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드라큘라

뱀파이어(드라큘라) 원조, 드라큘라 백작(2)

Que sais 2020. 11. 24.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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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계의 영웅 블라드 드라큘라>

유럽에서 페스트가 극성하여 뱀파이어에 대한 전설이 계속 전해지고 있는 동안 드라큘라의 직접적인 모델로 알려진 블라드 드라큘라(블라드 테페스, 14311476) 이 등장한다.

블라드의 할아버지인 미르세아 왕1386년부터 1418년까지 왈라키아를 다스렸고 그가 다스리는 동안 왈라키아는 오스만터키 제국에 조공을 바쳤다. 하지만 왈라키아 내부에서 일어난 복잡한 사건 때문에 아버지인 블라드 드라큘이 왕위를 잇지 못한다. 그에게 드라큘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그가 용감한 사람이라는 설악마의 이미지인 드락(Drac)이 그의 가슴에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또한 일부학자들이 중세까지 동유럽에서 살았다고 주장하는 드래곤이라는 말도 있다.

원래 아버지와 아들 모두 블라드 드라큘라로 불리는데 혼동을 피하기 위해 아버지는 블라드 드라큘이라 부르고 아들은 블라드 드라큘라라고 부른다.

블라드 드라큘은 곧바로 왕위를 계승하지는 못했으나 헝가리와 독일에서 교육을 받았고 1410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를 수행한 실적도 있었다. 지기스문트용의 기사단(Order of the Dragon)'이란 비밀 결사단체를 조직했는데 드라큘도 기사단의 일원이었다. 이 기사단은 이교도로부터 기독교 교회를 보호하고 발칸반도 전역에서 준동하는 터키인들에 대항해 십자군을 조직하기 위한 비밀 군대이자 종교단체였다.

지기스문트는 드라큘을 1431년에 트란실바니아의 군사령관으로 임명했고 1435년까지 군사령관직을 유지했는데 블라드 드라큘라1431년 군사기지인 시기소아라에서 몰다비아의 크네아이나 왕녀의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미르세아라는 형이 있었으며 라두라는 동생이 태어난다.

1436년 블라드 드라큘은 할아버지 미르세아 왕으로부터 왈라키아 왕위를 탈취한 이복 형제인 알렉산드르 1를 격파하고 블라드 2세 왕이 되지만 남쪽에 있는 오토만 제국, 즉 터키의 막강한 힘에 굴복하여 기독교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결단을 내린다. 터키와 동맹을 맺는 것이다. 1437년 드라큘은 술탄 무라드 2와 만난다. 당시에 무라드 2세르비아와 불가리아를 점령하고 그리스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드라큘라 백작

드라큘이 오토만 제국의 군대에 합류하였음에도 술탄은 드라큘을 믿을 수 없다며 1441년 그를 체포한다. 이때 드라큘은 왕자인 드라큘라와 라두와 함께 있었는데 그들도 함께 체포된다. 추후에 드라큘은 두 왕자를 인질로 남긴다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그 후 두 왕자는 터키의 에그리고즈에서 16년을 보낸다. 드라큘은 터키인처럼 키워지며 터키어로 말하였다. 그는 기독교인이었지만 비잔틴을 점령하고 있는 터키인들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특히 그는 술탄의 궁전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처형에 자주 참석하였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포함하여 생을 경시하는 것도 배웠고 먼저 공격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와 자신들을 함정에 빠뜨린 터키인들의 배반까지 잊은 것은 아니었다.

드라큘라16살인 1447아버지와 큰형 미르스가 헝가리의 황제 훈야디에게 체포되어 반역자로 몰려 처형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훈야디가 드라큘이 터키와 동맹을 맺은 것에 대해 응징한 것이었다. 드라큘라의 형 미르세아는 벌겋게 달구어진 쇠말뚝에 찔려 장님이 된 채 생매장되었고 드라큘은 수도원에서 암살되었다. 또한 왈라키아의 왕관이 아버지의 왕위를 찬탈하였던 알렉산드르 1세의 아들인 블라디스라브 왕자인 단에게 돌아갔다는 것도 알았다.

드라큘라는 아버지가 빼앗긴 왕관을 찾기 위해 1448년 터키를 탈출한 후 그의 삼촌 보그단이 통치하는 몰다비에서 몸을 의탁하면서 힘을 키웠다.

여기에서 드라큘라의 천재적인 아이디어가 튀어나온다.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로 커졌다고 생각하자 드라큘라는 1456년 아버지와 형을 살해한 훈야디와 동맹을 맺은 것이었다.

훈야디도 평생을 터키와 싸운 기독교인들의 영웅으로서,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여 터키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 주기도 한 전략가이기도 하였다. 드라큘라로서는 훈야디 밑에서 전투를 배울 필요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그의 신임을 얻어 왕관을 되찾는 것이었다.

드라큘라의 계산은 적중하였다.

훈야디는 드라큘라의 영지를 찾도록 도와주었고 드라큘라는 블라디스라브를 쫓아버리고 왕위에 올랐다. 같은 해 훈야디는 술탄 모하메드 230만 명의 터키군을 이끌고 벨그라드로 진격하는 것을 알고 전 기독교인들에게 전투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드라큘라는 즉각 훈야디 측에 참가하여 전투에 임하였고 모하메드 2는 완패했다.

왕위에 오른 드라큘라는 자신의 취약점과 앞으로 누가 왕국의 궁극적인 적이 될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자신의 국가 안에 있는 돈 많은 부호들이었다. 드라큘라는 그들을 제거하기 위한 계교로 수도인 타르고비스트 궁에서 왕위에 오른 것을 축하하기 위한 축제를 열었다. 모든 초청자들을 드라큘라는 친절하게 환대하였다. 파티가 끝날 때가 되자 드라큘라는 참석자들에게 일일이 물었다.

 

당신이 살아오는 동안 몇 명의 왕을 보았소?”

 

모두들 자신이 보았던 왕의 숫자를 말하였다. 귀족들은 비웃는 표정으로 차례로 대답했는데 가장 많은 숫자는 30명이었다. 지배자가 끊임없이 바뀌는 왈라키아에서 귀족들이 군주를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지가 분명히 드러났는데 그들 중 가장 젊은 참석자는 5명의 왕을 모셨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이 드라큘라가 판 함정이었다. 5명 중에는 자신의 아버지 왕관을 찬탈한 블라디스라브 왕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드라큘라는 500명에 달하는 전원을 체포하게 한 후 모두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드라큘라가 그들을 처형하는 방법은 매우 특별했다. 그는 날카롭게 깎은 기다란 말뚝을 갖고 오게 했다. 체포된 사람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았다. 체포된 사람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지만 남자는 항문(여자의 경우 질)으로 말뚝을 삽입했다. 그 후 사람이 꿰인 말뚝을 일으켜 세우면 무게 때문에 말뚝이 입을 뚫고 나오거나 머리를 꿰기도 했다. 직접 배나 등을 뚫고 나오기도 하였지만 그 어느 경우도 희생자의 신체가 땅에 닿지 않도록 하였다. 사형 집행자들은 드라큘라가 희생자들이 고통 속에서 천천히 죽어 가는 모습을 즐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말뚝은 가끔 정교하게 조각되고 색칠을 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말뚝에 박아 사람을 처형하는 것은 서아시아에서 성행되던 처형방법으로 드라큘라가 술탄의 궁전에서 배운 것이다. 과거에 아시리아 등에서도 시행된 악명 높은 처형 방법인데 가장 잔인한 처형방법으로 알려진 십자가형과 화형에 비해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고 알려졌다.

화형의 경우 많은 화목이 필요하며 냄새가 많이 나는 단점이 있고 십자가형 역시 사람에게 고통을 많이 주지만 말뚝에 비해 번거롭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드라큘라가 십자가형을 택하지 않은 것을 종교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드라큘라백작의 식사

더욱이 말뚝형의 장점은 사람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공포감과 모멸감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체로 말뚝에 꽂혀 있는 것을 본 적군들로부터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게도 하겠지만 그 반대로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데도 큰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드라큘라이교도인 아랍인들의 사기를 꺾는데 중요한 것은 공포감과 모멸감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은 수많은 말뚝형이라고 인식했다. 다소 비상식적이라고 느껴질지 모르지만 과거의 전투에서 잔인함이 적군의 사기를 꺾는데 가장 좋은 무기였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하튼 1461, 드라큘라는 왈라키아와 오스만 투르크 제국 사이의 전쟁을 부추겼다. 그가 수도인 티르고비슈테에 새로 지은 궁전에서 터키 대사 일행을 영접한 일화는 유명하다.

드라큘라는 터키의 대사들에게 자신의 궁전에서 터번을 벗도록 요구했다. 터키 대사 일행은 어전에서 터번을 쓰는 것은 우리나라 풍속입니다.”라고 말했다. 드라큘라는 빈정대는 투로 나 역시 귀국의 법도를 강화하기를 원하오.”한 후 터키 대사 일행의 터번에 쇠못을 박아 머리에 고정시키라고 명했다. 그런 다음 터키 대사 일행에게 술탄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라고 했다.

 

귀국의 주인에게 전하라. 귀국의 주인은 이러한 수모를 견디는 데 익숙해 있으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 원치 않는 다른 나라 군주들에게 자기 나라 풍속을 강요하지 말고 자기 땅에서나 지키라.”

 

드라큘라의 모욕적인 도전에 터키의 술탄이 응해오자 우선 국내를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드라큘라가난과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그의 성으로 모두 초청하였다. 자비로운 조치가 내려질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전국의 거지와 부랑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드라큘라는 그들은 임시로 지은 호화스러운 집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고 마실 수 있게 해 준 후에 그들이 묵는 집의 문을 잠그고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집은 불길에 싸여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갔다. 그것을 보면서 드라큘라는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저들이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두 번째는 이 세상에서 가난과 병으로 고통받지 않도록 저들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이다.”

 

드라큘라도둑, 거짓말쟁이, 남색가는 물론 손님을 속인 장사치들과 간음한 여자들을 모두 말뚝으로 제거했다. 기록에 의하면 블라드가 통치할 동안 왈라키아에서 범죄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블라드는 광장에 황금 잔을 갖다 놓게 했다. 황금 잔으로 누구나 물을 마실 수 있었지만, 몰래 가져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황금 잔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내내 광장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급기야 드라큘라와 터키의 싸움이 시작되자 터키는 드라큘라에게 루마니아 남부에 있는 지우르귀에서 만나자고 제의한다. 드라큘라 자신을 포함하여 아버지인 트라큘, 친동생 라두가 체포되었던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부하들이 강력히 반대하였지만 드라큘라는 예상외로 승낙하였다.

부하들의 호위를 받는 드라큘라가 터키의 진영에 거의 도착하자 갑자기 수많은 터키인들이 그들을 향하여 공격해왔다. 그러나 이미 그런 계획을 예상하고 있었던 드라큘라는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드라큘라를 속였다고 생각한 터키 진영은 오히려 무너지고 수많은 터키군이 포로로 잡혔다. 드라큘라는 포로로 잡힌 모든 터키인들을 말뚝형에 처했다.

 

드라큘라와 오스만투르크의 전투

그 후 드라큘라는 계속 터키를 공격하여 무려 25,000명의 터키인말뚝형으로 처형했다. 이에 분노한 술탄 모하메드 214621월 당시로서는 대군인 25만 명을 동원하여 왈라키아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드라큘라의 병사는 모두 합해봐야 4만 명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러나 드라큘라의 전략은 상상을 뛰어 넘었다. 드라큘라는 터키인들이 지치도록 모든 것을 불태우는 초토화 작전 즉 청야 작전을 폈다. 고구려와 전설적인 스키타이중국과의 전투에서 활용한 방법으로 진격하는 터키군은 먹을 것은 물론 물 한 방울 얻을 수 없었다. 터키군은 굶주림 상태에서 전진했지만 30,000명의 터키군 선봉대 중에서 1,000명만이 살아 되돌아 갈 수 있었다.

드라큘라의 용맹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모하메드 2를 살해하기 위해 몇 명의 부하만을 이끌고 직접 터키 진영에 침투하였다. 그러나 한밤중이라 술탄의 고문 함자를 살해하는데 그친다. 분을 참지 못한 술탄은 드라큘라를 찾아 헤맸지만 어디에서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가장 모욕적인 것은 철저히 파괴된 집 앞에 항상 말뚝이 있었고 터키군의 머리가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말뚝에 술탄의 고문함자의 머리가 걸려 있었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술탄이 한 지역에서만 20,000에 이르는 말뚝에 꿰인 시체들이 산을 이루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술탄은 남자들과 여자들, 아이들의 시체가 절단되어 썩고 있는 것을 보았다. 더구나 새들이 살을 파먹고는 해골과 갈비뼈 속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모하메드는 지난 해 겨울에 잡힌 터키 전사들의 시체도 발견했으며 전쟁이 시작하기 전에 드라큘라를 암살하려고 보냈던 두 명의 암살자들의 시신도 발견했다. 술탄은 끝까지 드라큘라를 찾으려고 하였지만 터키군에서 페스트가 창궐하자 눈물을 머금고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