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로마제국

로마 검투사의 자존심 : 글래디에이터(2)

Que sais 2020. 12. 18.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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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선수들의 경연장

학자들은 조련을 받아 온순해진 동물의 쇼는 시대가 지남에 따라서 매력을 잃게 되었다는 것에 동조한다. 그래서 보다 자극적인 경기가 벌어지곤 했다. 코뿔소는 코끼리와, 곰은 물소와 싸우는 등 동물끼리의 결투도 벌어졌다고 추정한다

동물끼리의 싸움도 시시하게 느껴지자 로마의 집권자들이 이러한 의식을 검투라는 방식을 차용하여 로마인들을 보다 다독거리는 방법으로 변형시켰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포로가 된 노예들과 동물들이 싸웠는데 노예들은 갑옷을 입지도 않았고 방패도 갖지 않고 오로지 작은 칼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람과 동물과의 싸움은 인간이 주로 승리했으나 사자 등 동물이 승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특별한 축제에 한정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검투 테라코타

이런 과정을 거쳐 인간끼리의 검투가 등장하는데 인간끼리의 검투는 군중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 아니라 로마의 전신으로 볼 수 있는 에트루리아인들의 죽음의 의식에서 비롯했다고 추정한다. 에트루리아에서는 저명인사가 죽으면 노예들 간의 결투를 공개적으로 열었다. 그것은 신에게 인간의 피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결투라는 형식을 벌려 패배자신에게 희생물로 제공되고 승자는 살려주었다.

그런데 로마인의 집권자들이 이러한 의식을 검투라는 방식을 차용하여 로마인들을 보다 다독거리는 방법으로 변형시켰다는 것이다. 이후 검투로마의 간판 스타가 될 정도로 많이 벌어졌다. 3두 정치를 도입한 세자르시저의 경우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하루에 640명의 검투사들을 동원했다. 106다시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트라이얀 황제117일 동안에 10,000여명의 검투사를 동원했는데 기록에는 대부분이 포로였으며 11의 결투를 벌렸다고 특별히 적었다.

인간끼리의 검투도 흥미를 주기 위해 여러 모로 준비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흑인과 백인의 검투도 있었고 흑인끼리의 싸움이 벌어졌는가 하면 때론 여자와 난쟁이가 싸우기도 했으며 여자 검투사끼리 싸우기도 했다고 한다.

검투의 대명사는 남자인데 여자 검투사들이 있었다는 말에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정말로 여자 검투사가 있었느냐이다. 그런데 악명 높은 갈리쿨라 황제가 살해되자 다음 황제로 추대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황비멧살리나검투사 출신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녀는 로마 사상 가장 유명한 탕녀로도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 그녀가 황비가 되기 전에 검투사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멧살리나를 비하하기 위한 가짜 뉴스라는 말도 많았지만 여자 검투사의 존재여부는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 거리였는데 로마에 여자 검투사가 존재했다는 것은 근래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 내용은 <로마의 여자 검투사 그래디아트리스>에서 별도로 설명한다.

 

<도 아니면 모?>

대부분의 검투사는 포로, 노예, 죄인으로 훈련소에서 철저히 단련되었고 검투사들을 양성하는 전문 기관에서 훈련받았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검투사가 모든 경기에서 아니면 라는 식으로 죽음의 결투를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상류층 자제들이 원형경기장에서 구경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경기에 참가하기도 했다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2001년 아카데미 작품상, 남우주연상을 비롯하여 5개 부분에서 수상한 글래디에이터는 바로 검투사가 되어 돌아온 영웅의 드라마틱한 복수담을 줄거리로 삼았다.

 

로마의 6현제 중에 하나로 명상록으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막시무스를 총애하여 아들이 아닌 그에게 권력을 넘겨주기로 한다. 그러나 황제의 아들 코모두스는 질투와 분노를 느껴 급기야 황제를 살해하고 황제가 된다. 코모두스는 막시무스와 그의 가족을 죽이라고 명령하지만 막시무스는 극적으로 살아남고 노예로 전락하여 투기장의 검투사로 훈련을 받는다. 그는 검투사로서 매 경기마다 승리로 이끌면서 명성과 인기가 날로 높아지며 황제의 누이루실라를 만난다. 황제인 코모두스는 어느새 민중의 영웅이 된 막시무스가 자신이 살해하도록 명령한 장본인임을 알았지만 영웅을 함부로 죽일 수는 없었다. 그 와중에서 코모두스에 대한 반란이 착착 계획되며 루실라 역시 막시무스의 반란을 돕는다. 검투사인 막시무스 역시 콜로세움에서 검투를 벌인다. 이들은 노예 신분이고 이기면 다음 검투 시합까지 살아남을 수 있고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난다. 막시무스는 용맹한 로마제국 군대를 통솔했던 장군답게 검투사로서 힘과 지혜를 과시하며 관객의 시선을 끌면서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코모두스는 로마 황제임에도 매우 놀라운 기록을 갖고 있다.

그는 로마에서 가장 강한 사나이로 인정받기 위해 1,000회 이상 투기장에서 싸웠다는 것이다. 그 중 355회는 아버지가 황제로 있을 때였으며 735회는 자신이 황제일 때였다. 그가 검투사와 싸워서 살해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며 그렇다고 그와 결투한 상대자가 모두 살해된 것은 아니다.

 

코모두스 황제

실제로 코모두스는 돈을 걸고 싸우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는 결투에 나설 때마다 검투사들의 공동기금에서 50만 세스테르츠를 송금하도록 시켰다. 코모두스는 그리스의 헤라클레스라는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자 당시 유명한 검투사였던 파울루스를 선망하여 자신의 동상 밑에 그의 이름을 새기기도 했다. 검투사들의 인기가 어느 정도로 높았는가를 보여주는 실예이다.

서기 79820, 로마에서 약 200킬로미터 떨어진 베수비오에서 강력한 화산 폭발이 일어나 화산재가 폼페이 시를 뒤덮어 수백 명이 사망했다. 화산이 폭발력에 비하면 상당히 작은 숫자인데 이는 화산폭발을 사전에 예기하여 많은 사람들이 무사히 대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폭발로 도시 자체가 화산재로 파묻혔기 때문에 1748나폴리의 찰스 3가 발굴 지시를 내릴 때까지 로마의 도시는 안전하게 원형을 보관할 수 있었다. 아직도 전체 도시의 1/3이 아직 발굴되지 않은 상태인데 원형극장의 벽에 누군가가 다음과 같은 낙서를 했다. 인기 있는 검투사에게 보내는 팬 레터였다.

 

모든 결투에서 당신은 승리했습니다. 그것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입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들어갈 정도로 검투사가 모두 승리하기 어렵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예이지만 검투사들의 경기에서 패배자가 항상 살해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로마에 남아있는 검투사가 직접 쓴 낙서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원형경기장에서 20여 번의 결투에 참가했는데 6번 패배했다고 적었다. 이것은 검투사끼리의 결투에서 6번이나 패배했는데도 불구하고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검투장에 들어온 검투사의 510% 정도가 살해되었는데 이는 9095%의 검투사가 살아남았다는 것을 뜻한다.

검투사들은 오늘날의 프로 스포츠에 출전하는 선수와 다름이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유명한 검투사에 돈을 걸었다. 검투사들이라는 직업 자체가 로마인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으므로 유능한 검투사는 매우 돈을 많이 벌었다. 검투사들은 검투의 수익금의 일부를 나누어 가졌는데 검투 초보자인 경우도 보통 관리의 3배나 되는 돈을 받았다.

실제로 검투사들의 훈련지에는 성공하여 은퇴한 돈 많은 검투사를 부러워하는 낙서도 남아있다. 유명한 검투사의 인기가 높은 것은 많은 여자들이 검투사의 몸을 만지기만 해도 행운이 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검투가 인기 종목이라는 것은 벽화로도 알 수 있다.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의 흉내를 낸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로마의 그림들을 보면 어른들이 사냥에서 황소나 코뿔소를 올가미에 걸듯이 어린이들이 산토끼를 상대로 올가미를 걸면서 사냥하는 장면이 나온다. 양이나 염소, 에 끌린 2륜차를 타고 놀면서 전차 경주의 기수가 되는 장면도 있다. 이것은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진 당시의 검투나 경기가 모두 위험하지 않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로마의 검투가 상당히 와전되있다는 점으로 한 학자는 현재나 옛날이나 자기 자식들이 원형경기장에서 모두 죽는다는 검투 경기에 참가하려고 연습을 한다면 허락할 부모가 있겠는가하고 반문했다.

검투사가 모두 살해되지 않았다는 것은 히포크라테스와 함께 고대 의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현 터키 지역인 페르가몬의 갈레노스(129199)의 글로도 알 수 있다. 그는 종류에 따른 약물의 배합에 대하여에 다음과 같이 검투사를 치료한 내용을 적었다.

 

‘나는 다친 힘줄을 치료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나는 28세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막 고향으로 돌아왔다. 나는 내가 만든 약물의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그것을 나와 같은 도시에 사는 의사는 물론 인근 도시에 사는 동료 의사들에게도 나누어주었다. 나는 우리 도시의 대사제가 아직 젊은 나에게 검투사의 치료를 맡긴 이유를 알지 못한다. 당시 나는 내가 고안한 방법으로 허벅지 앞쪽 아래 부위를 다친 검투사를 치료했다. 상처가 비스듬히 난 경우에는 다치지 않은 힘줄을 노출시켜 수술할 때 실수로 이를 상하지 않게 했다. 상처가 작거나 수직으로 난 경우에는 안전하게 붕대를 감는 치료만 했다. (중략) 나는 허벅지 앞쪽 아래 부위에 깊은 상처를 입은 어떤 기마검투사를 치료한 적이 있었다. 그의 상처는 위쪽 가장자리가 위로 당겨 올라가고, 아래쪽 가장자리는 슬개골 쪽으로 당겨져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감히 분리된 근육의 양쪽을 꿰매어 벌어진 상처를 봉합했다. 또한 힘줄을 노출시킨 다음에 이들을 다시 꿰맸다. (중략) 나의 수술이 성공하자 해부학 지식이 없는 일부 의사들이 그대로 따라했는데 그들은 근육을 안전하게 꿰메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모든 근육에서 막들을 분리시켜 버렸다.’

 

히포크라테스와 함께 의학의 성인으로도 거론되는 갈레노스가 검투사를 직접 수술했고 다른 의사들도 시술했다는 것은 검투사들이 많은 부상을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 살해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패배한 검투사가 모두 살해되었다면 갈레노스가 치료할 검투사가 있었을 리 만무다.

 

노예의 목숨은 승리자의 권한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것처럼 검투사의 실상이 과장되었기는 하지만 검투사들끼리의 싸움에서 많은 검투사들이 살해된 것은 사실이다. 로마의 검투사가 된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대부분의 검투사들은 포로 또는 주인이 자신의 노예를 관중의 흥을 돋구기 위해 검투사로 명령한 것이다.

노예를 지칭하는 라틴어 세르부스(servus)살려진 자라는 뜻이다. 원래는 죽을 운명의 사람들이지만 죽이지 않고 살려주었다는 뜻이다. 큰 틀에서 노예전쟁포로를 의미하며 임의대로 처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포로 또는 노예들은 살려진 자이지 그들은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그들의 목숨은 언제든지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사여탈권은 주인에게 주어진 말하는 도구였다. 특히 그들이 자식을 낳게 했다는 것은 죽이지 않고 큰 은혜를 주었다는 뜻이므로 노예의 자식들이 노예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대 사회는 전쟁으로 점철되었으므로 당연히 노예의 숫자도 엄청났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인구는 대략 30만 명으로 추산하는데 그 가운데 노예는 약 40퍼센트였다. 아테네의 라우레이온 은광에서는 1만 명이 넘는 노예가 작업을 했으며 델로스의 노예 시장에서는 하루에 1만 명의 노예가 거래됐다고 한다. 특히 고대에 누구도 노예의 존재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태어날 때부터 지배하도록 되어 있는 집단과 지배받도록 되어 있는 집단이 있다선천적 노예론을 제기했다.

로마 시대 스페인의 카르타헤나 광산4만 명이 넘는 노예가 있었다고 알려진다.

로마를 대표하는 제도 중 하나가 노예제도이므로 로마의 노예에 국한하여 설명한다. 과거 어느 나라나 유사한 노예제도가 있었지만 로마의 노예 제도는 다른 국가와 다소 다르다. 우선 노예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었다.

학자들은 로마 인구의 3분의 1 또는 로마제국 전역을 합하면 약 5분의 1노예였다고 추정한다. 한마디로 노예들의 노동을 토대로 로마 국가가 운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강제노역에만 동원된 것이 아니다. 이들은 가정, 농업, 광산, 제조업, 건설 및 도시 내의 다양한 서비스에서 봉사했다.

로마의 경제는 주로 농업과 전쟁에 의존했다. 농업은 인구를 유지했고 군사 캠페인으로 제국을 운용하는데 다양한 자금을 창출했다. 역사가 아피안(Appian, 95165)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부자들은 자신의 소유물이나 가난한 사람들의 작은 소유물에 인접한 재산을 사거나 압류하여 대규모 목장을 운영했다. 자유인들이 군대에 복무하는 것을 피하려고 노예가 되기도 했는데 그들이 많은 아이들을 낳는데다 노예들은 군 복무 의무가 없으므로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더불어 전쟁 포로나 해적들로부터 공급되는 엄청난 수의 노예들이 로마에 유입되었다. 로마 시대에서 가장 악명높은 노예 시장실리시안 해적들이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델로스 시장이다. 물론 대부분의 로마 도시에 노예 시장이 존재했고, 이를 선전하기 위해 안내판들이 걸렸다.

노예에 대한 열악한 대우는 잘 알려져있지만 로마의 유명한 철학자 세네카의 기록은 매우 놀라게 한다. 그는 모든 노예가 잘못 취급된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세네카는 두 명의 유명한 노예에 대해 적었다. 첫째는 그리스의 디오게네스(기원전 404323)와 로마의 에픽테투스(기원전 50130)로 그들은 진정한 가족으로 대우받았다고 말했다. 디오게네스는 주인 아이들의 교육을 담당했고 에픽테투스의 주인은 그를 금욕적인 철학을 계속 연구하도록 배려했다.

로마에서 노예는 로마인이 내세울 수 있는 지위의 상징이었는데, 노예 숫자와 함께 외국인 노예들을 갖고 있다는 것은 더욱 큰 자랑거리였다. 대부분 한 두 명의 노예를 소유할 수 있었지만 적어도 15명 정도의 노예를 갖고 있어야 인정받는 로마인으로 간주되었고 부호들은 수백 명의 노예를 갖고 있었다.

 

벤허의 배젓기 한 장면

노예들이 가장 열악한 대우를 받은 곳은 광산공공 분야에서의 노역이다. 노예들은 감옥과 같은 조건의 막사 건물에 수용되었고 종종 사슬에 묶여 있었다. 특히 로마 함선에서 노를 젓는 노예들의 상황은 최악인데 아카데미상을 11개나 수상한 벤허에서 로마 함선에서 3개월을 넘기기 어렵다고 한 것이 단적인 예이다.

노예들이 얼마나 심한 대우를 받았는가는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매몰된 폼페이에서 발견된 유골로도 알 수 있다. 유골을 조사한 학자들은 극심한 과로와 영양실조로 인해 발생하는 만성 관절염과 사지의 왜곡이 두드러지게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