디마지오와 먼로일본에 도착하자마자 부터이다.

당대의 미국 여건으로 보아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의 상황은 절대적으로 조 디마지오우월했다. 그러나 일본미국이 아니었다.

조 디마지오는 여러 가지 상황을 검토하여 일본을 허니문으로 택했다.

특히 일본에서 은퇴식을 거행하기도 하여 일본인들이 그를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일본인들이 야구의 슈퍼스타인 자신을 엄청나게 환영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일본에 도착해보니 일본인들은 디마지오가 아니라 먼로에게 열광했다.

공항에서 도심으로 향하는 길가에서 환호하는 사람들은 온통 먼로를 외쳤다. 호텔에서는 200여 명의 경관먼로에게 다가가는 것을 철저하게 막았지만 역부족이였다. 팬들은 연못에 빠지기도 하고 회전문에 끼이기도 했으며 쇼윈도 유리를 깨기도 했다.

디마지오낙담하게 만든 것은 미세스 먼로가 아니라 미스터 먼로로 불렸다는 점이다. 가장 일본인들을 놀라게 한 것은 한 인터뷰에서 속옷을 입었느냐는 질문에 내일 옷을 살 거에요라고 대답하여 일본인들을 자지러지게 만들었다. 실제로 그녀는 결혼 이후 속옷을 입었다고 하는데 그녀가 일본을 방문한 후 속옷을 벗어 던졌다고 한다.

디마지오를 정말로 화나게 만든 것은 한 장군이 그들 부부에게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병사를 위문해 주지 않겠느냐고 질문했을 때이다. 디마지오기꺼이라고 대답했는데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게 물은 것이 아니라 부인에게 물은 거지요.”

 

불쾌한 순간이지만 신혼여행이므로 꾹 참았는데 장군디마지오에게 다그쳤다.

미스터 먼로로서 한국에 동행하겠느냐 아니면 먼로한국을 방문케 하고 그는 일본에 머물겠는냐는 질문이다. 자존심이 강한 디마지오는 후자를 선택했고 먼로혼자 한국으로 향했다.

먼로19542, 한국행을 결정한 것은 한국에서 콘서트를 여는 것이 애국적인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방문할 미군부대는 미국의 정예부대인 해군 제1사단으로 그녀의 첫 위문공연은 대구 동촌 비행장에서 진행되었다.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보러온 수많은 미군을 향해 마릴린 먼로는 노래하고 춤추며 그들을 위로했고, 그 모습은 전 세계 언론에 소개되었다.

 

마릴린 먼로와 최은희

당시 그녀를 환영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인파가 대구 동촌비행장에 모여 일대 소동이 벌어졌는데 국내 영화 배우인 백성희와 최은희가 그녀를 마중 나가 환영했다. 두 여배우의 환영마릴린 먼로는 두 사람과 팔짱을 끼며 다정하게 환영을 받았다. 훗날 먼로는 자서전에서 당시의 공연을 회상하며, ‘한국은 매우 인상 깊은 나라였다.’라고 회고했다.

먼로4일간 한국에 머물며 10차례 공연을 펼쳤다.

 

마릴린 먼로 한국 공연

대부분의 군인들은 먼로를 한 번도 영화에서 본 적이 없었다.

먼로가 인기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때 전선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로장병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부대를 방문하기 2개월 전로스앤젤레스에서 발간된 <플레이보이>지의 창간호에 먼로가 표지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녀의 부대 공연은 정말로 세계를 강타했고 병사들은 열광했다.

 

탱크 탄 마릴린 먼로

그녀는 당대의 할리우드 스타였음에도 다른 배우와는 달리 깐깐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진을 함께 찍고 싶다고 말하면 누구와도 찍어 주었다. 먼로도 이 당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두 함께 라는 느낌이었어요.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나를 받아들여주고, 또한 나를 아주 좋아한다는 사실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꼈지요. 소망이 이루어진 느낌이었어요.

 

먼로한국에서 공전의 성공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디마지오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먼로도쿄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기쁨을 디마지오에게 전했다.

 

. 너무 굉장했어요. 10,0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환성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지 알아요?.”

알지. 그런데 내 경우는 75,000명이었어.”

 

일본에서 찬바람을 맞은 조디마지오마릴린 먼로에 대한 폭발적인 인기에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고, 그럴 때 마다 사사건건 그녀의 일상에 개입했다. 자유분방한 먼로와 달리 조 디마지오가족관을 엄숙하게 따지는 이탈리아계 남성이었다.

먼로와 조 디마지오는 자주 충돌했는데 결국 두 사람의 관계에 종지부를 찢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1954910 새벽 2시 뉴욕에서 마릴린 먼로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한 장면을 찍을 때이다. 바로 7년 만의 외출에서 뉴욕 지하철역 송풍구 바람에 날려 올라가는 치마를 손으로 누르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할리우드 영화 사상 명장면으로 꼽힌다. 덕분에 마릴린세계 최고의 섹스 심벌로 떠올랐지만, 조디마지오에게는 그야말로 불만족스러운 기억이기도 했다.

 

촬영 장소와 시간이 공개되는 바람에 새벽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현장에는 4,000여 명의 팬들과 사진기자 100여 명이 몰렸다. 송풍구의 바람으로 마릴린의 치마가 올라가는 장면을 빌리 와일더 감독15이나 찍게 했고 그때마다 구경꾼들은 환호했다. 속옷이 노출되며 함성은 더 커졌고, 빌리 와일더 감독마릴린의 다리 사이로 점점 포커스를 옮겨갔다.

이를 지켜보던 마릴린의 남편조디마지오는 화를 내며 자리를 떴다.

관중들의 열광하는 소리는 호텔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조 디마지오를 분노케 했고, 결국 촬영이 끝나고 돌아온 마릴린 먼로에게 폭력을 가했다. 두 사람의 난투극에 호텔은 큰 난리를 겪었고 먼로는 얼굴의 멍든 자국을 숨기기 위해 짙은 화장을 해야만 했다.

결국 결혼한 지 287일 만에 두 사람은 이혼을 하게 된다.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조디마지오가부장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외향적인데다 자유로운 마릴린 먼로의 성격에 반발하여 가정폭력을 자주 저질렀고, 야구 배트까지 써서 마릴린 먼로를 상습적으로 폭행했다고 한다. 어찌나 맞았는지, 이 시절의 먼로는 얼굴의 자주 멍이 생겼는데 법원에 이혼장을 내밀면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가 날 때릴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혼 후에도 디마지오 먼로를 사랑했다는 것은 전설로 통할 정도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디마지오마릴린 먼로 사후 매주 3번씩 먼로의 무덤에 꽃을 바치며 그녀를 그리워했다. 반면에 케네디 가문의 형인 케네디 대통령,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와는 먼로의 스캔들을 싫어하여 케네디 가문을 증오했고,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도 거절했다고 한다. 디마지오가 폐암으로 죽기직전에 변호사에게  말은 이를 증명한다.

 

먼로를 다시   있겠어.”

 

<제5: 미국의 지성 아서 밀러와 결혼>

1956 6 29먼로 유명한 대중 작가이자 미국의 지성으로 알려진 아서 밀러(Arthur Miller) 세 번 째 결혼하여 줏가를 보다 높인다.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이 전설적인 스포츠 스타와 여배우의 만남이었다면, 아서 밀러와의 결혼은 이 시대 최고 지성인과의 만남이라 더욱 화제가 되었다. 어울리지 않아 보인 두 사람은 여러 공식 모임에서 만난 인연을 통해 친분을 쌓았다.

아서 밀러마릴린 먼로에게 팬의 한사람으로서 진심으로 그녀를 위로했고, 먼로는 그의 자상함에 저절로 반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자신을 섹스심벌이 아닌 인격체로 대해준 아서 밀러와 사랑에 빠진 먼로는 결혼을 결심하게 되고, 결혼 이후에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아서 밀러의 종교인 유대교로 개종하기까지 했다.

아서 밀러1915년 미국 뉴욕에서 아버지의류 제조업자, 어머니 전직 교사유대인 중산층 가정의 3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 시절 불어 닥친 대공황으로 그의 가정도 몰락하여, 고등학교를 나온 후 접시닦기, 운전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는데 그런 와중에 고학으로 겨우겨우 미시간대학교 연극과를 졸업했다. 그런데 그는 재학 중에 쓴 몇 편의 희곡이 상을 받는 등 호평을 받자 작가로서 자신감을 가지며 졸업 후 뉴욕에서 라디오 드라마는 물론 희곡도 썼다. 이 당시 출간한 작품이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수산업 경영자와 아들의 대립을 다룬 전쟁 비판 심리극 모두가 나의 아들로 비평가와 관객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이어서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퓰리처상 및 비평가 단체상을 받으며 작가로서의 위치를 공고히한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평범한 샐러리맨의 꿈과 현실과의 괴리부자 간의 이야기를 곁들여, 당시 현대의 불안을 강렬하게 그려낸 명작으로 알려진다. 이들 작품을 통해 아서 밀러는 전후 미국 연극계에서 1인자의 지위를 차지한다.

특히 1953에 발표한 시련, 17세기 뉴잉글랜드에서 벌어졌던 마녀재판을 주제로, 당시 전 미국을 휩쓸었던 공산주의를 공격하는 매카시즘을 비판하고 풍자한 희곡으로 그가 공산주이자라는 공격을 받아 아서 밀러에 큰 족쇄가 된다.

그러나 그는 당대의 메카시즘에 의한 무차별 공격에도 굳굳하게 버티면서 계속 작품을 썼고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퓰리처상을 수상하는 등 수많은 희곡과 소설, 라디오 드라마, 평론을 썼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미국인의 공통된 비극적 생활상을 주제로 해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테네시 윌리엄스와 함께 미국 연극의 발전과 실험에 크게 이바지한 작가로 평가받았다.

테네시 윌리엄스(1911~1983)

이러한 당대의 지성인과 결혼한 마릴린 먼로이므로 그녀는 아서 밀러 공개적으로 칭찬하고 다녔다. 아서 밀러 역시 먼로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작품의 영감 얻는다고도 말하면서 먼로의 인간성 가치 다른  누구보다도 훌륭하다고 말했다.

사실 먼로와 밀러부부관계라기보다는 사제 관계에 가까운데도 먼로밀러와 결혼한 것은 지성적인 남편을 얻어 기존의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싶어 했기 때문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아서 밀러마릴린 먼로가 스타 시절부터 겪어온 스트레스와 신경쇠약을 받아주는데 골머리를 앓았다고 한다. 관계 완화를 위해 두 사람은 아이를 가지려 했지만, 임신한 지 석 달 만에 유산하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즉 그들의 사이는 밀러와의 사이에서 임신한 아이를 사산한 후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세 번의 결혼 생활에도 마릴린 먼로가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이유는 10 때부터 거듭된 낙태 수술자궁이 엉망이 되었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조 디마지오, 아서 밀러와 부부 관계를 유지하면서 몇 차례의 임신이 있었지만, 이러한 문제 때문에 번번이 유산으로 끝나고 말았다.

여하튼 아서 밀러와의 아이를 잃은  먼로는 프랑스 배우 이브 몽땅프랭크 시나트라 등과 어울리는데 아서 밀러1961에 그녀를 위해서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을 써준다. 마릴린 먼로그녀의 마지막 영화로 직접 출연했는데 8월 개봉을 일주일 앞두고 언론의 집요한 추적과 그녀의 다른 남자배우들과의 염문을 참지 못한 아서 밀러가 폭발하여 결혼 생활 4년 만에 결국 이혼을 발표한다.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The Misfits)-2021년 개봉

당시 두 사람의 이혼을 한 언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꼬집었다.

 

그들의 이혼은 백치미와 지성이 만나면 얼마나 비참해지는 가를 단적으로 보여  일례이다.’

 

여하튼 아서 밀러는 이혼 후 마릴린 먼로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자 두 사람의 결혼과 이혼, 사랑과 이별의 과정을 그린 추락, 이후를 출간한다. 사람들은 아서 밀러책을 통해 그녀를 애도했다고 설명한다.

추락,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