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속인 거짓말/동방견문록

중국 여행 없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8)

Que sais 2020. 12. 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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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의 과장벽>

마르코 폴로가 아시아를 여행할 때 이슬람제국몽골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의 내용으로 학자들을 크게 괴롭힌 것은 마르코 폴로 가족몽골인을 위해 투석기를 제작했다고 기록했다는 점이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인이 자신이 개발한 투석기를 이용해 중국의 송나라 도시 샹양(襄陽)정복했다고 적었다.

 

샹양은 열두 개의 크고 부유한 도시를 관할하는 만지 지방의 큰 도시로 상업과 광범위한 제조업의 대중심지. 이곳 주민들은 시체를 화장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타타르 황제(원나라)의 지배를 받는 것은 물론 황제발행한 지폐를 사용한다. 이곳은 대도시답게 모든 물건이 충분히 공급돼 만지 지방이 점령된 다음에도 황제에게 항복하기를 거부하고 3년간 포위 공격을 견뎌냈다.’

 

포위전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것은 공격군이 주로 북쪽으로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나라 지폐

이에 당시 궁정에 있던 니콜로와 마페오 형제황제에게 나아가 유럽에서 사용하는 투석기, 즉 무게 300파운드의 큰 돌을 멀리 던질 수 있는 기계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황제는 그들의 설명을 듣고 유능한 대장장이와 목수들을 모아 그들의 명령에 따라 일하도록 명했다.

폴로 형제의 지시를 받아 여러 대의 투석기를 만들었고 샹양의 전면에 설치돼 상양의 대부분 건물들을 파괴했다. 주민들은 마치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크게 두려워해 곧바로 항복했다. 폴로 형제의 고안이 성공하자 두 형제에 대한 명성과 신용은 더욱 높아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과 페르시아의 원전몽골군이 샹양성을 공격할 때 사용한 샹양포회회포를 누가 만들었는지가 적혀 있다. 기록에는 페르시아 건축가 탈리브그의 세 아들이다. 더욱이 샹양이 정복된 것은 12732폴로 가족몽골에 도착하기 1년 전이다. 물론 송나라가 멸망한 다음에도 샹양저항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샹양이 결정적으로 항복한 것은 1274년 이후의 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많은 학자가 폴로 가족의 투석기 제조에 의문을 품는 이유는 󰡔동방견문록󰡕의 기록처럼 그들이 몽골을 위해 중요한 전투 장비를 만들어 주었음에도 유럽에는 화약무기에 대해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대에 몽골은 유럽이 알지 못하는 화약무기로 공격해 유럽인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폴로 가족이 정말로 몽골을 위한 군사전문가로 활약했다면 몽골의 군 체계나 장비를 몰랐을 리가 없다. 그들이 베네치아로 돌아와 화약무기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환대를 받았을 것이 틀림없다는 뜻이다.

마르코 폴로는 자신이 가본 적 없는 몽골의 옛 수도 카라코룸에 대해서도 묘사했다.

그가 그곳을 방문하지 못한 것은 그 시대에 황제겨울에는 칸발리크(북경)에 머물렀고 여름에는 북경에서 북서쪽으로 300킬로미터 떨어진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상두(上都)에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상두의 몽골식 이름108개 사원의 도시이며 중국인쿠빌라이의 궁전이 밝게 빛난다고 해서 수정궁이라고 부른다. 스물한 살 무렵, 마르코 폴로상두 궁전에서 환대를 받았으며 황제가 특별히 마르코 폴로를 마음에 들어 했다고 적었다.

 

그들이 쿠빌라이 황제의 궁전에 도착하자 황제는 중신을 모두 좌우에 불러 세우고 정중한 예절을 갖추어 접견했다. 그들은 황제 앞에 나아가 무릎을 굻고 엎드려 경의를 표했다. 황제는 즉시 그들을 일어나게 하고 여행 사정과 로마교황과의 교섭 내용 및 그 결과를 이야기하도록 명했다. (중략)

그들은 그레고리10세의 친서와 선물을 황제 앞에 내놓았고, 서한의 내용을 들은 황제는 그들의 충성과 노력을 크게 칭찬했다. 그런 다음 예수의 무덤에서 가져온 신성한 기름을 경건하게 받고 잘 보존하도록 신하에게 명령했다. 이어 황제마르코 폴로를 가리키며 이 소년은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니콜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 아들놈이지요. 폐하의 신하입니다.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데려온 가장 사랑스러운 선물로 소인의 나라에서 함께 온 폐하의 신하입니다. 이 아이는 폐하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될 것입니다.’

황제는 반가운 낯으로 잘 왔다고 말한 후 마르코 폴로를 그의 명예로운 근신 중 한 사람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잔치를 베풀도록 했다. 그 뒤 폴로 가족이 황제의 궁정에서 벼슬을 살고 있는 동안 황제의 모든 신하로부터 존경과 대접을 받았다. (중략) 마르코는 황제에게 봉사하고 있던 17년간 유용한 인물로 인정받아 제국 내의 각지와 속령에 비밀 사명을 띠고 자주 파견되었다.‘

 

특이한 것은 마르코 폴로가 누구나 보았음직한 만리장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르코 폴로중국으로 가는 여정 중에 여러 번 지나쳐야 하는 만리장성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는 이유를 마르코가 중국에 다녀갔다는 사실 자체가 없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그의 기록을 다른 여행자의 이야기를 수집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것이다.

 

마르코폴로와 쿠빌라이

󰡔동방견문록󰡕을 철저하게 연구한 헨리 율 박사마르코 폴로가 여행 중에 수없이 넘었을 만리장성에 대해 설명이 없다는 점에 의문을 표시했다. 물론 만리장성을 언급하지 않은 마르코 폴로를 두둔하는 학자들도 있다. 중국의 역사학자 리정유 교수도 그중 한 명으로 마르코 폴로가 만리장성을 언급하지 않은 데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설명한다.

 

현재 잘 알려진 만리장성, 즉 벽돌과 돌로 쌓아올린 성벽으로 이루어진 만리장성은 몽골제국 멸망 후 명나라 때 지어진 것으로 마르코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 지역에는 한나라 때 쌓은 만리장성이 존재한다. 원래 높이는 10미터 정도였지만 지금은 약 3미터다. 마르코 폴로를 두둔하는 학자들은 당시 이들 장성이 허물어져 방치됐기 때문에 언급할 필요성이 없었거나 너무 흔해 생략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마르코가 본 중앙아시아의 여러 도시와 마찬가지로 유럽의 많은 도시가 벽으로 둘러 싸여 있으므로 큰 호기심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노구교

어쨌든 마르코 폴로의 여정에는 의문점이 많이 있다.

특히 마르코 폴로 다리로 알려진 베이징 근교의 노구교(蘆溝矯)에 대해 그는 홍예문24개 있다고 설명했다.

 

칸발리크 시를 떠나 10마일쯤 가면 풀리산간 강(북경 바로 아래에 있는 훈강(渾江))이 있는데 이 강은 큰 바다로 물이 흘러들어 가며 물건을 가득 실은 배가 많다. 이 강에는 세계에 비할 바 없는 인상적인 돌다리(노구교)도 있다. 그 길이는 300, 넓이가 800보로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10명의 기사가 달려도 불편하지 않다. 교묘하게 세운 25개의 교각 위에는 24개의 대리석 아치가 서 있다. 다리 양편에는 끝에서 끝까지 대리석의 석판과 석주를 교묘하게 배열한 아름다운 난간이 있다.’

 

그런데 루거우차오에는 실제로 11개의 아치밖에 없다. 학자들은 11개의 아치를 24개로 적은 것으로 보아 이 다리도 직접 보지 않았음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정말 쿠빌라이를 만났을까?>

학자들이 신뢰할 수 없다고 지적하는 또 다른 부분은 마르코 폴로쿠빌라이에 대해 기록한 내용이다. 마르코 폴로쿠빌라이를 여러 번 친견했고 유럽 최초쿠빌라이를 묘사했다.

 

대칸 또는 왕중왕이라고 불리는 쿠빌라이의 키는 보통이다. 사지가 고르고 모양이 좋으며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혀 있다. 그의 얼굴은 하얗고 때로 붉은 빛이 돌면 빛나는 장밋빛 같아 용모가 더욱 우아해 보인다. 그의 눈은 검고 아름답다. 코도 알맞게 높다.’

 

마르코 폴로가 정말로 쿠빌라이를 만났다면 그에 대해 여러 가지 사실을 기록했어야 옳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쿠빌라이에 대한 기록은 중세시대 유럽 군주를 설명할 때 쓰는 상투적 문구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중국 사서에는 칭기즈칸의 자손은 대개 벽안(碧眼), 홍발(紅髮)로 적혀 있어 쿠빌라이의 눈이 검다는 말조차 의심스럽다는 견해가 많다. 다시 말해 쿠빌라이를 직접 본 사람의 설명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뿐 아니라 그가 자주 보았을 중국인의 기본적인 풍습을 기록하지 않은 것도 의심을 받는다.

그중에서도 중국에서 무엇보다 유명한 차와 찻집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 중국인은 이미 한왕조 때부터 차를 마셨고 8세기부터 차는 북중국에서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런데 마르코 폴로가 자세히 묘사한 송나라 수도 항저우는 오늘날에도 녹차로 유명한 도시임에도, 중국인이 일상적으로 마신 차에 대한 기록이 없다. 한마디로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무엇을 마셨느냐이다.

젓가락 사용에 대한 설명도 없다는 점도 지적사항이다.

지금도 서양인동양인젓가락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한다. 따라서 13세기의 유럽인이 그것을 신기하게 여기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가 포도나 대추야자, 말 젖, 야자즙 등으로 만든 지방 고유의 온갖 독주자주 언급했으면서도 젓가락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젓가락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두둔하는 학자도 있다.

마르코 폴로가 주로 몽골인이나 페르시아인과 함께 지냈고, 이들과 식사할 때는 자신이 먹던 습관 그대로 먹었기 때문에 젓가락을 몰랐을 수도 있다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마르코 폴로는 자신이 3년간이나 양저우를 통치했다고 했는데 이 당시 중국인들과 함께 식사를 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면서도 중국인의 기본 풍습젓가락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과연 타당한 지 의심스럽다는 뜻이다.

 

중국의 전족

젓가락뿐 아니라 전족도 유럽인에게 상당히 이상하게 보였음직한 중국 고유의 문화.

여성의 발을 고의적으로 작게 만드는 전족유럽인에게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것이 정상적이다. 그럼에도 언급이 없었다는 것은 마르코 폴로중국인의 기본적인 풍습을 알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물론 전족의 경우 마르코 폴로가 몽골족이나 북중국의 거란족, 여진족, 서역의 색목인과 주로 접촉하고 한족과 많은 접촉을 하지 않아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는 강력하게 자신이 중국에서 고관을 지냈다고 강조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중국 풍습에 대한 가장 원천적인 내용조차 거론치 않았다는 것은 나아가 이는 마르코 폴로중국을 여행하지 않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학자들이 마르코 폴로의 중국 방문에 의문을 제시하는 가장 큰 지적은 당시 중국에 널리 보급되어 있던 인쇄 서적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프란세스 우드(Frances Wood)󰡔마르코 폴로는 중국에 갔었는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르코 폴로는 중국을 여행한 것이 아니라 가족 소유의 해외 상관이 있었던 콘스탄티노플에서만 머물면서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르코 폴로가 기록한 도시의 시장에는 인쇄된 값싼 대중용 소형 책자와 그림이 그려진 소설을 파는 작은 책 가판대가 수없이 많았다.’

 

한마디로 󰡔동방견문록󰡕여행기라기보다 정보 카드의 집적으로 내용에 일관성이 없는 이유는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방문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심지어 피에르 바야르 교수도 마르코 폴로가 여행 기간동안 베네치아 외곽의 은신처에 있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