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악당/리빙스턴과 스탠리

리빙스턴과 헨리 스탠리(7)

Que sais 2020. 12. 15. 16:25

youtu.be/pWwRdMQBlI0

자로 재서 분할한 아프리카

콩고에서 벨기에엄청난 부를 축적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 열강은 앞을 다투어 탐험가를 후원하여 아프리카의 미개척지 진출을 서둘렀다. 아프리카는 불과 15년 만에 서구 열강의 식민지 혹은 보호령이 되었다. 프랑스사하라 사막을 중심으로 아프리카 서부, 북부, 중부 일대를 장악했고 벨기에콩고, 이탈리아트리폴리와 리비아, 독일카메룬과 토고를 손에 넣었다. 아프리카 대륙에 남은 독립국은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뿐이었다.

아프리카 지도를 보면 나라간의 국경선이 다른 대륙과는 달리 일직선으로 곧게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를 분할하면서 정복국의 편의에 따라 마음대로 경계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아프리카 원주민의 삶은 처참하게 파괴되었는데 이는 열강들의 아프리카 분할 때문이다.

아프리카 분할은 유럽 몇몇 열강들이 아프리카에 침략하여 1차 세계대전이 있었던 1914년까지 식민지로 분할된 사건을 말한다. 19세기 말 유럽의 열강들은 세계 각지에 대한 식민지 경쟁에 나섰는데 아프리카 역시 주 대상이었다. 특히 1884년에서 1885년에 걸쳐 열린 베를린 회의영국, 프랑스, 독일의 아프리카 분할벨기에의 콩고에 대한 식민 침략을 정당화했다.

15세기 유럽 대항해 시대의 탐험가 바르톨로뮤 디아스희망봉 탐험바스쿠 다 가마인도 항로 개척이 있었다. 이 당시 아프리카에는 이페, 에티오피아 제국, 만딩고 제국, 송가이 제국, 다호메이, 콩고 왕국, 모노모타바 왕국, 보르누 왕국과 같은 여러 나라들이 있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아프리카를 미개척의 황무지와 야만의 땅으로 보았고 이러한 의미에서 검은 대륙이란 이름을 붙였다.

대항해 시대 이후 아프리카의 서해안 항로를 따라 유럽인들이 건설한 여러 항구들을 중심으로 식민지화가 시작되었는데 아프리카 서해안에 붙여졌던 '상아해안', '황금해안', '노예해안' 등의 이름이 붙여졌다. 당시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무엇을 가져갔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거대한 대륙이지만 오지 중 오지인데다 풍토병 등이 있어 유럽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인데 데이비드 리빙스턴 등이 아프리카를 관통하여 인간이 들어갈 수도 있다는 여지를 보인 것이다. 리빙스턴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될 수 있는 요인 중 하나인데 결론을 말하면 리빙스턴스탠리에게 준 지도는 결국 유럽의 아프리카 침탈의 수단이 되었다.

물론 아프리카의 식민지는 이보다 반세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1830년대에 이미 프랑스알제리를 자국의 식민지로 만들었고 영국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로 케이프 타운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까지도 아프리카의 사하라 이남 지역유럽 제국주의가 지배하지 못한 곳이었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19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유럽의 주요 국가와 미국 등에 확산되었으며,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게 되었다. 독점 자본주의, 금융 자본주의에 도달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국내에 축적된 잉여 자본의 투자 시장을 확보하기 위하여 새로운 식민지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더불어 1873년에서 1896년까지 장기 불황이 지속되자 영국, 프랑스,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아프리카식민지화하고 세계 자본주의 시장에 편입시키려는 계획을 수립했다.

바로 이 절묘한 순간에 스탠리에 고무된 레오폴드 21876년 개인 자격으로 국제 중앙아프리카 탐험 및 문명협의회를 조직하고 헨리 모턴 스탠리를 콩고 분지에 파견한 것이다.

 

아프리카 분할

스탠리의 탐험 결과 벨기에콩고 지역에 진출하게 되자 유럽 각국은 이에 자극받아 아프리카에 탐험가를 파견하였다. 1880 프랑스는 남부에 있는 벨기에 콩고에 직접 대응하여 콩고 북쪽에 프랑스 보호국을 설립했다. 1882영국이집트를 정복하여 아프리카 대륙을 장악하기 위해 서유럽의 모든 세력들 사이에 치열한 경쟁을 불러일으키자 1884년 베를린에서 오토 폰 비스마르크베를린 회의를 주최했다. 여기서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 식민지화에 대한 원칙을 합의했다. 여기에서 합의된 사항은 다음과 같다.

 

벨기에 국왕은 개인 자격으로 콩고의 통치자가 되며 콩고는 자유 무역 지역으로 한다.

아프리카의 특정 지역을 자국의 식민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실제 그 지역에 대한 통치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여야 한다.

 

이에 따라 벨기에가 콩고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 수 있었지만 다른 나라들은 식민지를 인정받기 위해 효과적인 점령을 채택했다.

간단히 말해 이미 다른 유럽 국가가 점유하고 있는 모든 영역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점령되지 않은 지역은 먼저 교역로를 확보하거나 원주민과 협약을 맺는 등 '실효적 지배'를 한 국가의 소유권을 인정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각국은 자신들이 관여하는 지역에 대한 정당한 주장을 갖기 위해서 무엇보다 군대 등을 파견했다. 아프리카를 효과적으로 점령하기 전에는 어떤 영토도 공식적으로 주장 할 수 없기 때문으로 아프리카가 지옥으로 변하게 된 이유다.

아프리카에서 영국종단 정책을 실시하여 남쪽의 케이프 식민지와 북쪽의 이집트를 식민지로 연결하려고 노력하였다. 프랑스횡단 정책을 실시하여 알제리와 마다가스카르 섬을 연결해 식민지를 확대하려고 시도하였다. 그 밖에 독일, 이탈리아 등도 아프리카의 식민지화 경쟁에 뛰어들었다. 남아공의 네덜란드 아프리카 공화국조차도 악명 높은 보어 전쟁에서 영국에 의해 정복되었다.

결국 유럽의 먹이가 된 아프리카는 베를린 회의가 있은 지 30년 만인 1914년 무렵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를 제외한 아프리카 모든 지역이 유럽의 식민지로 분할되었다.

 

<기독교인보다 많은 회교도>

유럽이 아프리카를 거의 전부 석권했음에도 현재 아프리카에 이슬람교도가 많다는데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한다. 아프리카를 말한다면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제국주의가 점령한 지역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소 이상하게 여길 수 있는 일인데 이는 이슬람의 역사를 보면 이해가 된다.

7세기 아라비아반도에서 이슬람교가 창시되고 이슬람 세력북아프리카를 침략하면서 이집트 지역파티마 왕국, 아이유브 왕국이슬람 왕조가 들어선다.

 

블랙아프리카(초록색)

이슬람교가 사하라 사막을 넘어 블랙아프리카까지 퍼지기 시작한 것은 11세기 무렵으로, 평화적인 포교활동과 지하드, 그리고 북아프리카와 블랙아프리카와의 교역활동에 힘입어 널리 전파되었다. 이슬람교의 블랙아프리카로의 확대과정은 19세기 말에 시작된 열강의 아프리카 식민지 분할기에도 계속되었다.

상술이 좋은 이슬람 상인들은 사하라 사막을 건너 지중해와 서아프리카를 잇는 교역로를 개척했는데, 아프리카 서부에서 무역과 금광으로 번영했던 아프리카의 말리 왕국, 송하이 왕국 등이 모두 이슬람 문화 영향을 받았다. 인도양과 통하는 동부 아프리카 해안가에는 아랍 상인들이 무역 거점 기지로 삼은 도시들이 번성했다.

오늘날 아프리카의 이슬람권북부와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하며, 동부에서는 수단,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그리고 케냐에서 탄자니아를 거쳐 모잠비크 북부에 이르는 연안부에도 띠 모양으로 이슬람권이 형성되어 있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의 총수1981년 기준으로, 14,574만 명으로, 그 가운데 반수가 북아프리카, 1/4이 서아프리카, 나머지 1/4이 동부 및 중앙아프리카에 각각 거주하고 있다.

반면에 기독교인은 총 13,091만 명으로, 개신교가 약 6,978만 명, 가톨릭이 약 4,802만 명, 동방 정교회계 및 기타가 약 1,310만 명으로 회교도보다 적은 숫자다. 기독교인의 분포지역은 대체로 이슬람교도의 분포지역에서 벗어난 블랙아프리카가 중심이다.

블랙아프리카는 사하라 남쪽에 위치한 아프리카 국가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지역은 아랍 세계의 일부인 북아프리카와 대비되는데 그곳의 흑인 인구와 관련하여 블랙 아프리카로 부른다.

 

<스탠리의 패악>

학자들은 지구상에 태어난 인간 중에서 가장 사악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스탠리를 꼽는다. 리빙스턴이 호의로 준 지도 한 장스탠리에 의해 완전히 변질되어 아프리카 지역이 멍에의 굴레 속으로 빠져들며 유럽의 제국주의에 의해 철저하게 약탈당하고 유린되었다는 것은 지구 상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런 고통이 지금도 이들 지역에서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특히 스탠리에 의해 촉발된 아프리카 식민지는 아프리카로부터 자신들이 필요한 것만을 수탈하는 장소로만 여겼기 때문에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어떠한 혜택이나 자산이 돌아가지 않았다. 일부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이 원래 야만인으로 살아왔으므로 그들에게 문명을 이식하여 야만적인 행동을 파괴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아프리카인들이 갖고 있는 영토에서 나오는 재산을 수탈하는 것이 문제가 될 리 없다는 것이다.

현재는 수많은 나라가 독립하여 명목상 아프리카인들이 나라를 통치하는 곳도 적지 않다. 이 문제에 관한 한 학자들의 지적은 냉철하다. 아프리카인들에게 독립을 준 것은 독립을 주더라도 아프리카로부터 필요한 것을 얻는 데 큰 불편이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프리카에서 물질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는 한 유럽인들의 지배가 아프리카에서 종식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렬로 묶인 짐꾼 행렬

리빙스턴도 아프리카의 현 상황에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고 지적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가 주창한 아프리카의 기독교화와 노예 해방유럽의 제국주의를 통해야 한다고 믿었고 이를 실천하는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아프리카인들의 문명화가 아프리카인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적인 생각을 토대로 아프리카가 제국주의의 먹이가 되었음은 물론이며 이를 리빙스턴의 업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가 제국주의에 얼마나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리빙스턴과 스탠리를 같은 급으로 볼 수는 없는 일이다.

학자들이 아프리카에 관한 한 아프리카의 현재와 같은 상황을 만들게 된 근원적인 씨앗은 스탠리와 레오폴드 2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단언하여 말한다. 그런데 스탠리는 전제 군주도 아니고 권력자도 아닌 한 사업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계의 역사가 한 개인의 영달과 물욕에 의해 얼마나 변질될 수 있으며 또 큰 파장을 갖고 올 수 있는가를 보여 준 장본인이다. 스탠리와 같은 인물이 또 다시 나타날 수 있는 지 예의 주목할 만하다.

 

참고문헌 :

데이비드 리빙스턴, 모리 이즈미, 뉴턴20046

콩고손목 수백만개 사라졌다, 레오폴드 대학살, 홍주희, 중앙일보, 2018.02.17

[숨어 있는 세계사] 처음엔 '무역기지'로 개척17세기 '노예 보급기지'됐죠, 윤서원, 조선멤버스, 2019.05.22

벨기에, 60년만에 콩고민주 식민지배 가혹행위에 사과, NEW1, 2020.06.30

벨기에는 왜 60침묵의 전통깨고 콩고에 사과했나?, 최현준, 한겨레, 2020.07.10

웨스터민스터 사원, 리그베다위키

아프리카 분할, 위키백과

https://likumc.org/cp/?p=11805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weddingbhc&logNo=30070299980&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https://m.blog.naver.com/joonho1202/221714417776

세계사의 100대 사건, 리더스다이제스트 ()동아출판사, 1995

질투하는 문명, 와타히키 히로시, 자작나무, 1995

레오폴드왕의 유령, 아담 호크쉴드, 무수,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