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악당>
사상 최고의 제작비를 들였다고 알려진 「스파이더맨(3)」에 등장하는 세 악당에 대해 살펴본다. 세 명의 악당들이 초능력을 갖게 되는 것은 각자 다르다. 스파이더맨을 아버지의 원수로 오해하면서 아버지가 개발한 하늘을 나는 호버보드를 보다 개량하여 ‘뉴고블린’이 된 악당은 파커의 친구 해리이다. 그는 파커가 사랑하는 엠제이를 이간질하여 이성을 잃게 한다. 샌드맨은 파커의 삼촌을 죽인 진짜 범인이지만 딸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탈옥한 후 범죄를 저지르다가 수수께끼의 실험에서 방사능에 노출되어 모래를 마음대로 부리는 능력을 갖게 된다. 피터가 프리랜서 사진기자로 일하는 <데일리뷰글> 신문사의 브록은 피터 때문에 연인과 직장을 잃게 되자 불타는 증오심에 피터가 벗어던진 심비오트에 사로잡혀 최강 악당 베놈으로 진화한다.
스파이더맨의 친구인 해리가 변하는 뉴고블린은 호버보드를 타고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라 다니는데 아이디어 자체는 나무랄 바 아니지만 「스파이더맨(3)」에서 오류 중 오류다. 중력이 있는 지구에서 날아다닐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생명체는 조류를 비롯한 일부 생명체에 불과하다. 아무런 분사장치 없이 사람이 중력을 이기고 공중에 떠 있을 수 없다. 주인공들이 반중력을 이용한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직까지 반중력이 존재한다는 증거도 없고 설사 반중력이 존재하더라도 그 크기가 중력보다도 택도 없이 작다고 알려지므로 호보버드를 타고 하늘을 날라다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않을 수 없다.
현재 뉴고블린이 타고 다니는 호버보드와 가장 유사한 장비는 ‘제트팩’이다. 1920년 공상과학소설 『하늘의 종달새 Skylark of Space』에 등장한 제트팩은 1965년 「007 썬더볼 작전」에서 제임스 본드가 사용하기도 했으며 1984년 미국 L.A. 올림픽 개막식에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시연돼 눈길을 끌었다. 제트팩은 과산화수소를 90퍼센트 이상 고농축하여 태울 때 발생하는 연소가스를 엔진의 노즐 밖으로 방출함으로써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추진력을 얻어 앞으로 날아가는데 속도가 느리며 엔진 소음이 시끄러운데다가 연소불량 등 기계고장을 일으키면 곧바로 ‘추락’ 즉 사망을 의미하므로 ‘꿈의 비행장치’가 아니라 ‘무늬만 배낭인 무거운 글라이더’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다. 그러나 이런 안정성, 효율성 등을 극복하면 하늘을 나는 이동기구로 각광을 받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 아니다.
최강의 악당으로 설명되는 베놈은 외계생명체인 에일리언의 일종으로, 처음에는 스파이더맨을 숙주로 이용해 곤경에 빠트린다. 스파이더맨은 블랙스파이더맨이 되어 자제력을 잃고 내면의 파괴와 폭력성에 눈을 떠 자기 자신과의 싸움까지 치러내야 하는 이중성격자가 된다.
여기에서 핵심으로 등장하는 외계생명체 심비오트(Symbiote)는 기존 에일리언과는 성격이 매우 다르게 숙주를 죽이거나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숙주의 성격에 따라 성향이 달라지도록 유도한다. 그러므로 파커를 이중성격자로 만드는 데는 성공하지만 파커가 정의의 편에 서면서 심비오트를 벗어버리자 그로부터 버림받은 검은 외계생명체는 다른 사람인 에디 브록을 숙주로 삼아 베놈이 탄생한다. 숙주에 따라 성격이 변한다는 것은 심비오트가 인간의 의지를 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베놈이 사상 최강의 악당으로 진화했다는 것에 의심이 들게 하지만 외계생명체라는 아이디어를 차용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다. 외계생명체를 지구인과 같은 잣대로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외계물질’이라는 말을 붙이고 나면 그 다음은 작가 맘이지만, 현재 지구상에서 숙주를 맘대로 조정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기생생물 ‘연가시(네마토모프)’는 물속에서 알을 낳아 부화된 후 육지로 이동하여 주변의 풀에 달라붙어 메뚜기, 여치 같은 초식 곤충이 풀을 먹거나 사마귀가 이들 곤충을 잡아 먹는 과정에서 연가시의 유충이 숙주의 체내로 유입되어 성장하게 된다. 문제는 연가시가 수중생물이므로 알을 낳기 위해 물로 돌아가야 하는데 숙주인 메뚜기나 사마귀 같은 곤충은 스스로 물속으로 다가가지 않는다. 이때 연가시는 숙주의 체내에서 특별한 신경전달물질(단백질류)을 배출하여 숙주의 중추신경계에 반응하여 숙주들이 스스로 물속으로 뛰어들게 만든다.
그러나 기생충은 일반적으로 숙주로부터 영양분을 섭취하여 생명을 유지하지만 숙주의 뇌와 같이 중요한 장기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숙주가 뇌에 이상을 일으키면 더 이상 먹이를 찾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심비오트가 사람을 숙주로 이용하여 조종은 하지만 그를 죽이게 하지 않는 이유로 보인다.
「스파이더맨(3)」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샌드맨의 등장이다. 샌드맨의 변신 과정으로 얼굴에서부터 온몸이 차츰차츰 모래로 변하는 것은 물론 자유자재로 사람이 되었다 모래바람이 되었다 하면서 스파이더맨을 곤경에 빠뜨린다.
스파이더맨을 괴롭히는 샌드맨은 시리즈 1편인 「스파이더맨」편에서 파커의 삼촌을 죽인 범인이다. 수수께끼 실험에서 방사능에 노출돼 모래를 마음대로 부리는 능력을 갖게 된다. 샌드맨의 특별한 능력은 사실 과학적으로 그릇되지만 샌드맨이 현대문명의 총화라 볼 수 있는 컴퓨터를 연상시키면 조그마한 빌미는 있다. 컴퓨터는 반도체칩으로 대표되는데 반도체칩의 원료는 실리콘 즉 모래나 차돌로 샌드맨은 결국 반도체를 의미할 수도 있다. 샌드맨이 스파이더맨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내보이며 사라지는 것도 현대 문명은 결국 모래를 버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지 모른다.
샌드맨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약간 이르다. 지구에 있는 생물은 지구 표면에 있는 수많은 원소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성원소를 살펴보면 탄소·수소·질소·유황·인 등의 비금속 원소와, 철·칼슘·마그네슘 등의 금속 원소가 있으나 그 중 탄소가 가장 중요한 원소이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규소 원자로도 생물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므로(탄소와 같은 족) 어떤 외계인들은 탄소 대신 규소로 만들어졌을지도 모르므로 샌드맨이 우주 어느 곳에는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거미 능력 차용하기>
「스파이더맨」은 언뜻 보기엔 황당무계한 공상영화로 보이지만 적어도 그 발상만큼은 현대 과학기술계의 중요한 흐름 중 하나를 정확히 꿰뚫고 있다. 그 흐름이란 바로 ‘바이오미메틱스(Biomimetics)’, 즉 ‘생체모방과학’이다. 생체모방과학은 인간을 제외한 여타 생물들의 특수 기능을 인간 생활에 응용하려는 분야로서, 가장 대표적인 예가 새를 모방한 비행기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창공을 날라 다니는 비행기 자체는 새를 그대로 복사한 것은 아니지만 단순히 날개가 달렸다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유선형의 몸체에 속이 텅 빈 구조라는 것까지 새를 닮았다. 새의 몸은 속이 빈 가느다란 뼈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런 구조는 부피에 비해서 무게가 가볍기 때문에 그만큼 비행에 필요한 에너지가 적게 들기 마련이다.
거미줄은 아미노산들이 일렬로 길게 연결되어 복잡하게 엉킨 구조의 단백질로 분자구조가 가장 간단한 두 종류의 아미노산인 글리신과 알라닌이 주성분이며 매우 규칙적인 배열구조를 갖고 있다. 거미줄을 만들어 내는 샘에는 분자량 30,000 정도의 물질들이 반응을 통해 분자량 200,000〜300,000의 고분자 물질이 되어 거미줄 형태로 뽑아져 나오는 거미줄의 주성분은 피브로인이라는 단백질이다.
거미줄은 유리섬유보다도 가볍고 강도는 강철의 5배나 되어 헬멧이나 방탄조끼 동의 재료로 쓰이는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강한 섬유로 이름 붙은 ‘케블라’보다 성능이 훨씬 월등하다. 케블라의 탄성력, 즉 늘었다 줄었다 하는 복원력은 16%정도지만 거미줄은 무려 31%나 된다. 따라서 이렇게 우수한 재질을 지닌 거미줄이라면 당연히 스파이더맨이 영화에서처럼 100층 정도의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자유자재로 날아다녀도 끄떡없이 버틸 수 있다는데 학자들은 공감한다.
학자들은 거미의 특성을 분석하여 실생활에 접목시키는 일을 부단히 연구하고 있다. 그러나 거미의 특성이라 볼 수 있는 천장에 달라붙는 것은 일단 불가능의 영역이다. 왜냐하면 개미나 몸무게가 매우 가볍기 때문에 발에 난 털과 천장 면 사이의 마찰력(또는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거미의 무수한 털과 천장면 사이에 ‘반데르발스 힘’이라는 아주 약한 인력이 작용한다고도 함)으로도 충분히 지탱이 되지만 아직 인간의 무게를 이길만한 강한 ‘반데르발스 힘’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인공적으로 천연 거미줄과 같은 성능의 거미줄을 대량 생산할 수 있다면 효용도는 무궁무진하다. 우선 인공 거미줄이 천연 재료와 같다면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면서도 아무런 오염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런 환경친화성은 의료 분야에서도 반가운 소식이 된다. 인공 힘줄이나 인대, 장기들의 재료로 쓸 수도 있고, 수술 뒤에 저절로 녹아버리는 봉합사를 만들 수도 있다. 거미줄이 기본적으로 천연유기물 성질을 갖고 있다면 생체에 별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군사적으로는 가볍고 튼튼한 방탄복이나 낙하산을 만들기에도 그만이다.
거미줄을 인공적으로 생산하려는 시도는 이전부터 끊임없이 이어져오고 있다. 누에에게 거미줄의 생산 기관을 이식시켜 ‘바이오스틸(Biosteel)’, 즉 ‘생물강철’이라는 것을 만드는 시도도 진행 중이며 또 거미의 유전자를 암소의 세포에 주입하여 거미줄을 생산하는 실험도 성공한 바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결과에서 얻은 거미줄은 아직 자연적인 것보다는 재질이 뒤떨어지므로 아직 본격적인 상용화에는 성공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앞으로 이들 분야는 주목받는 과학계의 화두임이 분명하다.
참고적으로 2008년 9월부터 우리나라에도 도입되는 범죄자들에게 사용하는 전자발찌의 아이디어는 「스파이더맨」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983년 미국 뉴멕시코주의 잭 랄프 판사는 스파이더맨 만화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악당이 스파이더맨을 추적하기 위해 그의 팔에 몰래 송신기를 붙여놓는 장면을 보는 순간 랄프 판사는 좋은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렸다.
그런 아이디어를 차용하면 창살 없는 교도소처럼 범죄자를 어디서나 감시해 포화상태의 교도소 시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는 즉시 담뱃갑 크기의 전자팔찌를 가석방자 팔목에 붙이는 시범 운영을 단행했다. 그 다음해 미국 플로리다주는 맨 처음으로 범죄자 144명에 대해 송신기를 달아 대규모 전자감시를 실시했다. 세계 최소형으로 개발된 전자발찌가 혼돈에 빠진 세상을 구하는 스파이더맨처럼 날로 늘어나는 성폭력 범죄로부터 우리 사회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
「스파이더맨의 이상과 실제」, 사이언스타임스, 2004.8.4
「스파이더맨과 전자발찌」, 이성규, 사이언스타임스, 2008.8.29
「[임원철의 맛있는과학] 영화 속 명장면, 실현 가능할까?(1) 미션 임파서블4의 특수 장갑」, 임원철, 부산일보, 2012.01.13.
「스파이더맨 비밀 무기는 '입'? 엑스맨 탄생의 비밀은?」, 최원택, 프레시안, 2012.05.11.
http://blog.naver.com/gsh42?Redirect=Log&logNo=140025034343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1&contents_id=11262
『영화속의 바이오테크놀로지』, 박태현, 생각의나무,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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