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로마제국

로마 제국의 굴욕 : 스파르타쿠스 반란(1)

Que sais 2020. 12. 24.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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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기원전 753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마을에서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 형제로부터 시작하여 지중해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이룬 고대 문명이다. 이들 문명은 고대 그리스, 오리엔트, 셈족, 서유럽 켈트, 게르만 등을 포용한다. 특히 로마는 고대 로마의 문화, , 군사 체제 서구유럽, 동구권을 막론하고 현대 사회의 법, 정치, 전쟁, 예술, 건축, 기술, 언어 분야 등의 기틀이 됐다는데 중요성이 있다.

 

로물루스 형제 동상

로마는 수백 년 동안 확장을 거듭하며 왕정에서 과두 공화정 그리고 제정으로 변모했다. 기원전 7세기경 로마는 지역 중심지로 번영하던 도시국가로 왕정 체제였는데 기원전 500년경, 왕정이 무너지고 귀족과 평민 계급공화정세웠다. 로마인들은 평민과 귀족 간200여 년 이상 투쟁과 타협을 반복하며 로마 특유의 과두정 체제를 이루면서 영토 확장 정책을 밀고 나가 마침내 기원전 272년 경 게누아 현재의 제노바에서 이탈리아 최남단까지 거대한 동맹 체제를 수립했다. 로마는 이후 여세를 몰아 150여 년 간 여러 정복 전쟁을 통해 갈리아, 카르타고 등을 정복하고 지중해 전역을 제패했다.

기원전 1세기 말 율리우스 카이사르씨를 뿌리고 그의 조카이자 후계자로 지명한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시작된 제정 초기의 로마 제국은 '팍스 로마나'로 불리는 태평성대를 구가했다. 이후 로마는 거대 제국이 되는데 1세기 말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98~117)의 로마 제국은 북으로는 스코틀랜드에서 남으로는 아프리카 수단, 서로는 포르투갈의 대서양 연안에서 동으로는 카프카스 지방까지 최대 판도를 이룩했다. 오늘날 면적으로 환산하면 현재 미국 영토의 2/3에 달한다.

그러나 로마 제국  기독교 공인 후 교황 선출 문제를 기화로 서로마, 동로마로 분할되더니 서로마 제국훈족의 아틸라에 의해 급격히 국력이 쇠진되어 476게르만족오토아케르멸망한다. 반면 동로마 제국은 이후 1000여 년 동안 계속 지속되었으며 1453년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한다. 이를 보면 서로마는 1200, 동로마는 2200여 년 동안 지속하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단일 국가를 유지한 국가 중 하나이다.

세계사를 볼 때 한 국가가 1000여 년 이상 존속한다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수많은 국가가 태어난 중국의 경우 대체로 200년 만에 왕조가 멸망했다. 이는 200년 이상 한 체제를 운용한다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즉 새로운 국가가 탄생필요충분조건이 생긴다는 것인데 이의 가장 단적인 예가 반란이다. 사실상 새로운 왕조의 탄생은 큰 틀에서 반란 즉 쿠데타로 완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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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위기>

로마는 세계 역사에서 매우 장수한 국가이므로 장구한 역사 동안 부침이 없을 리 없다. 특히 로마에서의 반란의 소지는 어느 국가보다 노예가 많았다는 점이다.

학자들에 따라 노예의 숫자가 달라지지만 대체로 자유민의 2분의 1 내지 3분의 1이 노예였다고 알려진다. 기원 전후 로마의 인구는 약 5,000만 명이고 전성기에는 거의 9,000만 명 정도인데 로마에서는 생각보다 반란이 많지 않았다. 장구한 역사 동안 크고 작은 반란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로마 정부가 동원될 정도의 반란이 많지 않았다는 뜻이다.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 정규군이 투입될 정도의 대규모 반란은 기원전 135, 기원전 104, 그리고 기원전 73년의 '스파르타쿠스 반란'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처음 두 번은 모두 대규모 농장이 많은 시칠리아에서 일어났고, '스파르타쿠스 반란'이탈리아 안에서 일어났다고 적었다.

그러나 깐깐한 역사가들은 시오노 나나미의 설명과는 달리 로마 정규군이 투입된 노예의 반란은 이 뿐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기원전 198라티움에서 노예들이 반란 음모를 꾸몄는데 거사를 앞두고 밀고자가 나와 2,000명의 군대가 투입되었다.

기원전 196년에는 에트루리아에서 노예 반란이 일어나 로마에서 출동한 1개 군단에 의해 제압당했다. 또한 기원전 185년에도 아풀리아에서 목동 노예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법무관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템프사누스는 이 반란 사건을 처리했는데 이때 무려 7,000명에게 유죄 선고를 내렸을 정도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에서 반란이 극히 적었으며 특히 고대 로마에 노예가 상당히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노예 반란이 극히 드문 이유로 로마인들이 노예를 친근하게 대했고, 노예들 사이에도 계층이 나누어져 있어서 단결 투쟁이 어려웠으며 또 노예들은 해방될 가능성도 많았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특히 군대를 투입해야 할 정도로 크게 일어난 노예 반란 중에서도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제외한 두 번의 시칠리아 노예 반란은 그들이 특수한 환경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나나미가 거론한 두 번의 시칠리아 노예 반란스파르타쿠스의 반란과는 질이 다르다. 세계사를 쓴 1세기의 역사가 디오도로스1시칠리아 노예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무엇보다 노예 소유주들이 노예를 극히 잔인하게 다루었던데 있었다고 적었다특히 엔나의 부유한 지주였던 다모필로스라는 자가 노예들에게 낙인을 찍고 가혹한 매질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음식과 옷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이에 노예들이 무슨 일이 벌어지든 지금보다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노예들 사이에서는 초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던 에우누스를 지도자로 옹립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2시칠리아 노예 반란로마 관리의 실정으로 일어났다.

 

스파르타쿠스 동상( 루브르 박물관 Denis Foyatier 조각)

이 당시 로마는 동맹국 자유인 출신으로 노예가 되어 로마의 속주로 끌려온 자들은 해방된다고 칙령을 발표했는데, 시칠리아의 노예 소유주들의 방해로 노예들을 해방시키지 않았다. 이에 반발한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디오도로스에 의하면 1차 시칠리아 노예 반란에서 반란자의 수는 무려 2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들 숫자만 보면 스파르타쿠스에 합류한 숫자보다 많다. 이들 숫자가 과장되었을 가능성은 많지만 로마에서 보낸 정규군과 한동안 잘 싸웠던 것으로 보아 상당한 숫자가 반란에 합류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런데 스파르타쿠스(?기원전 71)의 반란이 특별한 것은 로마의 반란 역사상 로마의 정규군이 스파르타쿠스 노예군에게 3번이나 연속적으로 격파 당했다는데 있다. 실제로 스파르타쿠스가 본래 의도대로 알프스를 넘어 트라키아지방으로 들어갔다면 로마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이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에 주목하는 것은 로마가 그동안 철저하게 지켜온 공화제를 폐지하고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제정으로 들어가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파르타쿠스 반란이 제압된 지 40년 후에 공화정은 사라진다. 이때의 토대를 로마의 1차 삼두정치의 일원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시저가 놓았고 이를 그의 조카인 아우구스투스가 마무리했다. 결국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자체로 로마를 전복하는데는 실패했지만 제국의 기틀을 뒤흔들어 다른 체제가 등장하게 되는 단초가 된 것이다.

스파르타쿠스의 초창기 기록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공식적으로 고대 로마 시대에 자유를 얻기 위해 싸운 트라키아 노예 검투사로 알려진다. 스파르타쿠스 개인에 대한 사항은 단편적이지만 플루타크 영웅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의하면 그는 트라키아의 유목민 출신으로, 명민한 머리와 대단히 튼튼한 신체를 갖추었고, 신분에 비해서 훨씬 교양 있고 정신력도 우수하여 트라키아인 노예보다는 그리스인에 가까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유목민 출신 트라키아의 '마이디(Maidi)' 부족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트라키아에는 그리스어로 '스파르타코스'라는 이름의 촌락이 있었으므로 그를 이 촌락 출신이라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 플루타크 영웅전에서 그의 아내는 스파르타쿠스와 같은 부족 출신으로 디오니소스의 광기에 들린 여자 예언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트라키아는 디오니소스 숭배의 중심지였다.

트라키아 지역은 현재의 그리스 북부에서 불가리아에 걸친 동구권의 광대한 지역이다. 불가리아인들은 트라키아인남슬라브족, 불가르족과 더불어 현대 불가리아인의 3대 조상 중 하나이므로 트라키아 출신인 스파르타쿠스를 자국의 영웅으로 여긴다.

 

광산에서 스파르타쿠스(영화 스파르타쿠스 한 장면)

여하튼 스파르타쿠스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고 처음에는 광산에서 일했지만 거인이고 근육과 뼈대가 단단해, 유명한 남이탈리아 캄파니아의 카푸아 검투사 양성소의 검투사로 팔려갔다

그런데 다소 놀라운 것은 아피아누스스파르타쿠스는 한때 로마군의 병사로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고 언급했다는 점이다. 이 설명을 상당이 많은 학자들이 지지하는데 스파르타쿠스가 로마군을 상대로 사용한 여러 가지 전술 능력을 볼 때 그가 태어날 때부터 노예 출신이 아니라 본래는 교양있는 자유인이었고 군대에 참가한 경험이 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콜린 맥컬로는 그의 소설 마스터스 오브 로마에서 스파르타쿠스가 실제는 이탈리아 출신의 로마인으로 로마병사였는데 모종의 이유로 탈영병 취급을 받아 검투사가 되었으며 당시 검투사 세계에서 인기 있던 트라키아 인역을 맡으면서 그의 이름이 트라키아인으로 바뀌었다고 묘사했다.

스파르타쿠스가 반란을 일으키기 3년 전인 기원전 77년 겨울부터 기원전 76년에 걸쳐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트라키아의 마이디 부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어떤 학자들은 이 전쟁에서 스파르타쿠스가 노예가 되어 이탈리아로 끌려와 검투사가 되었을 것으로도 추정하기도 한다.