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사형>
사형집행 방법도 다양해서 화형․질식사․수장․독살․책형․차형․박살형 등 잔인하게 시행되었고 대부분 공개처형이었다.
화형의 기원은 불에 대한 경외심에서 태어났다. 불은 모든 것을 태워 없애고 정화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화형의 대상은 주로 마녀, 이단자, 변태적인 성행위자였다. 고대 바빌로니아, 이집트, 이스라엘 등지에서는 신성모독과 우상숭배의 경우 화형에 처했으며 고대 인도와 일본 등에서도 화형이 존재했다. 차형은 수레바퀴로 죄인을 죽이는 방법으로 죄인을 벌거벗긴 후 땅에 박은 말뚝에 손과 발을 묶고 수레바퀴를 내리쳐서 죄인의 사지의 뼈를 부러뜨린 후 죽이는 것으로 가장 잔인하고 고통이 심한 형벌이었다. 죽인 다음에도 수레바퀴 위에 사체를 올려놓아 풍화가 될 때까지 방치했다.
우리나라 욕설에 ‘육시할 인간’이라는 말은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을 말한다. 보통 죄인의 팔다리를 묶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끌어당겨 사지를 찢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사전에 죄인의 관절을 단절해 놓았다고 한다.
이런 잔인한 형벌은 주로 남성에게 해당되었으며 여성은 아무리 심한 죄를 지어도 이런 형벌을 받지 않았다. 이는 여성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여성의 피는 보다 특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여성은 주로 생매장으로 처형했다.
참수형은 칼이나 도끼로 사람의 목을 베는 사형방법인데 초기에는 주술적 의미를 갖고 시행했다. 즉 사람의 목을 베어 긴 막대기에 꽂아 전시를 하는 것으로 고대의 신에게 짐승을 바치는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유럽의 중세시대에 참수형이 공개적으로 많이 집행되었는데 매우 끔찍한 기록들이 남아있다, 19세기까지도 유럽에서는 참수된 사형수의 피를 마셨다. 사형수의 피는 질병에 좋다고 하여 사형 현장에서 돈을 주고 팔았다고 한다.
중국을 포함한 동양에도 사형은 매우 잔인했다. 사형방법에 따른 분류에 의하면 허리를 베어 죽이는 요참․엽시․효수․기둥에 묶은 후 창으로 찔러 죽이는 책형․참수․교수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대명률』의 규정에 의하여 일반적으로 교형(絞刑)과 참형(斬刑)의 2종으로 정하였다. 교형은 신체를 온전한 상태로 두고 목을 졸라 죽이는 것이며, 참형은 보통 신체에서 머리를 잘라 죽이는 것이다. 그렇지만 죄질에 따라 사형의 방법을 달리하여 능지처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형을 집행한 다음 위협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죄수의 머리나 시체를 매달아 민중에게 전시하는 것을 효수 기수라고 하였다.
사형에는 대시집행과 불대시집행이 있는데, 대시집행이라함은 사형이 확정된 후에도 일정기간 대기하였다가 추분 이후부터 입춘 이전에 날짜를 정하여 사형을 집행하는 것으로 일반사형수에게 적용하였다. 이에 반하여 불대시집행은 사형이 확정되면 때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즉시 사형을 집행하는 것으로 보통 10악의 범죄에 적용되었다. 10악이란 모반, 모대역, 부도, 대불경, 불효, 불목, 불의, 내란 등이 포함된다.
사형은 삼복제에 의하여 3차례의 재판을 거쳐 신중을 기하도록 하였고, 사형의 확정은 반드시 임금의 재결을 받아야했다. 그리고 특별히 사형을 집행하지 못하는 금형일을 법으로 제정하였는데, 이는 천지의 이법을 중시하는 음양의 사상에 의한 것으로 시절과 형옥에 관한 정령을 부합시키려는 것이었다.
능지처사의 경우에는 대역사건의 국사범이나, 특히 일반인에게 경계할 필요가 있는 반도덕적 범죄인에게 행하여졌기 때문에 민중에 대한 위협의 목적으로 오살(五殺), 육시(戮屍), 거열(車裂) 등 여러가지 잔인한 방법으로 집행되었다.
오살과 육시는 죄인의 머리를 벤 다음 팔, 다리, 몸둥이를 자르는 극형으로서 사람들은 형명만 들어도 몸서리를 칠 만큼 끔찍한 형벌이어서 오늘날까지도 저주를 뜻하는 말로서 전해오고 있다. 거열은 죄인의 팔과 다리를 4방향으로 우마에 묶어 동시에 우마를 몰음으로써 죽게 하는 형벌이다.
그 외에도 사사(賜死), 부관참시가 있었다. 사사는 왕명으로 독약을 마시게 하여 죽게 하는 것으로 왕족이나 현직자로서 역모에 관련되었을 때 주로 행하여졌다. 부관참시는 이미 죽은 자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꺼내 참형 또는 능지처사를 행하는 것이다. 연산군 시대 무오사화, 갑자사화에 연루된 자 등에 대하여 부관참시형이 시행되었다.
사형을 집행한 다음 죄수의 머리를 매달아 일반 민중에게 보이거나 시체를 길거리에 내버려 사람들로 하여금 참혹한 죽음을 볼 수 있도록 하여 일반예방의 효과를 거두고자 하기도 했는데, 이를 효수(梟首) 혹은 기시(棄市)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거의 그 자취를 감추었으나 국사에 관련된 특별한 사건 즉, 역모 등이 발생하였을 때 시행되었다. 조선말기에는 갑신정변에 실패한 개화파 요인들이 사형 후 효수되었다.
〈길로틴 박사는 인간적인 단두대를 제안〉
유럽에서 참수형이 보편적이었으나 문제는 수많은 상류층조차 참수형으로 고통없이 사형시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사형 집행인들조차 사형수들을 처형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유명한 예가 1587년 2월 8일, 영국의 메리 스튜어트를 처형할 때인데 그 때 집행인은 세 번이나 도끼를 내려쳐 간신히 여왕의 머리를 잘라낼 수 있었다. 도끼나 칼로 목을 내려치면 뼈를 잘라낼 수는 있으나 근육이나 힘줄 때문에 한 번에 완벽하게 절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단두대가 등장하게 된 것은 프랑스 혁명의 특성 때문이다.
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의 반대자들을 신속하게 처단해야 하는데 사형 언도를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소위 귀족계급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을 다소 고상하게 즉 고통이 없이 처형하는 방안을 개발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프랑스 파리대학 의학부의 해부학 교수인 조셉 길로틴(Guillotin) 박사가 주창한 사형기계 길로틴이 등장하게 된 이유다.
그는 1789년 국민공회의 대의원이 되자 10월 10일 국민회의에서 당대에 주로 채용되는 참수형 등은 사형될 사람들에게 너무나 심한 고통을 가하므로 이를 개선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은 법안을 발의했다.
‘죄인의 사회적 신분이나 위치에 관련 없이 같은 종류의 위법 행위는 같은 종류의 형벌로 처벌해야 한다.’
즉 사형은 신분의 구별 없이 모두 평등하고 더욱 인간적인 방식으로 집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유전무죄, 무전유죄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사형에 관해서는 인간적으로 고통없이 죽이자는 내용이라는 뜻인데 그가 해부학 교수였기 때문에 인체를 어떻게 잘라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국민공회의 대의원들은 길로틴 박사의 의견에 따라 파리의 외과의사로 정형외과아카데미의 사무총장인 앙트완느 루이(Antoine Louis)에게 신속하고 작동이 편리한 처형 장치를 개발해 달라고 의뢰했다. 루이는 당시 69세로 많은 외과 기구를 제작하여 명성을 갖고 있었는데 피아노의 전신인 하프시코드 제작 기사인 토비아스 슈미트와 공동으로 단두대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모형을 완성하는 것은 3년이나 지나서인 1792년이었다.
앙트완느 루이는 옛날의 전투용 도끼가 날카로운 점에서는 좋기는 하지만 사형 집행 당시에 사형수의 목을 칠 때 순식간에 절단될지의 여부는 사형 집행인의 솜씨에 의존하기 때문에 반드시 바람직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단두대는 ‘실패가 허용되지 않아야 하며 강도와 효과가 정밀하게 계산되어야하고 기계적인 힘에 맡겨 주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단두대에 의해서만 참수는 새로운 법의 정신에 따라 한 순간에 시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사형수를 처형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문제가 되었는가는 당시의 ‘무슈 드 파리’ 즉 사형집행인 앙리 상송이 1792년에 쓴 글로서도 알 수 있다. 그는 법무부 장관에게 상신하여 사형수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 놓고 처형을 확실하게 하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처형 도구로서의 칼의 약점을 역설했다.
‘집행에 한 번 사용한 칼은 두 번 다시 사용할 수 없다. 많은 사람을 처형하는 경우에 그때마다 날이 망가진 칼을 다시 날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게 되는데 이것은 대단히 귀찮고 난감한 일이다. 사형집행리들의 노동 강도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사형당하는 죄수들을 고정해서 처형할 수 있는 기계가 필요하다.’
사형 기계를 의뢰 받은 루이는 과거부터 단두대가 동물을 죽이는데 사용되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길로틴과 유사한 단두대는 13세기 이탈리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16세기의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사용된 메이든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단두대도 칼날이 위에서 떨어진다. 메이든은 1581년 통치를 안정시키는데 기여하여 그 견본이 아직도 에딘버러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하튼 루이는 이미 영국과 독일에서 양을 도살하는데 사용되던 기계를 참고하여 단두대를 제작했다. 그는 먼저 살아 있는 양과 죽은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했다. 그러나 양의 목은 쉽게 떨어졌으나 사람의 시체는 문제가 있었다. 실험 결과 칼로 목뼈는 절단되었으나 목의 힘줄과 근육은 한 번에 잘라지지 않은 것이다.
루이는 실험을 거듭하여 두 개의 기둥을 똑바로 세우고 그 위에 들보를 가로질러 얹은 뒤 비스듬하게 경사지고 상당히 무거운 칼이 예정된 방향에 따라 아래로 떨어지도록 홈을 파 놓은 시제품을 제작했다. 새로운 기계는 만족할 만 했다.
몸을 고정시킨 다음, 낙하하는 칼날의 운동에너지를 이용해 목을 자르기 때문에, 별다른 기술과 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필요한 에너지는 칼날을 끌어올리기 위한 힘과 처형인을 틀에 고정시키는 정도의 수고로 끝나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단두대의 등장을 반대한 사람들이 예상보다 많이 있었다고 알려진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박탈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 유럽을 비롯한 대다수 국가에서 사형집행은 참수든 교수든 마을 사람들에게 오랜 오락들 중 하나였다. 서부극에서 교수형이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어진 이유다. 한 마디로 당대 사람들에게는 마치 현대에 연극이나 영화, 혹은 프로 스포츠를 중단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단두대에 사용되는 날은 그 무게가 수십kg에 달하며 100kg가 넘는 것도 존재한다. 날을 이렇게 무겁게 하는 이유는 중력의 힘을 빌어서 날이 낙하하기 때문으로 날이 너무 가벼우면 사형수의 경추뼈가 잘 잘리지 않는다고 한다.
단두대는 크게 두 종류로 하나는 목만 집어넣는 단두대가 있고 다른 하나는 목과 손을 같이 넣는 단두대가 있다. 목만 자르는 단두대는 받침대에 구멍이 하나만 있고 손도 같이 집어넣는 단두대는 받침대에 구멍이 3개 있다. 후자로 참수당하면 목만 아니라 손도 같이 잘리는데 대부분 목만 자른다.
여하튼 단두대가 발명되자 단두대 역시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됐다.
첫 번째 인간 희생자로 노상강도인 니콜라스 자쿠스 펠레티에르가 선정되었다. 1792년 4월 25일 3,000명이 넘는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사형수는 공개 처형되었다. 펠레티에르의 사형에 대해 프랑스 일간지 <라 크로니트 드 파리>는 사설에서 이 새 기계가 ‘그 살인범을 처형하는 데 누구의 손에도 피를 묻히지 않았으며, 내려치는 칼의 속도가 종종 가혹하기는 해도 잔인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법의 정신과 완전히 일치했다.’고 논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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