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속인 거짓말/동방견문록

중국 여행 없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9)

Que sais 2020. 12. 1.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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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의 중국 여행을 의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증거는 또 있다.

원나라의 공식 사서에는 외국인에 대한 기록이 매우 많은데, 이상하게도 마르코 폴로에 대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중국의 역사책바티칸의 문서보관실에는 폴로 가족에 관한 기록이 없다. 반면 126011월에 팔랑에서 상두로 간 사절단몽골에 도착해 환영받았다는 사실은 중국 연대기에 적혀 있다.

학자들이 가장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마르코 폴로를 포함한 폴로 가족원나라로 들어가는 여행로다. 󰡔동방견문록󰡕에 따르면 폴로 가족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통과해 카라코람 산맥을 거쳐 원나라 서쪽 관문인 카슈가르에 도착했다.

 

아라라트 산

마르코노아의 방주가 있다는 아라라트 산에 대해 곁가지로 이야기하면서 1년간 앓아누웠고 유명한 카시미르 지방을 통과해 원나라의 영토로 들어갔다고 설명한다. 중국의 심장부에 접근하면서 쿠빌라이가 그들이 도착했다는 것을 알고 호위병을 보내줘 마지막 40여 일간 황제의 빈객으로 여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 마르코 폴로의 얘기.

정말로 쿠빌라이가 호위병을 보내주었다면 원나라의 공식적인 기록에 없을 리 없다는 지적도 있다.

물론 마르코 폴로에 대한 중국 측의 기록이 없는 것쿠빌라이 시대의 기록원나라 멸망 후 많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라고 반박하는 학자도 있지만 󰡔발견자 사전󰡕을 집필한 디트마르 헨체(Dietmar Henze)는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를 전 세계 발견사 사상 최고의 사기극이라고 불렀다.

 

<현장에 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설명>

마르코 폴로의 여행에 대해서는 부정적 견해 못지않게 긍정적 자료도 많다.

우선 학자들은 마르코 폴로가 여행기를 다소 과장했을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을 소설처럼 상상으로만 쓰지는 않았을 거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그의 여행기에는 직접 보거나 현장에서 듣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설명이 포함되어 있다.

배에 탄 사람을 잡아먹을 기회를 엿보며 강 속을 헤엄쳐 다니는 진짜 용으로 볼 수 있는 인도 악어, 몸집이 크고 줄무늬가 있는 사자호랑이, 갑옷을 입은 괴물 코뿔소, 등에 궁수를 태우고 다니는 코끼리 부대, 깃털 길이가 3.5m나 되는 큰바다오리, 나무처럼 타는 검은 돌 석탄 등이다. 북극곰의 존재마르코 폴로최초로 서양에 전했다.

페르가나산 말은 기원전 104년 전한의 장군 리광리가 당시 대원이라 불리던 페르가나에 원정 때 받은 것으로 중국에서는 한혈마(汗血馬)로 불렸다. 하루에 천리를 달리고 피와 같은 땀을 흘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르코 폴로파미르 고원에 사는 야생양 뿔이 1미터를 넘는 긴 것도 있어 가축을 넣어 둔 우리 주변에 고랑을 팔 정도라고 적었다. 그렇게 긴 뿔이 난 양이 있을 수 없다고 당대인들이 마르코 폴로거짓말쟁이라고 했지만 이는 사실이었다.

천산북로의 긴긴타라스 사람들은 석면을 동물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르코는 그것이 동물성이 아니라 샐러맨터라는 광물이라고 적었다. 파미르 고원에서는 불을 피워도 나무가 잘 타지 않고 불꽃 색깔도 다르며 밥이 잘 지어지지 않는다고 적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현대 과학은 그의 관찰이 정확했고 왜 그런가 하는 이유도 알고 있다. 그 이유는 높은 곳에서는 기압이 낮기 때문물의 비등점이 낮아지므로 밥이 잘 지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2012에도 중국에서 마르코 폴로가 정말로 중국에 갔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 근거로 당시 원나라의 지폐의 제조과정과 모양, 사용에 관한 기록이 정확하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중국의 소금의 제조방법주요 산지를 독자적으로 정확히 기술했다는 것을 볼 때 중국에서 직접 이를 보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외에도 마르코 폴로의 행적을 두둔하는 사람이 제시하는 대표적 사례는 자세히 기록된 원나라의 아크마트살해된 사건이다. 페르시아의 회교도사라센인아크마트 또는 아마드쿠빌라이의 12명의 대신 중 한 명으로 황제에게 신임을 받아 각지의 관청과 중앙정부의 관직 인사권 및 죄인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특히 그는 재정적 수완이 뛰어나 원의 재정을 일으킨 공신으로 수상급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런 그의 가장 큰 약점은 여자였다. 그는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는 소문만 들으면 강제적으로 자기 아내로 삼았고, 심지어 기혼녀에게까지도 손을 뻗쳤다. 25이나 되는 그의 아들 역시 아버지를 믿고 전횡을 일삼아 비난이 자자했다.

결국 아크마트에게 아내와 딸을 빼앗긴 치엔후라는 카타이인완후라는 중국인과 함께 그를 살해하기로 작정했다. 결국 치엔후아크마트살해했는데 마침 그들의 동정을 살피던 사령관 코카타이가 반란이 일어난 것으로 알고 완후사살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후 아크마트에 대해 전면적인 조사를 실시한 쿠빌라이그의 악행이 드러나자, 전 재산을 몰수하고 아들들에게 산 채로 피부를 벗기는 형을 언도했다.

󰡔동방견문록󰡕에는 마르코 폴로가 그곳에 있을 때 생긴 일이라고 기록돼 있다.

원나라의 역사서 󰡔원사(元史)󰡕에 보면 아크마트와 관련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아크마트가 죽었다. 황제는 그가 간통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추밀부사 박라에게 심문하게 해 그 죄상을 다 알게 되었다. 비로소 크게 노해 왕저(王著)아크마트를 죽인 것은 실로 충성된 일이니, 그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열고 시체를 통원문 밖에 내다버려 개가 뜯어먹게 하라고 명하였다. 백성들은 모두 쾌재를 불렀다.’

 

여기서 말하는 추밀부사 박라가 바로 마르코 폴로 자신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자체가 의심스러운 것은 어떤 곳에도 마르코범죄조사위원으로 활약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폴 펠리오

프랑스 학자천불동에서 신라 승려 혜초󰡔왕호천축국전󰡕 요약본을 발견한 폴 펠리오(18781945)원나라 때의 문서보관소에서 폴로라는 이름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국인 학자 양치지우(楊志玖)몽골에서 폴로라는 명칭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관직의 명칭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학자들은 마르코 폴로가 설명한 내용 중 일부는 정확한 관찰에 의한 것이 분명하지만, 그 당사자가 마르코 폴로라고 단정하는 데는 신중하다. 마르코 폴로3년 반 동안 지방관으로 있었다는 양저우(양주)는 대도시로 13세기에도 외국인이 많이 있었다.

이탈리아 상인들도 이곳에서 귀중품을 거래했고 프란체스코회 선교사포르데노 출신의 오도리크(Odoric)양저우에서 베네치아인을 몇 명 만났다고 했다. 실제로 제노바인 카테리나 데 비그리오네(Caterina de Viglione)비석도 발견되었다.

마르코 폴로가 정말로 양저우에서 지방관으로 있었다면 그를 만난 유럽인도 있었을 것이며 그에 대한 자료도 발견되어야 한다. 하지만 중국에 살았던 유럽 상인에 대한 자료는 있지만 고위관직에 있었다는 폴로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마르코 폴로의 귀향>

마르코 폴로17년간 동방에서 체류한 후 쿠빌라이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청했으나 그는 귀환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여기서는 일단 마르코 폴로중국을 방문했다는 것을 전제로 설명한다.

마르코 폴로쿠빌라이가 자신들을 매우 총애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사실은 폴로 가족의 후원자인 쿠빌라이가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폴로 가족이 위기감을 느꼈다는 것은 진실로 보인다. 당시에 쿠빌라이는 이미 70가 넘었다. 그가 사망한 후 그의 뒤를 이은 후계자가 쿠빌라이만큼 호의를 베풀어 줄지는 모를 일이었다. 특히 몽골제국에 대한 한족들의 반감이 거세지면서 외국인이 위협을 느낀 것은 당연한 일로 볼 수 있다.

 

마르코 폴로가 탄 중국 선박

그런데 그들에게 예기치 않은 기회가 찾아왔다. 쿠빌라이가 아내를 잃은 페르시아 왕 아르군2쿠빌라이 조카의 아들을 위해 코카친(Kocachin) 공주를 시집보내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행 도중에 일어난 전투로 공주 일행이 목적지인 페르시아로 가지 못하고 되돌아오자, 마침 인디(인도나 동인도로 추정) 지방을 여행하고 돌아온 폴로 일행은 해로로 공주 일행을 페르시아까지 안내하는 임무를 자신들이 맡겠다고 제안했다.

쿠빌라이는 이를 허락했고 선체 길이가 30미터에 이르고 네 개의 돛대가 세워진 14척의 선박과 항해를 도울 손바닥만 한 금패 2를 주었다. 천주(泉州) 을 떠난 그들은 2년 반의 여정 끝에 페르시아의 호르무즈에 도착했다. 마르코폴로는 당초 600여 명이 출발했지만 18명만 남았는데 폴로 가족은 모두 무사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아르군2는 이미 사망한 후였지만 다행히 그에게 성장한 아들 가잔(Ghazan)이 있어 코카친 공주를 맞아들였다. 페르시아에서 융숭한 대접과 함께 금패 4를 더 받은 폴로 가족은 기마병의 호위를 받으며 터키를 가로질러 북쪽으로 달렸다.

몽골 제국을 벗어나 흑해 연안에 있는 소왕국 트레비존드(Trabizond, 트라브존)에 진입할 때까지는 만사가 순조로웠다. 하지만 그곳부터는 몽골로부터 받은 금패 통행증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폴로 일행비잔틴 제국의 화폐 4,000히페르페론에 상당하는 재물을 바쳐야 했는데, 그것은 500킬로그램 정도의 생사(生絲)를 살 수 있는 엄청난 액수이다.

마르코 폴로󰡔동방견문록󰡕에 이 내용을 적지 않았지만 마페오가 유언장에 적어 놓은 집안의 빚 내역에 포함되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마이크 에드워즈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를 쓴 루스티켈로가 폴로 일행이 강탈당한 사건을 하찮은 것으로 여겨 생략했을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어쨌든 폴로 일행은 잘 알려지지 않은 호르무즈에서 9개월간 체류했는데 그 사이에 쿠빌라이가 사망했다. 원나라로 돌아가야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열일곱 살에 그곳을 떠난 마르코는 벌써 마흔한 살이 되었다.

폴로 일행의 베네치아 도착은 그야말로 전설적이다. 베네치아의 저술가 라무시오에 따르면 마르코의 친척들은 24년간 고향을 떠나 있던 폴로 일행이 모두 사망했다고 여겼으며, 1295 그들이 돌아왔을 때 알아보지 못했다. 심지어 자기 집 하인들까지도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가로막았다.

 

마르코 폴로의 귀환

그들은 누더기 차림이었고 말투와 태도에는 어딘지 모르게 타타르족의 분위기가 풍겼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협잡꾼이 아니라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 친척들을 모아놓고 입고 있던 누더기를 칼로 뜯어냈다. 그러자 어마어마한 양의 루비와 다이아몬드, 에메랄드가 쏟아져 나왔다. 바로 그것이 폴로 일행의 주장을 입증해 주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사람들은 중국의 황제가 아니라면 어느 누가 그런 보물을 줄 수 있겠느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라무시오는 모든 베네치아인이 그들을 환영하기 위해 집으로 몰려들었다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