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악당/리빙스턴과 스탠리

리빙스턴과 헨리 스탠리(6)

Que sais 2020. 12. 15.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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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사과>

2020630, 다소 놀라운 편지 한 통이 벨기에 필리프 국왕으로부터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 펠릭스 치세케디 대통령에게 전해졌다.

 

과거의 상처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하고 싶다. 그 고통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차별로 되살아나고 있다.’

 

이날은 민주콩고벨기에로부터 독립한 지 꼭 60년째 되는 날, 1885년부터 1960년까지 민주콩고식민 지배한 것에 대해 사과한 것이다.

민주콩고 독립 뒤 침묵의 전통을 지키던 벨기에 왕실60년 만에 식민 역사에 대한 사과에 나선 이유는 간단하다. 그동안 침략국 벨기에선택적 기억의도적 망각으로 역사를 조작했고, 이에 맞서 진실을 알리는 여러 폭로와 자성들이 100년 가까이 진행됐는데 이에 답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답신은 그야말로 생각지 않은 곳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이다.

벨기에에서 불붙은 식민역사 청산 움직임20205미국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에서 백인 경찰의 가혹행위로 비무장 흑인인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으로 비롯된 인종차별 반대 운동이 계기가 됐다. 미국에서 시작된 인종차별 철폐 운동이 대서양 넘어 유럽으로 건너간 후 벨기에에서 식민 역사를 반성하자는 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벨기에 시민 수만 명이 거리로 나와 1800년대 후반 아프리카 중부를 식민지로 개척해 가혹하게 통치했던 벨기에 왕국의 두 번째 왕인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을 없애고, 그의 이름을 딴 거리 이름도 없애자고 주장했다. 또한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어두운 식민역사교육을 제대로 할 것도 요구했다.

 

레오폴드2세의 악행을 그린삽화

콩고 출신 부모와 함께 벨기에 브뤼셀에 사는 14살 소년 노아도 이 운동의 영향을 받아 국제 온라인 청원 누리집 <체인지>레오폴드 2세의 동상을 제거하자는 글을 올렸다. 그는 레오폴드 2가 벨기에의 건축왕으로 추앙받는 현실을 문제 삼으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는 대량학살의 왕이었으며, 누군가에게는 영웅으로 포장되지만 누군가에게는 학살자였다. 이것은 내 선조들의 이야기이며, 그들은 수없이 죽었다. 레오폴드 2세 동상브뤼셀에 있는 것은 히틀러 동상이 베를린에 있는 것과 같다.’

 

이들 결과는 스탠리와 레오폴드 2의 합작품이나 마찬가지인데 이런 행동이 아프리카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유럽국가인 벨기에에서도 벌어졌다는 점이다.

벨기에1908년부터 1960년 백인 남성과 식민지 흑인 여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 수만 명을 강제로 가족에게 떼어내 보육원 등 시설에 수용했다. 벨기에 정부에서 혼혈 아동이 식민통치 원칙 중 하나인 인종분리 차별 정책을 약화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이 살인과 다름없는 만행이라고 지적한 악행이 아닐 수 없다.

 

<식민정치의 혜택>

놀라운 것은 벨기에아프리카 식민지에 취한 행동에 대한 반응은 조선을 합병한 일본이 현재도 한국에 대해 주장하는 내용과 다름없다는 점이다. 일본이 조선을 병합했기 때문에 미개한 조선이 현대 문명을 접했고 이를 통해 현재의 한국이 태어날 수 있다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벨기에는 자신들의 식민통치로 아프리카 경제 발전을 이뤘다고 주장했다.

벨기에19세기 후반부터 100년 가까이 아프리카 중부에서 어느 제국주의 국가보다 잔혹하게 식민 통치를 했지만 이를 통해 아프리카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을 줬다는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특히 75년을 지배한 콩코 지역에서 잔혹한 통치로 거의 1,000만 명에 달하는 콩고인의 목숨을 잔인하게 빼앗았음에도 이런 상황은 도외시하고 자신들의 노력 덕분에 아프리카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을 줬다는 식이다.

벨기에의 인종차별 문제 등을 조사한 <아프리카계에 대한 유엔 전문가 워킹그룹>은 매우 놀라운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벨기에 고교 졸업생 중 4분의 1이 콩고가 벨기에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중등 교과 과정식민 통치 역사를 제대로 기술하지 않고 교과 과정도 식민 지배의 결과로 아프리카에 경제 발전이 이뤄졌다는 식민지 시대 선전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레오폴드 2는 콩고를 식민 통치해 번 돈으로 브뤼셀에 공원과 궁전 등 여러 건축물을 세웠는데, 벨기에 인들은 그를 건축왕이라 부르며 동상을 곳곳에 세웠으며 수많은 거리에 그의 이름이 들어있다. 특히 놀라운 것은 많은 벨기에 인들이 현재도 레오폴드 2'벨기에를 부강하게 만든 국왕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상상치 못하는 악행은 벨기에를 위한 불가결한 조처였다는 것이다.

더욱 해괴한 설명은 18907브뤼셀 국제회의에서 노예무역에 반대하는 조약이 체결된 배경이다. 이에 의하면 레오폴드 2가 아프리카 노예제 반대하여 협정이 체결되었다는 것으로 한마디로 그가 노예제를 반대하는 데 앞장섰다는 설명이다.

놀라운 것은 그는 벨기에에서 노예 반대 운동가를 자처하면서 흑인 지원 자선 단체를 지원했다. 수탈을 위장하기 위해서로 절묘한 조처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레오폴드 2세와 스탠리에 의한 만행이 계속 폭로되, 영국은 콩고에 로즈 캐즈먼드를 파견한다. 로즈 캐즈먼드는 현장 방문을 통해 레오폴드2세의 학살극 즉 만행이 적나라하게 공식적으로 발표된다.

특히 작가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 18591930)1909년에 발표한 콩고의 범죄에서 레오폴드2가 식민지 콩고에 역사상 최대의 범죄를 저질렀다고 고발하고 있다.

 

레오폴드왕의 유령

한편 우리나라에서도 1998년에 애덤 호크실드(Adam Hochschild)의 책 레오폴드왕의 유령이 출판되면서 벨기에의 식민 지배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일으켰다. 그는 레오폴드 2가 아프리카 중부에서 저지른 잔혹 행위를 적나라하게 폭로하여 식민 지배에 대한 벨기에 사회의 내부 여론을 환기시켰다. 그는 레오폴드 2가 콩고 지역에서 가혹한 노예교역을 통한 무자비한 수탈과 살육으로 당시 인구의 약 절반인 천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고발했다. 그리고 그의 책 제목은 바첼 린지(Vachel Lindsay)콩고(The Congo)의 시에서 따왔다.

그러므로 레오폴드 2는 결국 1908년 그의 모든 사유지를 벨기에 정부에 반납하고 다음해인 1909년에 사망한다. 레오폴드 2세의 장례식, 벨기에 국민들도 콩고에서의 만행에 분노하며 자신들의 국왕 관에 대고, 침을 뱉으며 엄청난 비난을 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기에에서의 레오폴드 2에 대한 터무니없는 찬양은 계속되었다.

필리프 국왕 동생로랑 왕자레오폴드 2가 콩고에 가본 적도 없기 때문에 잔학 행위에 책임이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브뤼셀 자유 대학의 전 총장 에르베 아스캥 박사는 벨기에가 콩고에서 전파한 보건 제도와 사회기반 시설, 초등 교육 등을 열거하며 식민지화가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콩고의 지옥

물론 벨기에 정부는 2002콩고에 사과한다. ()소련 성향을 보였던 독립 영웅이자 초대 총리 파트리스 루뭄바피살을 묵인한 데 대한 사죄였다. 그러나 레오폴드 2가 저지른 대학살에 대한 입장은 밝히지 않았다. 이에 대한 변명은 잘 알려져 있다.

 

정부가 개입하지 않은, 사유지에서 개인이 저지른 학살은 벨기에와 무관하다. 책임지거나 사과할 필요 없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현재도 벨기에의 식민 지배를 받은 민주콩고와 르완다, 브룬디아프리카의 핵심 분쟁지역으로 내전을 치르거나 잦은 쿠데타 등 정치 불안이 계속되는 지역이다.

그런데 이들 지역에서 이와 같은 상황이 계속되는 것은 콩고 지역천연자원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매장량을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24조 달러에 달한다는 보고도 있다.

현대의 분쟁의 씨앗은 역시 벨기에에 의해 뿌려진 것이다. 벨기에는 식민화 전 인위적인 국경을 그어 종족 간 갈등을 만들었고, 식민 지배 때는 철저한 종족 차별정책으로 갈등을 심화시켰다. 르완다에서는 1994100만 명에 가까운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났고, 민주콩고2차례 내전을 겪었다.

여하튼 치세케디 민주콩고 대통령은 벨기에 필리프 국왕의 편지에 대해 민주콩고 역사상 벨기에로부터 받은 가장 훌륭한 서한이었다고 말했다. 물론 필리프 국왕이 레오폴드 2세 국왕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은 채 이 기간에 우리의 집단 기억을 억누르는 폭력적이고 잔혹한 행위가 벌어졌다며 우회적으로 말한 것이다. 더불어 그는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에 맞서 싸울 것이며 벨기에 의회가 시작한 이 문제에 대한 반성을 장려해 그런 기억들이 잠재워질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말했다.

물론 아직 벨기에 국가 차원의 공식 사과가 아니며, 국내외 여론에 떠밀려 유감을 표시하는 정도의 제한된 사과라는 한계가 있지만 스탠리와 레오폴드 2에 의해 자행된 악행에 다시금 경각심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