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로마제국

로마 검투사의 자존심 : 글래디에이터(3)

Que sais 2020. 12. 18.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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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의 가격>

시간이 흐르면서 로마에는 자유민보다 노예가 더 많아졌다. 이는 로마의 부자들이 대규모 농장을 소유하여 노예 네트워크가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인에 따라 건장한 노예를 가정이나 농업에 종사시키지 않고 검투사로 키웠다.

주인이 노예의 자유 의지와는 달리 검투사로 만드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검투사는 남성으로 가장 유명한 노예가 로마에 대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스파르타쿠스.

브래들리(K.Bradley) 박사자유 의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로마에서 자유란 일반적인 권리가 아니라 선택 특권이었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자유는 다른 사람들이 노예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노예는 악한 것이 아니라 로마 시민들에게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노예가 승자의 권리라는 사실은 로마의 문화적 우월성을 배경으로 타인을 지배하는 신성한 권리를 정당화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물론 노예가 전혀 자유인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기록에 의하면 노예가 자신의 자유를 주인으로부터 구입하기도 했으며 자유를 얻은 후 노예를 소유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자유를 얻은 이시도루스는 무려 4,000명이나 되는 노예를 소유했다고 알려진다.

노예 가격을 보면, 일정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네로 황제 시대유대인 한 소년의 가격이 300데나리우스 정도였는데 당시 창녀 1명의 가격은 600데나리우스, 희랍어를 할 줄 아는 미소년은 2,000 데나리우스이며 미숙련 성인의 경우 500600데나리우스였다. 참고적으로 당시 로마 병사의 1년 양식비60데나리우스 정도였다.

물론 노예의 가격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 루쿨루스의 주둔지에서는 황소 한 마리의 값1 드라크마 였는데 노예 한 명의 값이 4 드라크마였다. 노예의 가격을 획일적으로 비싸다거나 매우 싸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흥미로운 것은 로마가 제국 시대로 들어가 전쟁이 상당 부분 사라져 노예 공급이 줄어들자 노예의 가치가 높아져 노예들을 잘 대우했다는 기록들이 등장한다. 주인으로서 노예들이 반항만 하지 않는다면 노예들을 잘 관리하는 것이 자산 가치를 높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로마 시대에 노예 관리 서류도 발견된다. 노예에게 어떤 음식과 의복이 가장 좋은지는 물론 휴가를 주는 방법도 적혀있다.

로마에서 검투가 계속 진행된 것은 로마인들의 믿음과도 관련이 있다.

로마인들의 생각은 간단했다. 패배한 자는 승리자에게 이미 목숨을 빼앗긴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생포된 적을 일단 살려주는 것은 그만큼 생명을 연장시켜 준 자비이므로 승리자는 패배자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루어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수많은 정복지의 주민들을 노예나 그보다 더한 환경에 몰아넣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으며 패배자의 목숨을 언제든지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은 승리자의 권리였다.

 

옥타비아누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만남

이것은 시저의 부인이자 자신의 상전이었던 클레오파트라를 냉정하게 처리한 옥타비아누스의 예에서도 잘 나타난다. 안토니우스와 연합한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와 운명의 결전을 치루지만 결국 패배한다. 안토니우스가 자살하자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세자르와 안토니우스를 유혹했던 방법으로 미인계를 사용하려고 한다.

전해지는 말로 옥타비아누스가 그녀의 접근을 한 마디로 거절해 버렸을 뿐만 아니라 패배자인 그녀를 로마로 보내 길거리에서 쇠사슬로 묶어 끌고 다니겠다고 했다는 말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당시에 패배자는 왕이나 왕비일지라도 벌거벗겨 쇠사슬에 묶은 후 로마 거리를 행진하게 하는 것이 관례였다.

클레오파트라도 일단 로마와 싸워 패배하였기 때문에 자신을 후계자로 지명한 시저의 부인이었지만 그러한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이다. 물론 클레오파트라는 이러한 모욕을 감수하지 않고 스스로 독사에게 물려 죽음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최후의 자존심을 지킨다. 기원 전 30의 일이었다.

로마인의 생각, 즉 승리자인 옥타비아누스로서는 그런 결정이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문제는 당하는 측의 생각이었다. 그들도 로마인과 같이 똑같은 인간이었고 로마인에게 패배하기 전에는 일국의 고관이나 지배자인 경우가 많았다. 그들이 노예나 포로가 되었지만 로마인들의 생각이 그대로 적용될 리는 만무였다.

 

<노예는 말을 할 수 있는 도구>

로마인들은 사람이 사용하는 도구를 세 가지로 분류했다. 수레나 삽처럼 소리를 내지 못하는 도구, 소나 말처럼 소리를 내는 도구, 마지막으로는 노예처럼 말하는 도구였다. 노예가 수레나 가축과 다른 점은 오직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노예의 공급원은 주로 전쟁이었고 시저갈리아 지역을 정복할 때 무려 100만 명의 노예를 얻었다고 했다. 어떤 학자에 따르면 기원전 1세기 로마에는 총인구 450만 명 중에서 150만 명이 노예였다고 한다.

노예의 해방에 대해서도 주인에게 잘 보이면 자비심이든 허영심이든 자유라는 보상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자 법은 이와 같은 무절제한 선심을 장려하기보다는 오히려 제한할 필요가 생겼다. 로마법에 따르면 노예는 소속 국가가 없기 때문에 해방과 함께 자기 주인이 속한 정치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렇게 되면 로마 시민의 특권이 훼손될 우려가 있으므로 예외 규정이 마련되었다. 즉 정당한 이유로 행정관의 허가를 얻어 정식으로 적법한 절차를 받은 자만이 이런 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더구나 주인이 노예를 해방시키려면 노예 가격의 5%노예 해방세로 납부하도록 했다.

 

검투사들의 싸움이 죽음의 결투만이 아니라 위험한 경기를 벌이는 일종의 스포츠이기도 하다는 것은 로마인들의 성향과도 관련된다. 로마의 남자들은 상처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검투사들끼리의 싸움에서 패배자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패배자가 비겁한 행동을 했을 경우에 한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포로나 노예에서 검투사가 된 경우 오히려 인기를 끌면 자유인이 될 수 있었다.

 

검투사들은 검투장 안에서 자유를 뜻하는 나무검을 받았는데 황제가 직접 주기도 한다. 나무검 즉 자유는 으로 살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노예들이 자유를 얻는 가장 빠른 방법은 검투사가 되는 방법이었다. 검투사를 자유의 길목으로 여겼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검투사가 되는 것을 선호했다는 것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예가 아닌 평민들도 검투사를 자원했는데 그것은 군인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인은 25년간 군복무를 해야하는데 검투사로서 5을 견디면 군복무가 면제가 되었다. 검투사들이 검투하는 도중에 죽는 경우가 많았지만 5년 간 검투사로서 생활하다가 은퇴한다면 그동안 벌어 놓은 돈으로 평생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더구나 유명한 검투사끼리 맞붙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유명한 검투사끼리 맞붙었다가 한쪽이 희생된다면 시민들로부터 볼거리를 빼앗기 때문이다. 유명한 검투사인 경우 1년에 1번에서 5번 정도로 검투에 나갔을 정도이다.

물론 검투 자체가 위험한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세네카가 적은 원형경기장의 검투는 이 같은 상황을 잘 알려준다.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살인이 시작되었다. 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고,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더구나 공격은 정확했다. 이것이 바로 군중이 바라는 구경거리였다. 구경꾼은 적을 죽여버린 사람에게 갈채를 보낸다. 그러나 그 역시 다음 경기에서 다른 상대에게 죽을지도 모른다.’

 

검투사들의 경기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모두 죽음으로서 경기가 마무리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들의 목숨이 경기장 안에서 좌우되는 경우가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에 검투사가 되려고 자원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은 검투사가 매번 죽음과 싸웠다는 공식이 과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검투사나 일반인이나 목숨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은 기본적으로 노예제도로 유지되었으므로 마크 카트라이트 박사는 로마의 국가와 문화가 로마를 구성하는 인구의 한 부분인 노예들을 착취하여 이루어졌다고 혹평한다. 설사 노예가 인간답게 대우 받았다는 글도 있지만 이런 좋은 대우는 대체로 노동자로서의 가치를 보존하고 향후 판매시 자산으로서의 가치를 보존하기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여하튼 로마는 역사로 진입한지 무려 1000년 이상, 동로마의 경우는 2000년이나 당시 세계 최고의 강국으로 군림하였다. 이 긴 역사 동안의 수많은 우여곡절이 일어났음에도 검투사들의 결투가 로마의 가장 잔인한 풍습으로 각인되어 있고, 장구한 로마시대를 통하여 검투사들이 오히려 가장 인기가 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현재도 이와 같은 일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다. 바로 투우.

 

프랑스 아를르의 투우 경기

인간과 야생 동물로 길러진 투우와 투우사가 격돌하는 것이 투우경기이지만 투우사가 거의 전부 이기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종종 투우가 승리하는 경우도 있는데 바로 그 위험성 때문에 스릴과 흥분을 관중에게 주는 것이다. 투우를 예술이라고 칭찬하는 사람의 변이다.

실제로 유명한 투우사일수록 투우와의 싸움에서 희생되며 투우사 자신도 투우와 싸움하는 순간에 죽는 것이 가장 영광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진 야수와의 싸움도 투우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인간들에게 스릴과 흥분을 느끼게 해주는 경기일수록 관람객이 많고 수익성이 높은데 그것은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이다. 자동차 경주에서 자주 사고가 일어나며 그럴 경우 치명상을 입는데, 만약에 자동차 경주가 위험하지 않다면 그들이 그만큼 돈을 벌 수는 없는 일이다. 검투사의 경우도 한 가지 잣대로만 평가할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2000년 후의 사람들이 맨주먹으로 권투 시합을 하다가 사망한 권투 선수나 투우에게 살해된 투우사에 대한 경기 결과를 어떻게 평할 지 궁금하다는 질문이 있다. 후대의 학자들이 권투 경기로 사망한 사건을 침소봉대하면 현대는 로마와 같은 검투경기가 벌어졌다고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참고문헌 :

로마 세계의 노예 제도, 마크 카트라이트, Ancient History, 2013.11.01.

역사의 지배자,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오늘의책, 2002

의학오디세이, 강신익 외, 역사비평사, 2007

서양사 개념어 사전, 김응종, 살림, 2008

미스터리와 진실, 이종호, 북캬라반,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